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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43화 (143/249)

#143화

“부회장님.”

“아이고, 서 사장 아니신가.”

준만이 넉살 좋게 나를 반겼다.

취임식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준만은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나는 바로 밑의 사장 자리에 올랐고.

이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내 모든 일과를 물산에만 초점에 맞출 수도 없다.

태선호텔은 아직 임시 대표가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한 달 안에는 취임식을 거치고 부회장 자리에 앉아야 했으니까 준비할 것이 많았다.

때문에 준만을 보는 것도 새해조찬 이후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자, 준만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취임식은 언제 할 예정이세요?”

“음… 사장이나, 부회장이나 사실 하는 일은 똑같아서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다.”

“하하. 아버지 의견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래도 보여주기는 해야죠.”

“그래야지. 흐흐. 다른 형들한테 눈 돌리는 놈들도 있을 테니 확실히 보여줘야지. 내가 너희들의 왕이라고.”

“아버지가 그런 생각도 하세요?”

준만의 말은 의외였다.

이제 경영과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파벌 싸움까지 대비할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준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큰아버지가 물산을 좀 오래 했냐. 변방에서 온 나를 반기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거다. 돈을 쓰든, 권위를 보이든 확실히 할 필요가 있어. 게다가 부회장이라는 멍석도 깔렸으니 지금이 적기지.”

“아버지. 지금 누가 봐도 부회장 같으세요.”

“야, 인마. 그럼 내가 부회장이지, 회장이냐?”

“그 말이 아닌데. 하하.”

예전 같았으면 둘만 남았을 때의 어색함을 이기지 못했을 텐데, 이제는 농담도 던지고 제법 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둘이서 보는 건 처음이구나.”

“이제야 1월이니까요. 제가 태선호텔 가더라도 물산 사장도 겸임하고 있으니 볼 일은 많을 겁니다.”

“하하. 그건 그래. 네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바쁜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마카오 타워 준공식도 올해네요.”

“그래. 시간이 참 빠르구나. 같이 보러 갈 거지?”

“그때 일정을 봐야 알겠지만 되도록 가려고요.”

허례가 아니었다.

물론 마카오 타워의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때쯤이면 중국에서 투자했던 3대 IT기업이 어느 정도 과실을 맺고 있을 때.

격려를 하든, 추가 투자를 하든 신경을 써야 될 때기 때문이다.

GB인베스트먼트에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투자 주체자인 내가 직접 가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마카오 타워의 이야기가 나오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참. 월드컵경기장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준만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서울을 말하는 거냐, 아니면 사이타마를 말하는 거냐? 우리 태선건설이 무려 두 개나 시공하고 있잖냐.”

과장되게 말하는 준만의 말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둘 다죠.”

“서울은 이미 준공식 날짜까지 잡혔어.”

“벌써요?”

“부도난 기반건설이 거의 다 짓고 넘긴 거니까. 그리고 사이타마는… 쉽지 않다. 이미 지진이 났던 곳이라 내진 설계부터 다잡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

“예상했던 시공비보다 더 나왔나요? 그건 제가…”

준만이 장난스럽게 내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만. 이미 네가 부담한 거나 다름없다. 서회장님이 태선호텔 계열사 뺀 걸로 시공비 충당한 거 벌써 잊었냐?”

“....”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태선호텔을 넘겨받기 전에 정순이 대책 없이 냈던 계열사들을 진태가 다른 기업에 넘긴 돈으로 시공비를 충당했다는 것을….

그때는 내 돈이 굳었다고 좋아했었는데, 지금 보니 내 피 같은 계열사들이 갈려 나간 것이었다.

준만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어설픈 연기톤을 내며 말했다.

“그보다 바쁘신 서 사장님께서 여긴 어인 일이오?”

사담은 여기까지.

본론을 꺼낼 때가 되긴 했다.

“이제 이동통신 사업권에 대해서 얘기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한참 전에 계획했던 대로 가야죠.”

“그래. 한참도 더 되었지.”

준만이 허공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마카오 타워 메인 시공을 맡으며 받게 된 이동통신사업권.

준만은 그 사업권을 받고 나서 내가 계획한 일인 줄 알겠지만, 나는 마카오에 가기도 전부터 세웠던 계획이었다.

준만이 말을 이었다.

“문제는 받아올 대가인데… 생각해 둔 게 있어?”

“초안은 많죠.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 있느냐인데…. 일단 들어 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준만을 보며 말했다.

“이 사업권의 예상되는 수익을 정해놓고, 그 수익을 넘긴다면 그것에 대한 프리미엄으로 지분을 받자, 이게 처음 들었던 생각입니다.”

“예상 수익을 넘지 못한다면?”

“프리미엄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거죠. 저쪽이야 아직까진 이동통신사업권이 얼마나 이득을 불러올지 모르니 예상 수익을 높게 잡으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가 예상 수익을 3조 원이라고 설정한다면 백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까?”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겠지. 한낱 이동통신이, 그것도 자국 시장을 밀어주기 시작한 중국에서 그 수익은 예상하기 힘드니까.”

준만의 말처럼 예상 수익을 만약 3조 원이라고 잡는다면, 재만 측에서는 코웃음을 치며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업에 태선의 반도체 기술로 협업한 뒤 수수료를 챙기는 비즈니스모델을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 뒤에 들어올 수익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한도를 정해놓긴 하겠지만 프리미엄으로 자사주, 또는 재만의 지분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계획이었습니다.”

“어제까지?”

“예. 제가 태선반도체와 켈러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더군요.”

“왜, 생각보다 별로더냐?”

“아뇨. 그 반대입니다.”

“그럼 뛰어나다는 소리야? 그럼 뭐가 문제냐. 중국에서 노 젓듯이 순항하면 우리한테 좋은 일인데.”

설명해줘 봐야 반도체에 관해서는 배경지식이 없는 준만이기에 설명은 생략했다.

어제 태선반도체에서 마주쳤던 재만을 떠올리며 답답한 마음을 감추고 말을 이었다.

“그 사실을 백부님도 이제 안다는 겁니다. 태선반도체가 지금 시기에 말도 안 되는 기술을 개발해냈더군요.“

“그 말은… 재만이 형도 크게 수익이 날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맞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수익이 예측 불가능성을 띠게 되었다는 거죠. 백부님이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도박에 배팅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 제 밥그릇은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터무니없는 조건이 아니라 정말 일어날지도 모르는 조건이라면 받아들이지 않겠지.”

준만에게 가져온 서류철을 내밀며 말했다.

“차후를 대비해서 짜놓았던 계획입니다. 뭐, 어제 대부분 수정한 거긴 하지만요. 우선 읽어보시죠.”

초안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성을 고려해 몇 가지 차후책을 마련해 놓긴 했다.

켈러의 원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기술 개발을 성공해낸 것은 변수였지만, 감당가능한 정도였다.

물론 내 루틴까지 깨 가며 밤을 지새워야 했지만.

지금 20대의 몸이 아니라 전생의 50대 몸이었다면 지금 고개가 고부라져 쓰러졌을 것이다.

준만이 서류철을 받고 안에 들어있던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서류는 사업권을 태선전자에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임대를 내고, 수익 지분을 가져오자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다 읽은 서류를 덮은 준만이 말했다.

“그러니까 너 말은 전자와 물산이 같은 배에 타자는 거지?”

“같이 가는 것은 맞지만, 수익이 커진다면 태선전자의 지분으로 받아올 수도 있습니다. 10년짜리 계약이니까요.”

“수익의 일부를 나눠 갖자는 거 아니냐? 태선전자의 지분은 무슨 상관이야?”

“이동통신사업권은 태선전자의 연 매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큰 사업이 될 겁니다. 수익구조의 상당 부분을 한 곳에 의존하게 될 시의 문제점을 아십니까?”

준만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전자가 물산의 사업권에 의존한다면… 대가로 받아낼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겠군.”

“예. 사업권이 불러온 당장의 이득으로 전자는 몸집을 부풀릴 겁니다. 이제 기존 수익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게 되겠죠.”

“사업권을 한 번에 계약하지 말고 차근차근 길들이자는 거지?”

한 번에 이해하는 준만을 보며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저희가 중국과 이동통신사업권을 10년 계약했다고 해서 태선전자에게 10년짜리 계약을 내줄 필요는 없습니다. 태선전자도 처음엔 간을 보기 위해 단기계약을 원하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이동통신사업권의 수익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거고, 저희가 가진 10년짜리 계약을 원하게 될 겁니다. 저희가 우위를 갖게 되는 순간이 바로 그때죠.”

이동통신사업권이 태선전자에 큰 수익을 불러준다면 태선전자는 그에 발맞추어 경영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아닌 기업이기 때문에 수익을 가만 놀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제조 공장을 증설하던지,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던지 늘어난 수익만큼 지출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전자에게 이동통신사업권은 없어서는 안 될 수익 매개가 된다.

지금 당장은 지분과의 교환을 거부하지만, 이동통신사업권에 수익의존을 하기 시작한다면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이것은 10년짜리 사업권이지만, 동시에 태선 전자를 10년간 묶어놓을 족쇄가 되기도 한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태선전자가 이 이동통신사업권의 계약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태선전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지.”

재만이 내가 말한 모든 조건에 대해 염려한다 한들,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재만의 위에 있는 사람, 진태 때문이다.

직급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태선의 모든 회사의 최고결정권자는 진태다.

“조건 설정에 대해선 서류에 적어놓았으니 참고해주세요.”

준만도 이 서류가 불러올 가치에 대해서 아는지, 조심스럽게 서류를 건네받았다.

서류에는 내가 세운 10년짜리 계획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켈러가 예기치 못한 성과를 세우며, 어제 초안이 엎어지고 밤을 지새워서 만든 계획이었지만 오히려 초안보다도 내 목적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실행할 사람은 안타깝게도 내가 아니었다.

이동통신사업권의 보유자는 내가 아니라 태선물산의 부회장인 준만이다.

이제는 제법 듬직해진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합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라. 네가 이렇게까지 세운 계획을 망칠 일은 없을 거야.”

준만이 입술에 웃음기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높게만 보였던 태선전자를 차지할 한 걸음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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