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위층에서 내려오는 진태를 보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 너희들도 한 해 동안 수고했다.”
진태는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걸어가 상석에 앉았다.
그러고 식탁을 한 번 죽 훑고는 말을 이었다.
“올 한 해는 다들 만족하느냐?”
“네. 회장님.”
대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
실적이 좋던, 나쁘든 간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영만의 얼굴에 살짝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고, 범준은 올해는 꽤 성과를 내었는지 고개를 바짝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흐음. 표정들을 보아하니 난 놈이 있고, 긴 놈이 있구만.”
진태가 특히 영만에게 시선을 주며 코웃음을 치고 말을 이었다.
“채규가 나눠준 자료들은 다 읽어봤어?”
“네. 그런데 제가 갖고 있는 지분과 조금 다른 것 같습…”
“돈깨나 만지는 데서 일하는 놈이, 뭐? 조금 달라?”
진태는 영만의 말을 끊으며 면박을 주었다.
재만이 굳은 표정을 하며 말했다.
“전자가 1.2퍼센트, 전자서비스가 4퍼센트, 전기와 보안은 그 이상 올랐더군요. 제가 보유한 다른 계열의 지분은 그대로고요. 연락해보니 현재 지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지급해주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순진하게 제 계열사의 지분만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계열사의 지분은 의결권으로, 의결권은 곧 경영과 직결된다.
승계와는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서 다른 계열사들의 지분을 쥐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일이다.
진태가 식탁에 앉은 자신의 피붙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오늘 이 자리를 파하고 나면 적혀 있는 대로 정리돼서 지분이 들어갈 게다.. 그리고 그 정도의 힘을 준다는 건, 그에 맞는 자리를 주겠다는 거야.”
“그렇다는 말씀은…?”
“우리 태선에 부회장을 만들 게야.”
부회장이라니?
나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다들 정순의 지분이 정리되어 나뉠 것만 생각했지, 부회장의 자리를 만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남순과 준만은 굳은 표정으로 진태를 바라봤다.
영만은 꽤 열받았는지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재만은 벌떡 일어나 예상치 못한 수확에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재만은 벌떡 일어났고 영만은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며 준만과 남순은 그저 굳은 표정으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회장님. 주신 자리에 걸맞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만이 허리까지 숙여 가며 말했다.
“최선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제가 있던 전자 쪽은 범준이한테 넘기면 되겠습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전자는 네가 계속 맡아야지.”
“예? 부회장 자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자까지 겸임하라는 말씀입니까?”
진태가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리며 재만을 바라봤다.
“너 설마 너 혼자 맡을 거라고 생각한 게냐?”
“그게 무슨…?”
“너는 태선전자 부회장, 영만이는 태선보험 부회장, 준…”
“푸웁.”
영만이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었다가 한 손으로 막고 눈치를 봤다.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재만이 자신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발끈하며 말했다.
“부회장 자리를 여러 개 만드시는 이유가 뭡니까? 한곳으로 모으지 않으면 태선가의 기반이 흔들릴 겁니다.”
한곳으로 모으라니.
태선의 기반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가 공고해지길 바라는 거겠지.
의도가 뻔한 말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질 뻔했다.
진태도 그런 재만의 의도를 눈치챈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는 내가 이미 죽은 것 같더냐?”
“예?”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며.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구나.”
재만이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계열사 부회장 자리를 준다고 했지, 누가 회장 자리를 넘긴대? 허, 참.”
진태는 그 뒤로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날도 날이지만, 최근 일이 많았기 때문에 구태여 체력을 쓰긴 싫은 모양이었다.
채규가 수첩을 한 손에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 태선 그룹의 계열사는 총 39개로 모든 지휘체계가 회장님 단 한 분에게 집중됩니다. 한 계열에 맞추는 것이 아닌 통합적인 경영체계를 고수해왔지만, 다양해진 계열사만큼 기업 간 특성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좋다는 게 회장님의 생각이십니다.”
진태가 끄덕이며 말했다.
“누가 뭘 맡을지 얘기해.”
“네. 회장님.”
채규가 수첩의 다음 장을 넘기고 말했다.
“서재만 사장님은 태선전자 부회장으로, 서영만 사장님은 태선금융 부회장으로, 서남순 사장님은 태선백화점 부회장으로, 서준만 사장님은 태선물산 부회장으로 진급하시게 됩니다.”
네 남매는 채규의 말에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특히 재만은 여동생, 남순까지 부회장으로 진급한다는 것은 예상 못 했는지 남순의 이름이 불릴 때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영만은 금융계열이 온전히 제 몫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쁜지 연신 입술을 실룩거렸다.
남순은 그저 침착한 모습이었고, 준만 역시 조금은 놀란 눈치로 진태를 가만 바라보았다.”
채규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태선식품 서범준 사장은 태선전자서비스 사장으로, 서강빈 부사장은 태선물산 사장으로 인사이동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계열사 이사로 계신 자제분들에게 돌아갈 지분은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다들 침만 삼킬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도 여기서 나설 생각은 없었으니 침묵을 지켰다.
나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손주로서 이 자리에 온 범준은 태선전자서비스 사장이라는 걸출한 자리에 잠시 들떴다가 내가 태선물산의 사장 자리에 오른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역시 재만.
“부당한 처사입니다! 범준이는 전자 부사장 자리도 오르지 못하게 하는데, 강빈이는 사장이라니요! 대놓고 차별하시는 것 아닙니까?”
진태가 한 손을 턱에 괴고는 이어서 말했다.
“마카오도 따와, 그걸로 월드컵도 따와, 심지어 태선그룹에 수천억 원 쾌척까지 한 게 강빈이다.”
“그건 밖에서 벌어온 돈 아닙니까. 경영 경험은 범준이가 월등히 많습니다. 태선 식품을 끌어 올린 것도 범준이라고요. 기회는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천억 주면 생각해 보마.”
“예?”
“강빈이처럼 똑같이 오천억 원 들고 와. 그땐 군소리 안 하고 사장 자리 올려주마.”
재만이 입술을 질끈 물고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지금 직위를 돈 주고 파신다는 겁니까?”
“하이고야. 재만아. 서재만!”
“...예. 말씀하십시오.”
“태선은 원래부터 능력 있는 놈이 가져가는 거다. 그건 너도 잘 알 테고.”
“....”
“그럼 나는 제일 잘난 놈한테 뭘 줘야 할까. 제일 좋은 걸 줘야 할까?”
재만은 이러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빼앗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단숨에 푼 재만은 허리를 바로 세웠다.
태선에서 제일 좋은 것은 전자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리고 제일 잘난 놈은 잴 필요도 없이 나다.
재만조차 더 나서지 않자 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갖고 있던 것에 더 끼얹어 준 것이니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너희가 그토록 원하던 자리. 내가 공평하게 줬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제대로 해보거라. 아비로서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어. 멍석까지 깔아줬는데 성과 못 내는 놈은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이젠 다 알겠지만 정순이와 동만이가 나를 해치려 했다.”
진태의 말에 다들 긴장한 모습과는 대비되게 남순의 얼굴만은 조금 어두워졌다.
정순이 진태를 죽이려는 것을 처음 말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아직은 마음의 부담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저런 심성으로 어떻게 태선백화점을 잘 경영해나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재만과 영만은 이미 알고 있던 정보였는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준만은 내 등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진태는 자신의 혈육들을 한 번씩 둘러보고는 말했다.
“제 딴에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줄 알았겠지만 아주 볼품이 없었어. 너희들은 할 거면 확실히 해라.”
“아버지!”
남순이 벌떡 일어나며 진태에게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제 그런 일 없을 테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진태는 남순을 힐끗거리고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걸 잃게 될 테니 말이다. 정순이와 동만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다들 알고 있겠지.”
남순은 잠시 더 진태를 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눈치를 보던 영만이 말을 꺼냈다.
“저…”
“뭘 뜸을 들이고 있어?”
“그, 정순이가 가지고 있던 호텔은 어떻게 돌아가게 되는 겁니까?”
내가 궁금했던 질문이었으나 속이 보일까 해서 하지 않았던 말인데, 알아서 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그가 꺼내지 않았다면, 내가 꺼냈을 얘기였으니까.
진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 일단 그냥 둬라.”
영만은 입을 달싹였다가 진태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그러는 한편,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재만도 몸을 살짝 움직였지만 사리는 모습이었고, 준만과 남순은 처음부터 관심 없었다는 듯 초연했다.
모두가 말을 아끼는 지금이 적기다.
“할아버지.”
진태가 무심한 표정이 나에게 닿았다.
“원하는 게 있는 게야?”
“예.”
대놓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모습에 재만은 대번에 눈을 치켜떴고, 준만은 예상치 못한 듯 당황한 모습이었다.
“말하거라.”
“태선호텔. 제가 경영해보겠습니다.”
질문이 아닌 전달.
이에 노성을 낸 것은 내내 조용하던 범준이었다.
“태선물산의 사장까지 맡았으면 만족할 줄을 알아야지. 서강빈. 여기 큰아버지들이랑 고모님들 눈치는 보지도 않아?”
범준은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이번엔 진태를 보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 태선물산 사장까지 맡은 강빈이 어떻게 태선호텔을 맡습니까.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진태가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만 말하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범준은 답답함에 소리쳤다.
그러나 진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겠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태선호텔의 경영을 맡는다는 것.
단순히 호텔 몇 개를 운영한다는 것이 아니다.
태선호텔의 경영을 맡는다 해서, 태선호텔만 받는 것이 아니다.
태선전자가 반도체와 전기, 전자서비스를 갖고 있고 태선보험이 카드와 증권, 캐피탈 등 금융계열 자회사들을 갖고 있듯, 태선호텔을 받는다면 그곳에 딸린 계열사들이 부가적으로 따라온다.
태선리조트와 태선랜드 같은 놀이동산부터 스포츠용품, 관광 등 계열사 숫자로는 가장 많은 호텔 계열이 내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훌륭한 먹잇감을 앞에 두고 침만 질질 흘릴 수는 없다.
이제는 여기 있는 모두가 내 야욕을 알 터.
더 이상 참을 수도, 참을 이유도 없었다.
서재만, 서영만, 서남순.
이들과 나란히 같은 자리에 선다는 것이다.
준만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계획이었기에, 내내 평점심을 유지하던 준만 역시 꽤 놀란 표정이었다.
“식사 끝나고 위층으로 올라오거라.”
“예.”
진태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진태와의 독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재만이 불안한 눈빛으로 연신 나와 진태를 번갈아 보고 있었고, 범준은 망연자실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준만이 물었다.
“이 녀석아, 누가 뭐래? 말은 해주란 말이다. 아버지도 모르게 하는 게 말이 되냐?”
“하하. 아직 결정된 건 없잖아요. 제가 달라고 했다고 바로 주시겠어요?”
입 밖으로 나온 말과 달리 나는 반드시 가져올 것이다.
“그래. 한번 잘해봐라. 네가 처음으로 욕심내는 태선의 자리 아니냐.”
준만은 피식 웃고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준만의 말마따나 태선호텔의 부회장 자리는 내가 처음 직접적으로 노리는 자리다.
태선증권사의 본부장 자리는 명목상의 자리나 마찬가지였고, 태선물산의 부사장은 내가 원해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통해서 내 본격적인 태선가 정벌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준만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강빈아. 네 뜻을 펼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다들 어수선하고 예민할 때니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 말 명심하겠습니다.”
말과 달리 언제까지고 눈치를 봐가며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차지할 수 있는 왕관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