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44화 (144/249)

#144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준만이 말했다.

“벌써 가는 거냐?”

“예. 가야죠. 호텔 일 때문에 요새 정신없이 바쁩니다.”

“아직 취임도 안 했는데 바쁠 게 뭐가 있어?”

“지금이 제일 바쁠 때예요. 제 시간을 늘리기 위해 사람을 구하고 있거든요.”

“사람?”

“태선호텔은 전문경영인을 쓸 예정입니다. 저는 비즈니스모델을 설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만 정할 거거든요.”

“뭐?”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전문경영인 붐이 불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재벌그룹은 족벌경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태선호텔은 태선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기업규모가 큰 곳은 없다시피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나는 경영에 쓸 시간도 없을 뿐더러, 비즈니스모델 외에 호텔경영에 관해서는 초짜나 다름없었다.

투자회사 경영은 말 그대로 개인투자를 위한 소규모 회사였기 때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고, GB택배를 다년간 경영해오긴 했지만 경영에 오랜 시간을 쏟지는 않았다.

게다가 호텔경영은 호텔경영학과가 따로 있을 정도로 일반적인 경영과는 차이가 있었다.

커피를 홀짝이는 나를 보며 준만이 말을 이었다.

“맡길 사람은 찾고 말하는 거냐? 대체 누구길래 태선호텔을 맡길 생각을 하냐. 너도 참 대단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도 궁금하네.”

“아직 안 구했습니다.”

“뭐? 누군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쓰겠다고 결정한 거냐?”

준만이 목을 뒤로 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직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황실장과 수하의 비서진 일동은 물론 GB인베스트먼트까지 동원해 국내와 해외의 호텔경영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찾았지만 영 성에 차는 인물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인물들이 몇 있었지만, 정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증권사 대표 시절에도 호텔경영인에 대해서는 알 겨를이 없었으니, 그저 교양으로 알아둔 호텔의 전설적인 인물, 스타틀러가 호텔경영인과 관련된 유일한 기억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를 살았던 스타틀러는 호텔경영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경영방식이 지금까지도 적용되고 있을 정도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역대 최고의 호텔맨으로 칭송받는 그는 호텔이 다른 일반분야와 다른 특성에 대해 꼬집었다.

그중 인상이 깊었던 세 가지만 꼽자면 첫째는 인적서비스의 의존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시설이 좋다고 한들, 직원들의 서비스가 부족하다면 그 호텔은 호텔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성급이 올라갈수록 직원들의 연봉이 크게 차이 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친절함은 당연히 장착되어야 하는 것이고 다개국어와 근방의 관광지에 대한 지식, 다양한 교양까지 갖춰야 한다.

두 번째는 초기투자에 대해 과다한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세 번째와 이어지기도 하는데, 세 번째는 투자 회수 기간의 장기화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넉넉한 자본 없이 시작한 호텔들이 부도를 겪는 일은 셀 수도 없이 허다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넘쳐나는 내 자본으로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외에도 스타틀러는 호텔 안에 볼링장을 개발하거나, 고급 은쟁반에 음식을 내는 듯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데 있어 천재적인 인물이다.

이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호텔경영의 아주아주 기초적인 지식이다.

전문경영인을 뽑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스타틀러가 나처럼 다시 태어났을 확률은 없으니, 전생의 기억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준만이 한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호텔경영에 일가견이 있는 한 사람을 알긴 아는데….”

“괜찮은 사람이면 소개해 주세요.”

준만도 재벌가의 한 사람.

호텔 전문경영인을 안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진태를 찾아갈까도 생각해봤지만, 태선호텔은 내가 진태에게 받은 첫 번째 기업이나 다름없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 지금은 내 능력만으로 잘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일 때이다.

“너랑도 친인척 관계다.”

“예? 제 친인척 중 호텔경영자가 정순 고모 말고 또 있었어요?”

“흐흐. 태선가와는 상관없어. 네 엄마 쪽이거든.”

영혜는 대기업이라고 하기엔 살짝 못 미치는 중견기업의 셋째 딸로, 준만과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영혜 집안의 기업이 진행하던 재개발단지 때문이라던가.

당시, 영혜의 집안에서 진행하고 있던 재개발단지 사업에 진태가 눈독을 들이자, 영혜 집안은 태선가에 발을 걸치기 위해 영혜를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재개발단지를 이전해주었다.

정략결혼이라 해서 억지로 서로 붙여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지금도 준만과 영혜는 깨가 쏟아질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물론 나 역시, 자본금이 부족했을 때, 영혜의 집안에 대해 관련조사를 안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혜의 집안은 애초에 내 기억 속에 없었고, 실제로도 득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해 일찌감치 관심을 끊은 상태였다.

태선에는 미치지 못하는 집안이지만, 꽤 유수한 집안이니 걸출한 인물이 있다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만.

몇 년도 전에 보았던 영혜 집안의 리스트를 떠올리려 애썼다.

누굴까.

“어머니와는 관계가 어떻게 되는데요?”

“네 엄마의 사촌오빠다. 너한테는 외종숙이려나.”

“이름은요?”

“고진석, 진석이 형님. 너도 들어 본 기억은 있을 거다.”

고진석?

고진석이라…. 알게 모르게 들어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잘 안나네요. 제가 어릴 때라도 뵌 적이 있을까요?”

이 몸의 어릴 때 봤더라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일면식이 있냐, 없냐에 따라 스탠스를 바꿔야 한다.

“음…. 내 기억상으론 없다. 그리고 호텔에 관심이 없으면 모를 만도 해. 어떤 분이냐면… 호텔 로스 알지? 몇 년 전까지 태선호텔 꺾고 업계 1위 하던 호텔. 거기 경영자 출신이야. 지금은 은퇴했다고 들었고. 로스가 내리막길 걷게 된 게 진석이 형님이 은퇴하고부터라는 소리가 있어.”

호텔 로스라면 불과 2년 전까지 태선호텔과 1위 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경쟁하던 곳이었다.

서강빈으로 다시 태어났던 1993년도에 정순에 대해 조사하며 알게 된 호텔이기도 했고.

아무리 유능한 인물이라 해도, 지금은 은퇴한 상태이기 때문에, 황실장이 조사를 할 때 배제를 했을 것이다.

“은퇴했으면… 복귀는 힘들겠죠?”

“네가 나선다면 모르지. 네가 사람 구워삶는 데는 또 특출나잖냐.”

“그럼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 연락 좀 부탁드려요.”

“그래. 지금은 일을 쉬고 있으니 시간은 많을 게다.”

“그래요? 그럼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지금 연락해주실래요?”

“지금? 허허. 급하기도 하네. 알았다 기다려봐.”

준만이 곧장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정적 이후 진석이 전화를 받았다.

“형님! 저 준만입니다. 네. 하하. 영혜는 잘 있죠. …네. 연락드리라고 할게요. 아, 다름이 아니라 제 자식이 형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해서요… 예… 예. 네. 강빈이 맞습니다. 서강빈. 하하. 요즘 워낙에 유명하긴 하죠… 예. 아, 그러세요? 그럼 그때 보는 걸로 하죠. …예. 잘 쉬다 오세요.”

준만이 전화를 끊고는 말했다.

“안 된단다.”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 알아보면 되니까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아니. 지금 베니스에 있다는데? 열심히 노 젓고 있으시대. 한국 돌아오면 연락 주기로 했으니까 그때 보는 걸로 하자.”

“알겠습니다.”

진석과 미팅해서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영입할 생각은 있지만 내가 먼저 매달릴 생각은 없다.

준만과 대화를 마치고 옆에 있는 내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직함이 옮겨졌지만, 상관은 그대로 준만이었으니 집무실은 이름만 부사장실에서 사장실로 바뀔 뿐, 장소가 바뀌지는 않았다.

황실장은 내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고생하네. 일은 할 만해?”

“하하… 네. 어깨만 무겁지 업무량은 본부장 대행 때보다 적습니다.”

준만과 나만 알고 있는 비밀.

부사장 자리에 오르고 나서 물산에서의 내 업무를 대부분 소화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황실장이었다.

나는 컨펌을 할 뿐, 실질적인 검토와 지시는 내 이름을 빌린 황실장이 처리하고 있다.

그만큼 황실장에 대한 신뢰가 있기도 하고, 그녀의 능력이 출중한 까닭도 있고.

“호텔 전문경영인 중 고진석이라고 알아?”

“네. 저도 조사 중에 안 사실인데, 한국 호텔관계자 중에 고진석 전 대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한국 안에서 처음으로 호텔 로스를 경영할 당시 소공동 본점 개관 이후에 지점을 늘리며 브랜드 가치를 높이게 한 주요 인사입니다. 한국 내에선 현재까지도 외부인이 CEO를 맡은 경우는 고진석 전 대표가 유일합니다.”

“그럼에도 명단에 안 올린 이유는 은퇴했기 때문이지?”

“네. 로스에 문의해 알아낸 이메일로 메일은 보낸 상황입니다. 연락 오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냐. 미팅 일정 잡았어.”

황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

보통 전문경영인이 소유주의 눈치를 보는 반면, 진석의 경우 기업의 소유주가 오히려 눈치를 본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확실하게 기업을 성장시켰다.

진석은 미국 내에서 호텔경영학과 부동의 1위를 몇 년째 이어오고 있는 코넬 대학교에서 IVY 리그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 이후 경력을 쌓은 뒤, 미국에서 5성급 호텔을 가장 많이 보유했다고 알려진 체인 호텔,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의 시애틀 지점의 CEO로 지냈고,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맡았던 기업이 바로 호텔 로스.

태선호텔을 넘기기는커녕 늘 다섯 손가락 안에 턱걸이에 들던 로스를 한국 정상에 앉혀 놓았다.

진석이 은퇴한 지금, 로스는 2위에 머물고 있지만 그의 경영방침은 아직도 로스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진석을 만나기로 한 날은 준만이 통화를 한 뒤 딱 일주일만이었다.

장소는 카페, 루데.

1층에 통유리로 된 창밖으로 태선 호텔의 전경이 보였다.

집무실 대신 이곳을 택한 이유는, 한눈에 태선 호텔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준만은 진석을 기다리며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외종숙은 어떤 분이세요?”

“음….”

준만이 내 말을 듣고 시선을 허공으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황실장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철저한 수익계산을 토대로 과감한 투자에 주저하지 않는 인물.

호텔 CEO의 경우 편협한 사고를 지양하고 시장 변동성에 대해 숙지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해보일 수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 내에서 고용된 CEO가 이런 성향을 내비치기는 쉽지 않다.

준만은 이내 생각을 마친 듯 말했다.

“유쾌한 사람이지. 그리고 매사 장난처럼 일하는 걸로 보이더라. 자기가 직접 일에 대해 진지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고.”

“장난이요?”

“물론 보기에만 그렇겠지. 여유롭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라고 해야 하나? 형님이 해낸 일들을 장난으로 보기에는 과해.”

준만의 말대로 진석의 해낸 일들은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과했다.

자본이 본점만 운영하기 빠듯했던 로스가 10개가 넘는 분점을 개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진석이 외국계 투자를 받아냈기 때문.

진석은 마켓 셰어(Market Share), 다른 말로 시장점유율에 대한 이해도가 몇 년은 앞서 있었다.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전부터 로스는 진석의 지휘에 따라 인수 합병을 공격적으로 진행했고, 이 빠른 확장은 한국 호텔 시장의 트렌드에 먹혔다.

서울의 어떤 지역구를 가더라도 로스의 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는 인지도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일찍 은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전생에서 내가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분인지 빨리 보고 싶네요.”

“직접 봐라. 저기 오시네.”

준만이 루데의 입구를 보고 있었고,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큰 두상과 그와 이질적으로 보이는 짧은 히피펌.

진석이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올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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