#147화
“재미있는 회의였습니다.”
“의도대로 흘러갔으니 다행이죠.”
진석은 임원 회의가 자신의 뜻대로 흘러간 것이 만족스러운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건설 현장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다.
“어릴 때 한 번 왔었던 것 같은데, 그곳이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네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녹색 평야가 대부분이었던 판교는 현재 건설 붐이 일고 있었다.
작년 말일에 건축 제한이 풀리며 신도시 개발까지 연이어 결정되면서 땅값은 폭등 상태.
내가 한참 전에 사두었던 판교 땅값만 현재 시가로 1000억 원 가까이 될 정도였다.
건설 현장을 지나고 황야로 덮인 땅이 이어지자 진석에게 말했다.
“여기가 저희 호텔이 지어질 시작점입니다.”
“예. 봐두겠습니다.”
진석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1분, 2분이 지나갔다.
“저… 부회장님?”
“말씀하세요.”
“끝나는 지점을 말씀 안 해주셨습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저기 보이십니까?”
내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황야의 끝이 위치하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다니… 예. 보입니다.”
“저기까지입니다.”
진석은 입술을 벌린 채 맹한 표정을 지었다.
“호, 호텔을 이렇게 크게 짓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호텔만 지을 거면 이렇게 넓은 땅이 필요하지 않겠죠. 놀이동산을 비롯해 휴양 시설을 호텔 근처에 증축할 생각입니다.”
그제야 건설 규모를 가늠하기 시작한 진석이 입을 뻐끔거리다가 소리를 내었다.
“땅 매입에만 꽤 쓰셨을 텐데, 시공비까지 하려면 대체… 회장님께 지원이라도 받은 겁니까?’
“모두 제 개인재산에서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원래 갖고 있던 땅이라 매입 비용은 따로 없습니다.”
“예? 원래 갖고 있었다니 언제 매입하신 겁니까?”
“7년쯤 되었습니다.”
“.... 그때쯤이면 땅값이 얼마였죠?”
“지금 시가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
벙찐 표정을 짓던 진석이 아까 내가 말했던 지점을 넘어서도 차가 계속 움직이자 당황하며 말했다.
“땅도 안 둘러보고 그냥 돌아가시려고요?”
“여기 말고 한 군데 더 있거든요. 여기보다 고지대라 전망이 더 좋습니다.”
시시각각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진석 덕에 이동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추가로 매입했던 땅에 도착하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
자리에서 내린 진석이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전망이 좋네요. 판교가 훤히 보입니다.”
진석의 말처럼 이곳에선 판교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시야의 끝자락에는 서울의 건물들이 걸쳐 있었고, 그 뒤로는 한창 공사 중인 건설 현장들, 앞에는 황야가 펼쳐져 있다.
주변을 둘러보는 진석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무엇을 짓는 게 좋을까요?”
“흠. 판교의 특색을 살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만한 게 없으니 고민이 되네요.”
판교는 나중에 테크노밸리가 조성되며 IT 기업들이 밀집되지만, 지금은 이렇다 할 특색이 없었다.
고민을 하던 중 진석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태선 건설이 시공 가능한 상태입니까? 이 정도 규모라면 아무리 태선 건설이라지만 힘들 것 같은데요.”
진석의 말대로 태선건설은 현재 일본 사이타마스타디움과 중국 마카오 타워 시공을 맡으며 국내에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다.
“생각해 둔 건설사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같은 그룹 계열사가 나서지 않는다면 자본이 뒤따라와야 합니다. 수천억 원이 깨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까?”
호텔경영인의 습관인지, 곧장 자본에 대한 의문이 뒤따라왔다.
“곧 괜찮은 건설사가 나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의뢰도 아니고 나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진석을 보며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일찍 퇴근을 한 뒤 집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눈이 도로 한쪽에 소복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진석이 태선호텔의 사장으로 취임한 뒤 능숙하게 일 처리를 시작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지금 시기에 투자할 만한 곳은 이미 다 끝냈기 때문에 여유로웠다.
거기에 더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지도 꽤 되었으니 하루 정도는 쉬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해가 지지 않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제 겨울도 끝나가는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올해 겨울이 유독 추운 것 같았어요.”
임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순히 추운 정도가 아니었다.
철원은 어제 영하 29도로 역대 최저기온을 세웠고 서울의 날씨도 영하 18도 아래로 떨어졌다.
전체적으로도 평년 대비 영하 1도 이상 낮았으니 그 추위가 확연히 느껴졌다.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말했다.
“임기사도 오랜만에 일찍 집 들어가니까 선물이라도 사가. 그때처럼 조금 긁지 말고 시원하게 질러.”
“하하. 이거 늘 보너스를 챙겨주시니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래. 조심히 들어가.”
“예. 들어가십시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 향긋한 차향이 은근하게 풍겨왔다.
“저 왔습니다.”
발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영혜가 현관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어? 웬일이니, 네가 이 시간에 다 오고.”
“하하.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려고요. 괜찮죠?”
“그럼 나야 일찍부터 막내아들 보고 좋지. 안 그래, 영빈아?”
영혜의 돌아간 고개를 따라가니 영빈이 식탁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것이 보였다.
영빈이 한 쪽 손으로 들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이 시간에 형을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네. 오늘은 화실 안 갔어?”
“아까 갔다 왔지. 요새 일찍 일어나고 있어.”
“장하다, 장해.”
“이 자식이 자기가 형인 줄 아네. 하하.”
영혜와 함께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다가와 내 찻잔을 올려주었다.
영혜가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네가 태선호텔 부회장 달았다는 게 안 믿긴다니까. 어때? 부회장 생활은.”
“할만 해요. 할아버지도 많이 밀어주셨고, 자신도 있고요. 아, 참. 전문경영인으로 뽑은 사람이 외종숙이에요.”
“진석 오빠가 태선호텔로 갔다고?”
“네. 아버지가 말씀 안 하셨나 보네요.”
영혜가 장난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양반이… 그보다 네 아버지는 왜 안 오시니? 너도 이렇게 일찍 왔는데.”
“오늘 조금 늦으신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진석오빠가 호텔 관련해선 최고니까 잘 결정했어. 일 그만두고 해외로 놀러 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모르겠다만.”
영혜가 비어있는 내 찻잔에 다시금 차를 따라주었다.
영빈도 슬그머니 비어있는 찻잔을 영혜 쪽으로 내미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영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요새 필요한 거 없어?”
“왜, 용돈이라도 주게?”
“필요하면.”
영빈이 집안의 돈을 쓰지 않은 지 꽤 되었다고 준만에게 들은 터였다.
그놈의 예술병인지, 뭔지 자신이 번 돈으로 생활하겠다고.
물론 영빈이 인지도도 높고 수익도 꽤 된다고 알고 있지만, 재벌만 하겠는가.
영빈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수익은 알고나 말하냐? 너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꽤 번다.”
“그냥 뭐든 주고 싶어서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옆에 놓았던 서류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뽑아 영빈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
“집문서.”
“미친.”
영빈은 말을 뱉은 직후 영혜의 눈치를 보았다.
영혜는 지그시 노려보긴 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집문서를 선물로 주는 동생이 어디 있어. 그리고 나 아직 독립할 생각 없다.”
“별장으로 써도 되고, 작업실이나 갤러리로 써도 되고. 형 맞춤으로 지은 건물이니까 거절할 생각하지 마.”
“그게 무슨 소리냐, 내 맞춤이라니.”
“보면 알 거야.”
도색부터 시작해 벽화, 가구까지 영빈의 취향에 맞춰서 맞춤으로 제작되었다.
영혜가 가볍게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돈이 넘쳐난다고 너무 과소비하는 거 아니니?”
“하하. 어머니 말씀처럼 돈이 넘쳐나서 이 정도는 과소비 축에도 들지 못해요.”
영빈은 묘한 미소를 띠며 서류를 쳐다보더니, 결국 제 방으로 가져다 놓고 다시 돌아왔다.
“예상도 못 한 선물이지만 잘 쓸게. 고맙다.”
“그래. 언제라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하하. 든든하네. 내 동생.”
“이럴 때만 내 동생이지?”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게 쉬운 줄 아냐?”
어째 영빈과 대화를 할수록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
영혜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영혜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영빈이 선물도 준비했는데 설마 내 선물이 준비 안 된 건 아니지?”
“설마요. 당연히 있죠.”
나는 서류 가방에서 다른 서류철을 꺼내 영혜에게 내밀었다.
“설마 나도 집문서는 아니지? 별거라도 하라는 거야?”
“아버지랑 잉꼬부부인 거 다 아는데 설마 그럴까요.”
영혜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서류철을 받았다.
“그보다 선물이라면서 포장도 안 했어?”
“내용이 좋으면 된 거죠. 싫으시면 다시 가져갑니다?”
장난스럽게 팔을 내밀자 영혜가 서류철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서류철 안에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영혜는 시선을 내리며 서류를 읽어나가던 중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이거 혹시…”
“네. 어머니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패션 사업. 지금부터라도 하세요.”
영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의상디자인학과를 나온 영혜는 결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패션 쪽 일을 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파리 패션 스쿨까지 합격한 그녀는 자신이 패션 사업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출국 직전, 집안 사정으로 인해 모든 유학 일정이 취소되기 전까지는.
결국 준만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꿈은 잠시 유보되는 듯했다.
그 꿈이 완전히 깨진 이유는, 진태의 반대 때문이다.
나로서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 당시 그녀의 심적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뿐.
내가 영혜에게 건넨 것은 청담동에 있는 빌딩 한 채와 국내를 내로라하는 신예 디자이너들의 명단이었다.
영혜는 결국 흘러나온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영혜가 서류를 두 손으로 잡은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네 마음은… 엄마가 충분히 알았어. 그런데 괜찮아. 이제는… 다 잊었어.”
진태에게 거절당했던 것이 못내 걸렸던 걸까.
나는 영혜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제가 투자하는 거라고 하면 할아버지도 반대 안 하실 거예요. 아시잖아요. 제가 투자하면 다 성공해내는 거. 어머니한테 드리는 건 선물이 아니라 사업 제안인 겁니다.”
말을 듣고 있던 영혜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여전히 눈가엔 주름이 진 채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영혜가 고개를 흔들고는 말했다.
“아들 앞에서 이게 웬 주책이람. 고마워 강빈아. 엄마가 잘해볼게.”
이런 상황이 낯간지럽고 어색하기만 한 와중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느새 집안에 들어온 준만이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있었다.
“어떤 자식이 내 아내를 울린 거냐? 서강빈, 너냐?”
준만은 장난스럽게 내 가슴을 툭 치고는 영혜에게 다가갔다.
영혜가 활짝 팔을 벌리고 있는 준만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