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모든 걸 내려놓겠습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옷장 안에서 빠져나온 경주는 초점 없는 눈으로 진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실을 울릴 정도로 흐느끼더니, 눈물이 다 말랐는지 어딘지 모르게 초연해 보였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던 자식들마저 자신을 저버렸으니 이제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
진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국회 관련한 것만 터트릴 게다. 태선가의 며느리가 제 시아비를 죽이려 들었다고는 할 수 없으니.”
경주는 듣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진태가 이어서 말했다.
“형량은 건드리지 않으마. 네가 지은 죄만 치르고 나와. 그 뒤에 다신 태선가에 발붙일 생각하지 말고.”
“....”
채보가 멍하니 서 있는 경주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진태는 모든 것을 잃게 된 경주의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다시 제 손에 쥐어져 있던 책을 펼쳤다.
“그 정도로 끝내도 되겠습니까?”
채규의 질문에 진태가 답했다.
“이 정도로 끝내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겠지. 태선가에서 쫓겨난 거? 국회의원 못 단 거? 전과자 된 거? 그건 별거 아니다. 근데 자식들한테 버려진 거. 그건 평생 갈 게야.”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하는 진태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무덤덤했지만 말의 내용은 살벌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
그 말이 지금 같은 상황보다 적절할 수 있을까.
채규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나왔다.
경주는 이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아직 정순의 처분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태선호텔에서 그녀의 지분을 모두 빼내고 물러나게 하기 위한 계획을 짜야 한다.
채규는 오늘 밤도 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
진태는 형설병원에서 태선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종 제거가 큰 수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수술은 수술. 만전을 기하는 것이다.
수술 당일이 되고, 나는 오늘 하루를 통째로 비워서 이곳에 찾아왔다.
“고모.”
진태가 누워있을 병실 앞에 남순이 앉아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초췌한 얼굴의 남순이 나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강빈이도 왔구나.
“병실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 계세요.”
“방금 전까지 있다 나왔어.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지더라.”
“고모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래도 고마워.”
“저는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리러 가볼게요.”
남순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병실로 들어갔다.
진태는 예의 검은색 실크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었다.
옆을 보니 전에 보았던 병원장이 연신 굽신대며 진태에게 말하고 있었다.
진태는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반겼다.
“녀석. 바쁠 텐데 이게 뭐라고 시간까지 내?”
“수술은 수술이잖아요. 그래도 같이 있는 게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병원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하. 30분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수술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푹 주무시고 나면 끝나있을 거예요.”
진태가 그거 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에 침대맡에 앉았다.
병원장을 보며 말했다.
“수술은 언제 합니까?”
“이제 들어가야 됩니다. 아니면 더 시간이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회장님 수술인데 시간이 뭐가 중하겠습니까? 하하.”
입에 기름칠이라도 했는지 아부가 아주 청산유수다.
가볍게 흘려듣고 진태를 바라봤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는 걸 보니 걱정은 전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지금 바로 가지. 시간 끌어서 무엇 하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술 뒤에 뵙겠습니다.”
병원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이동식 병원 침대는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는지 병원장이 나가고 연이어 들어왔다.
침대로 몸을 옮긴 진태를 보며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갔다 오마.”
수술실까지 같이 따라간 뒤에 남순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남순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고모. 할아버지 수술실 들어갔어요. 의사 말로는 30분도 안 걸린다고 하니까 금방 끝나실 거예요.”
“다행이다. 그래도 나이가 있으셔서 괜히 불안하네… 지금 상태도 안 좋으시고.”
남순의 옆에 앉았다.
태선백화점과 관련해서 투자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사업 관련 얘기를 꺼낼 분위기는 아니었다.
말없이 앉아 있다가 어색함에 괜히 TV의 전원을 켰다.
켜진 화면 안에서 경주는 손에 수갑을 찬 채 연행되고 있었다.
“마일그룹의 마현석 회장과의 유착 관계부터 선거 과정에서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문경주 전 의원이 구속됐습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이에 대해 인지를 하고 수사를…”
TV를 끄고 남순의 눈치를 살폈다.
남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TV 안 봐?”
“고모 괜찮으세요?”
“나야 상관없지. 이어서 보자.”
무덤덤해 보이는 남순을 보고 TV를 다시 켜자 검은 정장을 입은 경주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경주를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노정환부터 시작해 이 얼마나 긴 악연인가.
진태가 자신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게 이런 일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형량을 채우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한들, 그녀의 곁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국회라는 지붕도, 그녀를 뒷받침해주었던 태선이라는 집안도.
무엇보다 그녀의 곁에는 자식도, 남편도 없을 것이다.
경주를 호출한 진태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는 전해 들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다, 창훈이 그런 말을 했다고 했지.
눈앞에서 자식들한테 처참하게 버림받은 기분은 대체 어떤 것일까.
죽이진 않았지만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
그게 바로 내가 경주에게 바랐던 것이다.
경주는 제 앞에 들이민 수많은 마이크 앞에서 연신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전문가들이 예측한 형량도 나왔는데, 최소 3년 형 이상의 징역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태선도 저버린 경주가 형량을 적게 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살인 미수나, 노정환과 관련된 일들은 아예 밝히지 않았고, 자수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진태의 의도대로 처리된 것이다.
‘차라리 형량이 긴 게 나았을지도.’
모든 것을 잃은 경주가 세상과 마주할 수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남순은 나와 같이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감정의 변화는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이 꽤 흐르고 진태가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
아직 마취가 덜 풀렸는지 입을 벌린 채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술을 마친 의사가 우리를 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마무리되면, 할아버지께 잘 이야기해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진태에게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지, 의사가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남순도 수술이 잘 끝났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일어나서 누워있는 진태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전생대로라면 진태는 내년에 죽었다.
사망 원인은 고혈압 합병증으로도 널리 알려진 ‘급성 심근경색증’.
심장의 근육과 통하는 혈관인 관상동맥이 갑작스럽게 막혀 심장근육의 조직이나 세포가 죽는 상황이다.
3분의 1이 발병 직후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며, 진태가 이에 해당했다.
상주 의사가 있다 한들 이미 노쇠한 몸은 버티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 나는 진태의 평소 식습관들을 꾸준히 바꿔왔고 온갖 몸에 좋은 것들을 먹였으니 바뀌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
20세기가 막을 내리고 21세기의 첫 아침이 밝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21세기의 첫 신년사에서 경제위기에 대해 사과했으며, 개혁의 마무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다짐했다.
제주도의 사라봉공원에서는 천 년 뒤에 개봉하는 타임캡슐을 매설하고, 강원 삼척시에서는 백 년 뒤에 개봉하는 타임캡슐을 매설하는 등 새천년의 미래를 기원하는 행사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한일월드컵을 이끌었던 거장. 거스 히딩크.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에 부임하는 날이 바로 오늘, 2001년 1월 1일이다.
여러 행사들이 펼쳐지는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당연히 진태의 저택이었다.
새해를 맞이해 오랜만에 진태의 저택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진태의 자식들이 모두 모이면 꽤나 어수선했던 저택이 오늘은 한산했다.
동만네와 정순네가 사라졌으니, 남은 것은 재만과 영만, 남순과 우리 가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남순도 이 적막함을 느꼈는지 평소보다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오랜만에 모였는데. 맛있는 밥 먹으러 가자.”
남순의 말에 모두 식당으로 모여들었지만 여전히 다들 말이 없었다.
식탁 한 편에 앉아 있던 재만도 오늘은 나를 쏘아보지 않고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빈이 해외 일정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것이 현명할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태선가의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 하던 영빈이다.
오늘은 그런 냉랭함이 한층 더해졌으니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준만은 영혜의 손을 꽉 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긴장이라도 되신 거예요?”
“긴장 안 되는 게 이상하지. 태선물산 받고 처음 맞은 신년인데. 그래도 성과에 대한 자신은 있으니 괜찮다.”
오늘은 진태가 지분양도나 계열사 분배 같은 콩고물들을 가장 많이 나누는 날이기도 했다.
다들 의욕을 잃은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 기회를 어떻게 되살릴지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동만이 물러나고 준만이 태선물산을 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정순이 나가리 되고 태선호텔이 매물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다.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범준은 심지어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나타난 사람은 채규였다.
“새해부터 저택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회장님이 오시기 전에 제가 먼저 간단하게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태선가의 일정 지분이 이번에 회수되었습니다.”
채규의 계획으로 태선호텔의 내부감사가 실행되고 정순이 갖고 있던 태선가의 모든 지분을 회수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
수천억 원 이상의 자본이 움직인 시간이라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태선이 아니었다면 어떤 기업에서도 이런 속도의 지분정리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채규가 손에 든 서류철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앉아 있던 모두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그에 따른 분배와 지분 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