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준만과 대화하는 사이 음식들이 나오고 있었다.
늘 저택에서 먹던 대로 코스요리였으며, 애피타이저는 토마토소스 베이스의 관자 요리였다.
최근 요리사를 추가로 영입했다더니, 플레이팅에 더 신경을 쓴 것이 보였다.
영혜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식사 맛있게 하세요.”
진태가 그에 답했다.
“너도 맛있게 먹거라.”
“네. 아버님.”
이전 같았으면 영혜는 이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그저 편승해서 대답이나 했을 것이다.
준만이 태선 물산을 물려받고 이제는 재만조차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상황.
여유가 넘치는 영혜의 태도에 내가 다 흐뭇했다.
부드러운 관자를 토마토소스에 푹 찍어서 한입에 넣고 천천히 먹었다.
토마토소스와의 조화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 이후로 상어 지느러미가 들어간 샐러드부터 시작해 버섯 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등심구이까지 화려한 만찬의 릴레이였다.
식사가 끝나고 진태와 독대가 잡혀 있으니 계속해서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이런 때일수록 여유를 보여야 하는 법이다.
이전에는 밥 한 숟가락 뜨는 것도 눈치를 보였던 준만과 영혜는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한 모습으로 식사를 즐겼다.
마지막 식사로 나온 것은 떡국이었다.
새해 첫날인 이유와 더불어 엽전처럼 생긴 떡국떡은 재물운을 상징하기도 하니, 진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끝나가자 재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떡국을 먹는가 싶더니, 이내 숟가락까지 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젠 얼굴을 구기며 나를 대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어 나도 마주 보고 있었고.
“흠흠.”
오히려 사이에 있던 남순이 불편했는지 헛기침을 내었다.
나도 이런 유치한 눈싸움을 지속할 마음이 없었기에 떡국을 마저 먹었다.
식사가 끝나가자 진태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잘하는 놈에게 이 자리를 주겠다. 이건 변함없어.”
이곳에 앉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자리.
진태가 몇십 년이나 고고하게 앉아 있는 저 왕좌.
“너희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오늘이 올해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나 너희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지. 태선을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지켜보마.”
결연한 표정들이 진태를 향해 제 의지를 뿜어대고 있었다.
진태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를 보며 말했다.
“올라와라.”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무표정한 진태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진태의 말을 듣고 나를 따갑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신경 쓰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해서 이 정도 위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은 늘 염두에 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차실장한테 경호팀을 더 충원하라고 해야겠어.’
***
“준만아. 강빈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소리를 한 거야?”
영만의 말에 재만도 계단을 바라보던 시선을 준만에게 돌렸다.
강빈이 태선호텔 부사장의 자리를 거머쥔다는 것이 현실성이 없어 보이면서도, 진태와 독대를 하니 스멀스멀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준만이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고는 말했다.
“아버지께 받은 것도 아니고, 제가 차린 회사만 수년을 경영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성과가 어디 보통이던가요? 택배로는 태선보다 앞서나갔고, 투자회사 수익? 말해봐야 입만 아프죠. 이제 제 능력으로 태선을 키워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에 범준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작은아버지, 감추지 못하고 드러낸 야욕을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너는 가만히 있거라.”
재만은 한숨을 불어 내쉬고는 범준의 말을 막았다.
재만이 예전 같았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준만이, 이제는 태선물산의 부회장이 되었다.
이제 준만은 회유하거나 재만과 경쟁해야 될 상대.
범준이가 함부로 대할 만한 인물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 강빈이는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말을 꺼내야 한다면, 차라리 제가 꺼내기로 결심한 재만이 눈을 반쯤 치켜뜨고는 말했다.
“강빈이가 경영 능력이 나쁘지 않다는 건 나도 알지. 그래도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어. 제 큰고모가 물러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를 드러내. 아버지도 그냥은 안 넘기실 거다.”
준만이 반박을 하려는 찰나 나선 것은 남순이었다.
“오빠. 이번에 아버지 곁을 가장 오래 지킨 사람이 누군지 알아?”
재만은 뜻하지 않게 끼어든 남순에게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너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남순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강빈이. 걔가 아버지 건강 걱정을 제일 많이 하더라. 나는 정신이 없어서 아버지 병실 들어가는 것도 못 봤는데, 강빈이는 그걸 다 하더라고. 아직 서른도 안 됐지만, 능력은 이미 검증됐고 누구보다 강인한 애야. 나는 강빈이가 호텔 자리 받을 자격 있다고 생각해.”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건지 알고나 하는 말이지?”
“왜, 내가 오빠 눈치 보면서 하고 싶은 말도 못 할 줄 알았어? 재만 오빠. 착각하지 마. 내가 회장 자리에 관심 없는 거지, 라인 타려고 그동안 욕심 안 낸 거 아니니까.”
재만은 지그시 남순을 노려보았고, 준만은 의아한 눈빛으로 남순을 바라봤다.
재만을 비롯한 남매들이 준만을 경멸하고 조소하는 일들은 이전에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남순이 나선 적은 없었다.
자리가 끝나고 난 뒤에야 몇 번 다독여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는….
‘강빈이가 또 사람을 홀렸나 보군.’
준만은 욕심이 없다고 믿었던 자신을 물산 사장에 앉히고 더 나아가 태선가에 발을 넓히려는 다짐을 하게 한 강빈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영만이 진정하라는 듯 팔을 살살 흔들고는 말했다.
“자, 자. 이거 새해 첫날부터 분위기 이상하게 왜 그래? 동만이 형이랑 정순이도 내쳐진 마당에 우리끼리 합심해야지. 아버지 오실 때까지 다들 차나 들자고.”
영만의 말에 재만이 남순을 흘겨보고는 차를 마셨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범준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허공을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만의 아내, 강숙이 그런 범준을 보며 말했다.
“너 어디가? 아버님 오시면 인사드려야지.”
범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식품에서 전자서비스로 옮기려면 해야 될 게 많습니다.”
재만은 어딘가 결연한 모습으로 식당을 빠져나가는 범준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잡지는 않았다.
***
태선호텔은 중심 사업인 호텔 이외에도 태선에서 경영하는 모든 레저를 아우르는 지주회사였다.
거기에 더불어 전자, 물산, 보험 등 태선의 기둥과도 같은 회사들의 얼마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전자와 호텔의 기업가치가 차이가 나더라도, 이와 같은 순환출자 때문에 지배구조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내가 넘치는 돈을 갖고 있더라도 태선을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들른 서재 속 온실.
어째 숲 내음이 더 깊어진 것 같다.
“할아버지.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여기 있는 식물들은 광합성이라는 것을 안 합니까?”
“저기 보이냐?”
진태의 말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서재는 특이하게도 가운데 쪽에는 전등이 없었고, 겉에 조명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조명들이 빈틈없이 서재를 비추고 있어 신경 쓴 적은 없었지만 지금 보니 이상하긴 했다.
진태가 가리킨 곳은 조명이 없는 곳이었는데, 투명한 막 위로 검은색 벽 같은 것이 보였다.
내가 바라보고 있자 진태가 말을 이었다.
“저게 뚜껑이다. 열면 햇볕이 내리쬐지.”
“....”
상상도 못 해본 배경 설명이었다.
그동안 진태가 굳이 위층에 서재를 만든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놈의 재벌은 어떻게 해서든 돈 쓸 일을 만드는구나.
“...하나 배웠습니다.”
“그래. 그래도 네놈 씀씀이 보면 나쁘지 않아. 나도 안 산 비행기를 떡하니 사고 말이야. 흐흐.”
“할아버지야 외국 나갈 일이 없지 않습니까. 외국 기업가들도 직접 여기로 찾아오니까요.”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않으냐. 넘치는 게 돈이니.”
“하나 장만해드려요?”
진태는 코웃음을 치고는 온실 안쪽에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반대편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 진태를 바라봤다.
“강빈아.”
“예. 할아버지.”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다.”
여느 때와 같이 무감정한 목소리.
진태의 의도를 유추할 수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진태를 바라봤다.
“그 말씀은 힘들다는 겁니까?”
“쉽지 않은 길이라는 거다. 네가 그동안 상대해 온 외국계 기업들과는 다를 게야. 서른도 안 된 너를 앉히면 나 보고 노망이 났다고 말하는 놈들도 생길 테지.”
“그런 사람들에겐 보란 듯이 해내겠습니다. 저는 태선호텔을 지금보다 더 높이 올릴 자신 있습니다.”
“태선은 밑에서부터 쌓아 올린 회사가 아니다. 이미 기반을 다지고 다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지.”
“저에겐 다를 바 없습니다. 늘 결과로 증명했듯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전생에서 증권사 대표에 오르기까지 해외, 국내 가릴 것 없이 무수히 많은 비즈니스 호텔들을 경험했다.
힘든 시절에야 값싼 객지호텔을 갔지, 자리에 오르고는 5성급 호텔에서 밤을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기억들을 바탕으로 태선호텔을 그 여느 호텔들보다도 선진적인 곳으로 만들 것이다.
앞으로 20년 뒤에나 나올 만한 시설들을 갖춘 호텔을 누가 마다할까.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진태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애초에 너한테 맡길 생각이었다.”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태의 말마따나 지금 태선호텔을 맡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기존 정순의 자리를 대체해야 되는데, 나머지 진태의 자식들은 저마다 자리를 꿰차고 있었고, 혈육 중에 그만한 경영 경험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나 말고 있을 턱이 없다.
물산의 사장 자리를 맡고 있다고는 하나, 진태는 내가 실질적인 경영에는 손을 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태의 성격상 다른 기업가를 불러올 일이 없으니 남은 것은 나 하나.
“네가 이제 처음으로 나한테 빌려 가는 것이 생겼구나.”
재만이 들으면 발작할 말인 ‘빌리는 것’.
진태의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수십 년 동안이나 태선전자의 사장이었던 재만이지만, 그것이 제 소유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보다, 우선 내 손에 들어온 것을 움켜쥐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
진태에게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다.
“상환기간은 언제까지입니까?”
“이자만 꼬박꼬박 내면 급할 게 뭐가 있겠어? 흐흐.”
이에 진태도 즐겁다는 듯 받아쳤다.
나는 테이블 밑에서 한 손에 힘껏 주먹을 쥐었다.
받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기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태선호텔이라는 대어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왔지만, 태선을 이어받으려는 자가 이런 것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나는 진태를 보며 태연하게,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이자에 호텔 값도 따블로 쳐서 두둑이 챙겨드리고 태선호텔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