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켈러가 상용화에 성공할 것 같다고 말한 것은 256메가바이트급으로, SSD라고 부르기 민망한 것이었다.
차라리 용량이 많은 플래시 메모리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존 시기보다 몇 년을 앞당긴 놀라운 성과인 것은 확실했다.
들뜬 아이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켈러의 어깨를 두드렸다.
“켈러 씨. 정말 말도 안 되는 성과를 해냈네요.”
“협업 덕분입니다. 태선이 기존 개발 중에 있던 플래시 메모리가 제가 초안만 짜두었던 미니멀 SSD와 적합하더군요. 게다가 서대표님의 지원까지…. 모든 게 너무 잘 맞물렸습니다.”
“켈러 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켈러는 자신이 이름 붙인 미니멀 SSD의 상용화가 빠르면 내년 초에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존에 256메가바이트급의 SSD가 개발된 것이 2004년 초쯤이니 2년을 앞당긴 것이다.
플래시 메모리 개발부터 시작해 SSD까지 단 한 명의 영향이 반도체 역사를 바꿔버렸다.
진태를 보며 배웠던 것이 있다.
성과에 대한 대가는 확실하게 할 것.
“켈러 씨. 원하는 게 있습니까?”
“예?”
켈러가 얼떨결에 답했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그 모습에 순수한 연구 목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입성했다는 켈러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지어졌다.
“터무니없는 일을 해냈잖아요. 뭐든 좋습니다. 임금인상이나, 프리미엄, 하다못해 물질적인 거라도요.”
“음….”
켈러는 그제서야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한 대가를 생각하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이어진 그의 대답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 달랐다.
“계약 내용을 바꿔도 되겠습니까?”
켈러의 말에 나는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켈러는 한 기업을 최정상의 올려놓고 다른 기업으로 떠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이번에 태선반도체에서 이룬 성과로, 태선반도체는 세계 시장에서도 높게 도약할 것이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이치가 아닐지, 불현듯 불안감이 피어났다.
“설마 다른 곳으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하하. 강빈 씨.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태선반도체에 더 머무르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켈러의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고 말했다.
“태선반도체에서 더 이룰 수 있는 것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예. 이번 기술개발은 제가 향후 3년을 바라보며 계획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선반도체에서는 그 한계를 깨부수어주더군요. 제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이곳에서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태선반도체와 켈러의 시너지가 이렇게까지 날 줄은, 미래를 알고 있는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앞당긴 미래의 기술에 들뜬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켈러와 태선반도체의 계약기간은 총 2년으로 1년이 조금 넘게 남아 있는 상황이다.
만약 그를 태선반도체에 더 머무르게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조건을 맞춰줄 생각이었다.
“원하시는 계약조건이 있습니까?”
연봉 얘기에는 켈러도 어쩔 수 없는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2년 더 연장계약을 하고 연봉은 50프로 인상을 원합니다. 제 팀원들도 같은 조건이면 좋겠네요.”
“200프로 인상하겠습니다. 대신 계약은 4년으로 하시죠.”
“예?”
현재 켈러의 임금은 달러로 지급되고 있으며 연봉은 1200만 달러, 한화 약 130억 원이다.
이도 켈러의 이전 직장에서 받던 연봉의 10배이지만, 나는 거기서 200프로를 더 불렀다.
이미 그가 개발해낸 것만으로 불러올 이득만 그의 수십 배는 될 테니까.
게다가 미니멀 SSD의 상용화까지 마친다면 그 이득은 얼마나 될지.
“켈러 씨의 팀원들도 같은 조건입니다. 딜?”
켈러가 잇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딜.”
***
태선전자의 자회사인 태선전자서비스.
겉으로 보기에는 흔한 가전제품 수리업체 같지만, 실상은 소속 계열사만 열 곳을 넘게 보유하고 있었다.
보일러, 해양, 전자부품 제조, 합금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발을 뻗고 있는 회사였다.
모든 계열사의 기업가치를 합쳐도 태선전자에는 못 미치지만, 한 축을 담당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런 태선전자서비스를 받았지만, 범준의 표정은 영 신통치 않았다.
“회장님은 뭐가 마음에 안 드셨던 걸까요.”
재만은 눈을 흘기다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식품보다는 훨씬 낫지. 안 그래?”
“예… 그건 맞지만 강빈이가 받은 것과 비교하면.”
“그만해라. 지금은 네 성과에 대해 만족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건 그 이후다. 받은 것도 정리 못 하면 그다음은 없어.”
“예. 아버지.”
아무리 장손이라지만 이미 태선식품을 받은 마당에 진태가 대뜸 전자서비스를 줬을 리 없다.
범준이 작년 태선 식품에서 보였던 활약이 있기 때문이다.
할랄 푸드 개발을 통한 무슬림 계통과 인도 쪽 시장 진출, 그리고 개발해낸 슈퍼 푸드는 미국 식품 시장에 파란을 불러올 정도였다.
매출과 기업가치는 배로 상승했고,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
재만은 이러한 성과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범준은 뜻하지 않은 재만의 따뜻한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늘 아버지의 인정만을 바라왔으니, 이토록 기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선 강빈의 얼굴이 불쑥 등장하긴 했으나 빠르게 지웠다.
재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와라. 너도 이제 전자 계열에 들어왔으니 시찰에 나서야지. 반도체로 가자.”
“예?”
범준은 태선반도체에서 강빈과 비교당하며 진태에게 질타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또 다시 찾아오는 서강빈이라는 벽.
그러나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죠.”
본래 태선반도체의 본사 건물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재만이 멈춘 곳은 본사 옆에 있는 하얀 건물이자 제2 반도체연구소였다.
이유는 건물에서 나오고 있는 멀대처럼 크고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의 한 남자 때문이다.
“멈추게.”
재만의 말에 차가 부드럽게 제동을 걸며 멈췄다.
기사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차에서 나온 재만이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는 백부님이야말로 여기는 웬일이십니까?”
“서강빈!”
그 남자, 강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영입한 켈러 씨가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기에 격려차 오는 길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재만이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네가 영입했다 해서 네 직원은 아니다. 여긴 엄연히 태선전자 산하의 기업이야. 외부인이 기업 최고 오너보다 이르게 보고를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저도 오늘 안 사실이고, 정식 보고도 아니었습니다. 위에만 앉아 계셔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알려 드리는데, 성과 보고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닙니다.”
“너…!”
강빈은 그대로 몸을 떨고 있는 재만을 지나치다가, 뒤돌아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왜 외부인입니까? 태선반도체의 대주주로서 관심을 갖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는구나. 네가 어디까지 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기어서 갈 것 같지는 않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워낙 바쁜 몸이라.”
워낙 바쁜 몸에 재만은 치가 떨리면서도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강빈은 현재 태선물산의 사장이지만, 곧 태선호텔의 부회장으로의 취임이 예정되어 있다.
강빈이 방금 말한 것의 속뜻은 제힘이 이 정도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
이제 태선호텔의 지분과 강빈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지분을 들고 흔들어댄다면 재만의 자리조차 위협할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미리 밟아둬야 했어… 미리.”
재만은 후회에 가득 찬 혼잣말을 내뱉으며 멀어져가는 강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뒤늦게 내린 범준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강빈과 재만의 대치를 지켜보다가 상황이 끝나자 천천히 다가갔다.
“아버지. 저 자식이 또 버릇없게 군 겁니까?”
“됐다. 가자.”
재만은 빠른 걸음으로 제2 반도체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노크도 하지 않은 채 켈러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켈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누구십니….”
“네 상사.”
재만이 짧게 영어로 말하고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가서 앉았다.
켈러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서재만 부회장님. 원래 이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으십니까?”
재만은 헛웃음을 하며 켈러를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계약을 한 주체가 강빈이지만 켈러의 제2 반도체연구소가 속한 태선반도체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재만이다.
어이없어 하는 재만을 두고 범준이 나섰다.
“당신 잘리고 싶어? 이 앞에 있는 사람을 누구로 아는 거야?”
켈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서대표님과 계약했을 때 조건 중 하나가 수직적인 구조로 인해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으로 오면서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하죠. 지금이 그 조건에 위배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재만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당신이 의무를 다하지 않은데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나?”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더군.”
“마침 보고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만.”
“상사보다 일찍 보고를 한 사람이 있던데.”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던 켈러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직급에 자유로운 직장에서 일해왔다지만, 보고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잘못은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켈러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가 실수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재만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켈러 씨가 누구와 계약했건 소속은 저희 태선반도체입니다. 그 사실은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켈러가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재만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계약했다던 기술 개발은 90나노미터급이겠죠?”
“맞습니다. 거기에 더해 SSD의 상용화도 바라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만이 벌떡 일어나 켈러를 눈을 크게 뜨고는 켈러를 바라봤다.
SSD라면 재만도 눈여겨보고 있던 사업이지만, 아직까지는 현실성이 없어 개발진들만 닦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재만이 바라봤을 때 아직까지 최소 수년은 내다봐야 할 기술인 것이다.
재만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그것도 서 사장한테 말했습니까?”
“...SSD에 관해서라면 말씀드렸습니다.”
재만은 이마를 짚었다.
만약 아직 강빈이 모르는 상태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기존 태선반도체 직원들의 공으로 돌리려던 참이었다.
몇 년을 앞선 기술을 강빈이 직접 영입해서 계약까지 한 미국인이 개발해냈다면,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갈지는 뻔했다.
강빈보다 먼저 이곳에 왔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