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성남에 위치한 마당이 딸린 이 층 건물은 정순의 별장이다.
도보로 5분을 내려가면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위치.
웃돈을 주면서까지 정순이 이 별장을 매입했던 이유는 저명한 무당에게 화를 피하기 위해서 이곳을 사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피하기는 무슨. 그 선무당 같은 게!”
정순은 마당에 놓인 선베드에 누워 혼잣말을 뇌까리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의 욕심이 제가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태 밑에서 일하며 채규 직속의 내부감사위원회는 정순이 했던 일, 하지 않은 일을 모두 뭉뚱그려서 부풀려 놓았다.
모든 지분을 토해내고 자회사들을 내놓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래도 일말의 시간은 있어서 빼돌린 돈이 100억 원이 조금 넘었다.
이후 순례에게 상속받을 지분까지 더한다면 평범한 직장인이 평생을 일해도 만지지 못할 돈이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태선호텔과 그에 딸린 자회사들의 지분을 합치면 1조 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게 정순이었으니까.
한국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던 재벌에서 순식간에 평범한 자산가가 된 것이다.
정순은 어떻게든 다시 일어날 방도를 찾기 위해 궁리 중이었다.
그러던 중 햇볕에 따가운 눈을 찌푸리고는 신경질을 내었다.
“야! 파라솔 안 갖고 오고 뭐해?”
“지금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정장을 입은 한 사내가 헐레벌떡 별장 뒤편으로 뛰어갔다.
그 사내의 정체는 정순의 전 수행 기사.
정순이 태선호텔에서 쫓겨나면서 직함은 잃었지만, 기업 간의 계약이 아니라 정순과의 개인 계약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묶여 있었다.
정순은 파라솔 그늘 아래서 시원한 오렌지에이드를 마시며 이대로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잠겼다.
햇볕에 몸을 그을리며 잠들려는 찰나, 정문이 벌컥 열리고 노한 표정의 남자가 나타났다.
“당신, 지금 이러고 있을 때야? 왜 말 안 했어!”
얼굴을 잔뜩 찌푸린 남자는 정순의 남편이자 현 인천지방법원의 부장판사인 최원기.
원기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정순에게 다가가 몸을 흔들며 말했다.
“태선호텔에서 쫓겨났다며. 내가 그걸 기사 보고 알아야 돼!”
정순이 출근을 안 한 지는 꽤 되었지만,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난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이다.
오늘 경진일보에 헤드라인으로 나온 기사에는 내부감사 결과 경영부적격으로 정순이 물러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회장인 진태와 원만한 대화 끝에 지분을 모두 양도하는 것으로 적혀 있는 기사에는 어찌나 기가 차던지.
정순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나도 열받아 죽겠으니까, 당신까지 그러지 마.”
“대체 무슨 일을 벌였길래 그 자리에서 쫓겨난 거야? 응?”
정순은 대답 대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세상 그 누가 아버지를 죽이려다 실패해서 쫓겨났다고 남편한테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속 터놓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자칫하면 이 사람까지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순은 가만 입을 다물었다.
원기는 정순이 앉아 있던 선베드에 걸터앉고는 말했다.
“같이 이사 자리에서 쫓겨난 수애랑 수경이한테 물어볼까? 우리 가족 싸그리 태선가에서 쫓겨난 거잖아. 내가 그것도 몰라야 돼?”
“근데 당신 지금 법원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오늘 재판 있다며.”
“왜 말 돌려? 연차 냈다, 왜. 처장님이 뭐라고 하신 줄 아냐?”
“맨날 썰어댄다던 그 양반? 뭐라고 했는데.”
“장인어른이랑 틀어지면 없던 일로 하겠대.”
원기는 내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부장판사로 발령이 예정된 상태였다.
13년 차에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달고 4년 만에 서울로 간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
그 모든 일의 바탕에는 태선가라는 연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기가 정순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 일어난 건지 말해. 일 잘못되면 뒷수습이라도 해야 될 거 아냐.”
“하….”
정순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원기를 올려다보고 말을 이었다.
“여보. 그냥 지금 자리에 만족하면 안 돼? 서울도 급하게 갈 필요 없잖아.”
원기가 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기사에서는 나도 모르는 우리 집안 사정을 까발리고 있질 않나, 위에서는 정해진 앞길을 막겠다 하질 않나. 나도 이유는 알아야 될 거 아니야.”
정순은 양손으로 머리를 쥐며 고민에 빠졌다.
정말 이 얘기를 해도 될지,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원기가 단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애나 수경이는 알고 있겠지. 애들한테 물어볼게.”
“여보!”
일어서려는 원기의 팔을 붙잡고 다시 앉혔다.
수경이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지만, 수애는 정순과 함께 진태를 해치려 했다.
딸에게 이 얘기를 듣게 할 바에 자신이 직접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할게.”
원기가 정순을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네 죄를 따지겠다는 판사의 얼굴을 하고서.
그리고 정순의 설명이 이어지자 얼굴에서 나타나는 감정들은 당혹, 걱정, 분노, 두려움.
“...해서 나오게 된 거야.”
정순의 얘기가 끝나자 원기의 입이 겨우 떨어지며 말이 나왔다.
“당신… 미쳤어? 어떻게…. 어떻게!”
원기가 정순의 몸을 흔들어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일을 꾸며! 응? 왜 그런 거야. 말이라도 해 봐! 수애는, 수애는 왜 끌어들인 거야?”
정순이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잘될 줄 알았어. 다 잘될 줄 알았다고! 그리고 내가 계획한 게 아니라 올케가 다 계획한 일이야. 나는 죄 없다고.”
원기는 싸늘하게 식은 눈초리로 정순을 보며 말했다.
“당신 직계존속 살해 교사의 경우 떨어지는 실형이 뭔지 알아?”
“내가 왜 살해야! 나는 그냥 걔 말만 들었…”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이야. 동만 형님댁보다 당신이 더 큰 죄라고! 알아들어? 회장님이 당신 고발이라도 하면 거기서 인생 끝이라고.”
정순이 몸을 덜덜 떨며 원기를 노려보았다.
이해받길 원한 건 아니지만 차라리 침묵해주기를 원했다.
정략결혼으로 만난 원기이지만, 수십 년 동안이나 한방을 써온 원기가 자신을 감싸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한숨을 내뱉은 원기가 경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가만있을 생각 없어.”
“뭐?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당신 원하는 대로 했으니까 이제는 내 말대로 해.”
“뭘 하려고….”
법조계를 배출한 집안과 진태의 권력에 힘입어 손쉽게 승승장구하던 원기였다.
동료 법관들이 제자리에서 열심히 뺑이 칠 때 혼자 최연소 타이틀을 갱신해가며 자리에 올랐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쌓아온 건데.”
원기는 도저히 서울 진출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
짐 켈러의 들뜬 목소리의 전화를 받고, 나는 곧장 태선반도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벌써 기술 개발이 끝난 건가.’
이제야 막 2001년이 시작된 참이었다.
전생에서 태선반도체가 ‘90나노미터급 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해낸 것은 2002년도 중반 즈음이다.
만약 개발을 완성시킨 것이 맞다면 켈러의 영입으로 그 기간을 1년이나 단축해낸 것이다.
비휘발성 반도체 저장장치인 플래시 메모리는 기존 25나노미터급으로 수명이 무척 짧았다.
90나노미터라면 그에 10배가 넘는 용량과 수명.
중국의 이동통신사업 건과도 직결되는 이 기술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태선반도체의 지주회사는 다름 아닌 재만이 경영자로 있는 태선전자다.
이곳에서 내가 대주주인 것이 아니꼽겠지만 나를 건들 수 없는 이유는 현 태선반도체를 이루는 데 주요 공헌을 한 QL반도체와의 인수 합병에서 내가 중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진태에게 증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이유도 컸지만.
자신이 속한 회사에 내가 떡하니 대주주를 차지하고 있으니 눈엣가시겠지만, 쫓아낼 방도도 없으니 답답할 터.
그 점을 이용해 켈러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태선반도체안의 내 영향력을 늘려야 한다.
내 직속 사람도 아닌 켈러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켈러와 켈러의 팀이 한국으로 영입되면서 지어진 건물은 화이트톤의 깔끔하고 단아한 건물이었다.
켈러의 팀은 여기서 대부분의 일과를 보내며, 협업의 경우 바로 옆에 있는 태선반도체의 본사에서 진행된다.
굳이 따로 지을 필요가 없음에도 이렇게 지어진 까닭은 나의 고집 때문이었다.
재만의 시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의도도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내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서강빈 부사장님. 켈러 소장님께 연락받았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한국에서 켈러가 부여받은 직위는 제2 연구소장.
기존 태선반도체의 체제에서 추가로 창설된 제2 반도체연구소의 총책임자를 맡았다.
내부에서 새로 유입된 미국 인력들에 대한 반발심도 낮추고, 켈러에게 특별한 직급을 부여받았다는 사명감도 줄 수 있는 일거양득이다.
1층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가는 동안 켈러의 팀원 몇몇이 나를 반겼다.
“대표님, 그간 잘 지내셨죠?”
“부사장님 덕분에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편했습니다.”
“그동안…”
연락을 미리 고지받았는지 1층은 카페 겸 쉴 수 있는 공간임에도 얼마 없는 켈러의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건물 자체의 크기가 넓진 않지만 편의 시설을 비롯해 소규모의 연구팀이 움직이기에는 최상의 공간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찾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해준 뒤에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그보다 대표님이니, 부사장이니 직원들마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
그들에게 투자할 때의 내 위치는 GB인베스트먼트의 대표였고, 지금은 태선물산의 부사장이었으니 그냥 저들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직속상관도 아니니 신경 쓸 것도 아니었지만.
켈러의 집무실이 있는 곳은 최상층인 7층.
직원의 안내를 받고 들어가자마자 켈러가 벌떡 일어나며 나를 반겼다.
“서대표님! 개발해낸 기술로 SSD 상용화에 성공할 것 같습니다!”
“예?”
본론부터 꺼낸 건 둘째치고 SSD의 상용화라니?
90나노미터급 플래시 메모리 개발과 SSD의 상용화는 그 궤가 달랐다.
SSD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여러 플래시 메모리에 나눠서 읽고 쓰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하드디스크처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메모리 속도에 곱하기를 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속도가 확연하게 빨라진다.
지금도 SSD는 존재하지만, 슈퍼컴퓨터나 우주과학 분야에 관련된 사업에 한정되어 있어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켈러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계 반도체산업은 물론, IT산업 전체에 어떤 바람을 불어올지 예상조차 힘든 일이다.
신이 난 얼굴로 내 몸을 격하게 흔들어대는 켈러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그게 사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