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45화 (145/249)

#145화

“네가 그 유명한 강빈이구나?”

진석이 밝게 웃으며 나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내가 생각했던 호텔 CEO와 거리가 먼 히피펌에 자꾸 시선이 갔지만, 마음을 다잡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네가 그런 말 하면 내가 뭐가 돼? 하하. 처남. 이렇게 얼굴 맞대는 건 오랜만이네요.”

준만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석에게 인사했다.

“예. 형님. 잘 지내셨죠? 그간 기별이 없었네요.”

“저야 은퇴하고 매일이 휴가죠. 그보다 얼굴이 많이 피셨습니다. 제가 세상을 끊고 살긴 하지만 태선물산 사장 자리에 올랐는 소식은 들었거든요.”

“자리가 좋긴 하더군요. 하하. 올해는 승진까지 해서 이제는 부회장입니다.”

“어이쿠, 이거 미래의 회장님 아니십니까?”

넉살 좋게 받아치는 진석을 보며 준만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긴, 물산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준만이 과묵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최근 보여주는 언행을 보면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싶다.

둘이 한참을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을 동안 나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진석은 말을 할 때 과장되게 하거나 일부러 웃음을 짓는 제스쳐가 많았다.

이런 사람에게 태선호텔을 맡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진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보다 강빈이는 왜 나를 보고 싶어 했어?”

“제가 이번에 태선호텔의 경영을 맡았거든요.”

“뭐? 서정순 사장님은 어디 가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집안 사정이었기 때문에 말하기가 꺼려졌다.

둘러서 말할 만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준만이 대신 답했다.

“누나는 쉬고 싶다고 일 그만두고 지방 내려갔습니다. 뭐, 형님도 그랬잖아요?”

“하긴… 스트레스가 많은 위치긴 하지.”

내가 말했다.

“이런 말은 외람되지만, 외종숙님이 왜 일을 그만두신 건지 여쭤도 됩니까?”

“질문이 잘못됐는데? 나는 그만둔 게 아니라 쉬고 있는 거야. 음… 쉬고 있는 이유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예? 무슨 개인적인 일이라도…”

질문을 이어가려는데 준만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곁눈질로 준만을 바라보자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저쪽도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게 있나 보다.

그보다 진석의 입에서 일을 그만두진 않았다는 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선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혹시 로스와 계약된 상태인 겁니까?”

“로스와의 계약은 끝났어. 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고. 내 방식과 기업주가 맞지 않아서 많이 부딪혔거든.”

진석은 전 기업과의 마찰을 스스럼없이 말했다.

단지 내가 먼 친척이기 때문에 편해서?

아니면.

“태선호텔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진석의 눈에 아주 잠깐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다시 마주친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로스를 경영할 때, 네 투자 방식에 대해서는 숱하게 들어왔다. 의결권 양도부터 시작해, 방치에 가까운 이질적인 투자. 하지만 그 투자가 늘 성공해왔다고 들었어.”

방치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뜨끔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갖고 있는 모든 자산을 투자로 돌리면서도,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이유는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석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야 뻔했다.

그가 로스와의 재계약을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

“맞습니다. 저는 제가 투자한 곳에 대한 신뢰가 두텁거든요. 애초에 실패할 곳이라면 투자를 하지 않으니까요.”

“사람에 대한 투자도 마찬가지겠지?”

“늘 기업에 투자해왔지 사람에 투자를 해본 적은 없습니다. 아, 한 사람이 있긴 하네요.”

에릭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전생의 기억으로 유일하게 내 사람으로 만든 인물.

에릭이 없었다면, 에릭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빠르게 궤도에 오르진 못했을 것이다.

진석이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며 말했다.

“결과는 어땠어. 그것도 성공이었어?”

“제 입으로 말하기엔 뭐 하지만 꽤 크게 수익을 본 사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업보다 그 사람을 얻은 게 가장 큰 성공이라고 자신할 수 있죠.”

“그만큼 좋은 사람인가 보지?”

진석의 말에 살짝 웃음을 흘리고 말을 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수익적으로 제게 큰 도움이 된 사람이거든요.”

“신뢰할 수 있는 데다가 수익까지 주는 사람이라. 그만한 사람이 없지.”

진석이 입술을 살짝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말을 이었다.

“아까 태선호텔은 어떻냐고 물었지? 그 말의 의도는 나에게 경영을 맡겨보고 싶다는 거냐?”

“대답에 따라 결정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고민 중이거든요.”

“허!”

진석이 진심으로 놀란 듯 숙였던 몸을 뒤로 젖히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내 말은 떠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는 내 전생에서 기억하지 않았던 인물.

과연 내가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당연했다.

준만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진석은 헛웃음을 짓고는 이내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당황스럽구나. 그러니까 이 자리가 내 입사 면접이라는 거지?”

“면접이란 말은 무거우니, 면담이라고 할까요.”

“허허. 강빈아. 지금도 내 이메일을 보면 수십 통의 제안서가 쌓여있어. 면접? 내가 그런 과정을 거칠 만한 사람으로 보였나?”

아무리 세상과 담을 쌓았다 한들, 일면도 없는 먼 친척이 갑작스레 보자 했는데 그가 이유를 찾아보지 않았을까?

내가 태선호텔의 경영을 맡았다는 것은 어제자 경제신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일주일 전에는 ‘태선가 막내 손자의 반란’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까지 되었고.

물론 진석의 능력이라면, 그의 말대로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모셔가려고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그런 진석이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혈연지간이라는 이유보다도 나의 투자 방식 때문일 것이다.

방치에 가까운, 좋게 말하면 투자처를 완전히 신뢰하는.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요? 저는 경력이 있으신 만큼 사안을 정확하게 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외종숙님. 태선호텔이 로스와 정상을 두고 다툰다 해서 비슷한 회사가 아닙니다. 태선호텔을 경영한다는 건 산하 계열사들까지 관리한다는 걸 뜻하죠. 위치도, 무게도 완전히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

진석이 침을 삼켰는지 목젖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맡기려는 태선호텔의 경영 자리를 단순한 호텔 경영자와 동급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덤으로 나는 경영에 관심을 끄니, 자신이 꿈꿨던 이상향으로 호텔을 경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의 능력을 내가 완전히 알고 있다면 그대로 경영 자리를 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진석의 영입은 이전과는 다르다.

전생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이번 생의 나의 판단에 걸린 일이다.

진석이 내가 세운 기준에 미달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할 것이다.

“저는 그런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고 있는 겁니다. 외종숙님이 호텔경영에 뛰어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뵙자고 했던 겁니다. ”

진석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했다.

그가 나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진석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내 제안을 거절하려나 보다, 생각하는 찰나 진석이 목을 굽혔다가 피고는 말했다.

“다시 인사드리죠. 고진석입니다. 서강빈 부회장님.”

“혀, 형님?”

아까와는 완전히 태도를 뒤집은 그에게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준만도 이 상황이 낯설었는지 눈을 깜빡이며 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웃음을 지어 보인 진석이 이어서 말했다.

“제 포트폴리오야, 아실 거라 생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대신, 하고 싶은 얘기를 한번 해보죠. 다른 곳에선 몰라도 호텔 업계에선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곧. 상품이다. 그게 경영자한테 적용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이 상황과 빗겨나가지는 않는 것 같네요. 보통 새로운 지역에 호텔을 개관하려 할 때 유능한 CEO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해보세요.”

진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 지역의 유능하고 경험 있는 사람을 확보하는 겁니다. 호텔이 지어지기도 전에 갖추어야 할 게 바로 사람인 거죠. 제가 미국에서 배워온 지식으로 마켓 셰어 확보를 비롯해 여러 마케팅 수단을 쓰긴 했지만, 그건 기반이 갖춰졌을 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선호텔은 이미 기반이 갖춰져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살짝 휜 눈꼬리는 장난기가 있는 듯 보이면서도 진중해 보였다.

히피펌 머리 위에 꽂힌 선글라스에서 태선호텔이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2년 전, 호텔 로스에게 업계 1위 자리를 되찾은 뒤 단 한 번도 내주지 않은 업계 1위의 태선호텔.

그 태선호텔에 과연 누가 기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욕심이 엿보이는 언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의도는 알고 있었지만 진석이 직접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물었다.

“말씀하시죠.”

진석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분점 5개에 불과한 태선호텔이 업계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호텔의 퀄리티와 가격 때문일 겁니다. 해외의 정상급 인사들이 올 때 머무를 정도니까요. 적어도 당분간은 한국에서 따라올 곳이 없겠죠.”

“서정순 전 사장의 전략이었죠.”

“맞습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먹히고 있고, 저도 옳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제 더 나아가자는 겁니다.”

“해외 진출을 말하는 겁니까?”

진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것도 언젠가 해야 할 과제겠죠. 하지만 저는 아직 한국에서 더 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선호텔의 브랜드를 이은 비즈니스 호텔을 전국에 개관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겠죠. 아, 제가 말하는 비즈니스 호텔은…”

“알고 있습니다. 4성, 3성급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지금은 서구권에서 주로 쓰이는 비즈니스 호텔은, 주로 기업의 경영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넓은 회의실이나 피트니스 클럽 같은 대형 호텔을 말한다.

한국에는 아직 비즈니스 호텔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 정의되지 않았지만 진석이 말하려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진석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태선호텔은 고급화로, 비즈니스 호텔은 편의성으로 차별화를 둘 겁니다. 아, 제가 너무 들떴네요. 이 생각은 예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로스의 이사진들은 3성급 호텔을 여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럼 이번에 만들어 보시죠.”

“네? 그 말은….”

평소에는 장난기 많고 맹해 보이다가도 사업 얘기만 시작하면 금세 진지해져서 제 능력을 뽐내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에 대해 진석 말고도 또 한 명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도 미국에서 능력을 발휘해 나에게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고.

진석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즈니스모델을 탐구하고 실행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내가 원하는 인재상이기도 했다.

그라면 태선호텔을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