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네. 외종숙님, 이제는 고진석 사장님이라고 해야겠죠? 잘 부탁드려요.”
“하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회장님.”
계획대로 전문경영인까지 뽑았으니, 이제 회사를 둘러볼 때가 되긴 했다.
한참 전에 정순에게 택배 동업을 제안하기 위해 간 이후로는 나도 오랜만이었다.
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예?”
“자리를 맡으셨으니 어떤 회사인지는 보고 가셔야죠. 그러려고 이 맞은편에 온 것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진석이 멀뚱히 고개를 돌려 태선호텔을 봤다.
그러곤 나지막이 말했다.
“허허…. 이렇게 갑자기 휴가가 끝날 줄은 몰랐는데요.”
“쉬신만큼 일하셔야죠. 갑시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준만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 봐야지. 부회장이 자리를 오래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쉬엄쉬엄하세요. 그리고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형님이 평소에는 개구진 모습이 있어도 호텔에 대한 마음은 진심일 게다. 믿고 맡겨봐.”
“처남. 아무리 그래도 개구지다니요.”
둘의 시시한 대화가 지속될 듯해 보이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석이 내 밑에서 일하기로 결정되었으니, 내가 눈치 볼 필요는 없다.
진석도 이내 준만과의 대화를 멈추고 자연스레 나를 따라왔다.
***
태선호텔을 받으며 받게 된 리조트, 골프, 관광, 스포츠 등 관리해야 될 계열사들이 많았다.
일일이 관리하기 어렵다 보니, 아직 사장이 바뀌었다고 연락도 못 돌린 곳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태선호텔 안에 있는 대회실에서 임원 회의를 열게 되었다.
대회의실의 중앙에는 테이블이 원의 형태를 띠며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어림짐작으로 오십은 넘게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선호텔의 이사들과 자회사 임원진들이 모두 모이자 적막한 대회의실이 꽤나 벅적했다.
나와 진석은 먼저 이곳에 도착해 앉아 있었는데, 우리를 곁눈질하는 사람은 많아도, 찾아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진석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아직 서정순 사장의 손이 닿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지금까지 연락해 온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어떤 표정들을 지었을지 궁금하네요.”
“흐흐. 사장 자리에는 일면도 없는 외부인이 앉는다는 걸 듣게 되겠죠. 저도 기대됩니다.”
진석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헛기침을 살짝 하고는 말했다.
“그런데 이러려고 그날 임원들은 보지 않은 겁니까?
며칠 전, 진석과 태선호텔을 방문했을 때도, 프론트 직원의 안내를 받고 호텔을 둘러보았을 뿐 임원들을 만나지는 않았다.
“아뇨. 그들이 저를 찾아와야지, 제가 찾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선택입니다. 밑의 사람을 부리려면, 서정순 사장의 어린 조카가 아닌, 유능한 기업가의 이미지를 각인시켜야 하니까요.”
“저야, 고사장님한테 대부분의 경영을 맡길 테니 상관없습니다. 이들을 부릴 줄만 알면 됐지, 제가 잘 보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진태에게 배운 것이기도 하다.
재벌이라면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내 눈치를 보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점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도움이 되었다.
“고사장님. 이미지를 각인시켜야 할 사람은 고사장님입니다. 십수 년간 서정순 사장 밑에서 일해온 사람들입니다. 외부인이 경영을 맡는 것에 쉽게 순응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나풀거리는 바지사장으로 지낼 생각은 없거든요.”
그 와중에 농담을 뱉는 진석의 여유 있는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전문경영인의 삶이 곧 진석의 삶이었다.
어련히 잘할 것이다.
직원 한 명이 강단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2001년 제1회 태선호텔 임원 회의가 곧 시작됩니다. 시작에 앞서 서강빈 부회장님의 취임사가 있겠습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내가 미리 언질한 내용이었다.
부회장 취임식이라고 해서 따로 자리를 마련해 떠들썩하게 하는 것은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의 초조하고, 긴장되는 눈빛들을 한 몸에 받으며 강단 위에 올라섰다.
테이블 뒤편, 강단 한가운데에는 스탠드 마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이크를 두어 번 두드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태선호텔의 부회장, 서강빈입니다.”
진석이 먼저 박수를 치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박수를 치기 시작하며 회의실을 울렸다.
내가 이어서 말했다.
“먼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태선호텔을 훌륭하게 이끌어주신 서정순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훌륭하신 임직원 여러분들. 여러분이 있어 태선호텔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호텔산업은 시대에 민감하게 변화하는 산업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고민은 깊어져야 합니다. 망설이지 않고 과감하게 저질러야 합니다. 남들보다 한 걸음 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말했음에도 지루할 정도로 뻔한 언사였다.
하지만 흔한 언사가 10분이 넘게 이어졌음에도 누구 하나 허투루 듣는 기색이 없었다.
취임사가 끝났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강단에서 내려가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저희 태선호텔의 이끌 사람은 호텔 로스의 전 CEO였던 고진석 사장입니다. 다들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예상대로 회의실에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진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단으로 걸어오는 사이 한 초로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서강빈 부회장님! 이제 막 부임하셔서 이곳 시스템에 대해 무지하신 것 같은데, 외부에서 경영인을 데리고 오다니요.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정순이 데자뷔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제 태선호텔의 부회장인 나한테 저따위 태도를 보이다니.
화를 낼 가치도 느끼지 못해 가볍게 뱉었다.
“직급 먼저 밝히고 의견 말하세요. 잘 들리니까 목소리도 낮추시고요.”
이곳에 오기 전 받은 임원 명단 중, 상단에 있던 얼굴이었지만, 직급과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열 개가 넘는 계열사들의 사장 얼굴을 외울 시간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직 서정순이 완전히 아웃되었다는 것을 모르나 보네. 정순에 이어서 자기가 맡을 자리를 외종숙이 뺏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어지는 여자의 말은 내 예상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하, 이영실 운영이사입니다. 설마하니, 몰라서 여쭤본 것은 아니실 테고. 이사회도 거치지 않고 총책임자를 뽑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운영이사라면 태선호텔의 이인자나 다름없었다.
호텔 사장를 넘어 만약 정순이 회장에 오른다면, 태선호텔의 총경영자의 자리까지 욕심낼 수 있는 자리.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제로로 변했지만.
쏘아붙이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도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이사님이야말로 무슨 생각이십니까. 지금 태선호텔이 이사회로 굴러가는 기업입니까?”
“예? 그동안 이사회를 안 거친 사안이 없었습니다만. 게다가 이런 중요한 결정이라면…”
“회장님 지분이 30, 제가 양도받은 서정순 사장의 지분이 25인 건 아실 겁니다.”
“... 그럼 이번 영입에 회장님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씀입니까?”
“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영실 운영이사님의 의견을 전달은 하겠습니다만, 이 결정에 대한 번복은 없습니다.”
진태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는 말에 영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진태에게 허락은 받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태선호텔의 경영 부분은 처음부터 나에게 일임했으니까.
진태는 이미 진석을 자리에 앉힌다는 소식을 채규로부터 전해 들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말이 없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영실이라는 이름은 태선호텔을 받기 전에도 들어 본 적 없다.
태선호텔이라는 우물 안 개구리가 설쳐대는 꼴이라니.
“이 이사님. 저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이만 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 그게….”
자기가 건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은 영실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회는 거치셔야 하지 않나요….”
나는 영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영실 이사 말고 다른 분들도 잘 들으세요. 이 회사는 이제 제 결정으로 굴러갑니다. 모든 것에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제가 결정한 사안은 이유를 따지지 않고 움직이세요.”
방금 전까지 이들이 누구의 줄을 잡고, 나에게 어떤 반발심을 가졌는지는 관심 없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지금 이 순간, 청중들은 누구의 줄을 잡을지 결정해야 할 것이고, 그 줄이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태선호텔을 떠나야 할 것이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부회장님 말씀 받들겠습니다.”
진석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내 옆에 서서 말했다.
“저도 간단하게 취임사 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진석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자리에 나와 원래 앉았던 자리로 걸어갔다.
내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한 진석이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호텔 로스를 한국 최고로 만드는 데 5년이 걸렸습니다.”
별안간 경쟁업체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석의 의도를 눈치챈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호텔 로스가 한국 최고라고 해서 자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본다면 뒤늦게 시작한 한국 호텔이야 우스울 뿐이죠. 그럼 미국은 어떨까요. 제가 처음으로 경영을 맡았던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가 미국 서부에서 최고 매출을 찍은 건 부임하고 7년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태선호텔의 경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목표로 삼아야 될 건 무엇이겠습니까?”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 진석이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태선호텔을 아시아 최고 호텔 업체로 만들어내겠습니다. 3년.”
진석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3년 안에 아시아의 최고를 만들어 낼 것이고 10년이면 세계 최고로 우뚝 서겠습니다. 태선호텔 가족 여러분! 시대의 흐름과 요구를 조금만 먼저 호흡합시다. 그렇다면 고진석. 이 석 자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그에 걸맞은 처우를 해드리겠다고요.”
마치 유세 현장을 방불케 하는 그의 연설에 내가 먼저 박수를 쳐주었다.
내가 먼저 박수를 치자 너나 할 것 없이 열정적으로 진석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의 취임사와 진석의 연설이 이들을 감동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걸 원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이들이 지금 알아야 할 것은 태선호텔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바뀐 주인을 따르기 싫다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