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진작 내치고 끝낼 걸 그랬어. 이렇게 시원한 줄 알았다면. 그렇지 않아도 성에 차지도 않는 자식 놈, 제 발로 나갈 거리를 만들어주니 얼마나 속 편하냐.”
정순이 되돌아갈 때마저 진태는 책을 읽으며 시선을 주지 않았다.
결국 정순이 나간 지금, 진태의 얼굴은 그의 말처럼 개운해 보였다.
“썩은 싹은 잘라내는 게 회장님 신조니까요. 잘 결정하신 겁니다.”
“그래. 자식 키워봤자 덧없다는 게 사실이구나. 경주는?”
“구채보 실장이 데리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구실장이 확실히 일을 잘해.”
남순이 경주를 잡아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고는 하지만, 태선호텔의 인력과 진태의 인력은 차원이 달랐다.
그에 대한 증거로 아직도 추적 중인 호텔측 경호팀과 달리 나선 지 3시간도 되지 않아 경주를 잡아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채보가 등장했다.
채보는 제 2경호팀의 실장으로 덩치만으로는 모든 경호팀의 실장들보다 거대했다.
키는 거의 2미터에 근접했고, 부풀어 오른 근육은 마치 곰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채보의 진가는 정보 조사와 추적에 있었다.
일반적인 경호원과 달리 강력반에서 십수 년을 지낸 경력으로, 수많은 미해결사건을 해결했던 점이 채규가 그를 영입한 이유였다.
채보의 뒤에서 경주가 몸을 떨며 서 있었다.
진태가 채보를 보며 말했다.
“지시대로 했지?”
“예. 두 분은 제 팀원들이 차에 데리고 있습니다.”
진태가 채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뒤에 서 있던 경주가 몸을 벌벌 떨며 진태 앞으로 걸어왔다.
“회장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
“저번에 그 사달을 내고 또 일을 벌인 이유가 뭐냐?”
경주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제 아들 녀석들한테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 꿈이 짓밟힌 마당에 제 아이들은 하고 싶은 거 원 없이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경주야.”
“예…?”
“한 번만 더 연기하면 그때는 더 들어 보지 않을 게다.”
진태의 말에 경주가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제 눈물을 닦았다.
진태는 한쪽 눈만을 치켜뜨며 말했다.
“국회가 꿈이라더니 연기 쪽이 나았겠구나. 아니지, 둘이 하는 꼴이 비슷하긴 하네.”
“아이들을 위한 일이었다는 건 진심입니다.”
어느새 경주의 몸은 떨리지 않았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도 서서히 하얗게 돌아오고 있었다.
진태 앞에서 연기를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도 모성애에 대해 말하더니, 정말 있기는 한 게야?”
“아이들 대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경주는 다짐을 마쳤는지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만큼은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진태가 말을 이었다.
“오늘 정순이도 다녀왔다. MP3가 네 작품이라 하더구나.”
“돈만 받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갈 걸 그랬나 봐요. 보험으로 만들어 두었지만 같잖은 감정이 제 발목을 붙잡았네요.”
“그러지 그랬냐. 애도 아니고 밤 11시가 되면 열어보라니. 영악한 너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했어.”
“저도 사람이니까요. 남순 아가씨가 워낙 독특하시기도 하고.”
남순을 떠올려보자 진태는 경주의 말이 어느 정도 납득은 되었다.
모든 자식을 차갑게 대할 때도 남순에게만은 그러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기업가라면 자고로 제 이득을 추구할 때, 남을 고려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한 명이 이득을 본다면 다른 한 명은 반드시 손해를 보는 게 사업이니까.
천성이 고왔던 남순도 기업가가 되고 조금은 영악해졌겠지만, 그 천성이 어디 가겠는가.
그러나 타고난 사업 능력과 수익성을 분별하는 능력은 태선백화점을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진태의 자식들 중 사업하는 모든 과정에서 떳떳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남순밖에 없을 것이다.
정순은 자기가 온갖 짓을 저질러도, 떳떳하게 일하는 남순만 못하니, 늘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진태는 남순이 마음만 독하게 먹었다면 재만을 넘기는 것도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옥희가 그랬었지.’
진태는 자신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만났던 첫 번째 부인을 떠올렸다.
옥희 집안의 부를 보고 결혼했지만, 그녀야말로 진정한 보물이었다.
어린 시절 잠깐의 유럽 견학으로 한국에서 엇비슷한 건축물들을 설계했고, 사업 초기에 결정들은 대부분 그녀가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옥희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태선은 지금보다 그 위상이 드높았을 것이다.
진태가 잠깐 생각에 빠진 동안에도 경주는 말없이 진태 앞에 서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치고 태연하게 보였다.
진태는 그런 경주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태가 입을 뗐다.
“창호랑 창훈이한테 기회를 주마.”
“네?”
경주는 스스로가 요구했음에도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토끼 눈을 하고는 입을 벌렸다.
“나도 궁금하구나. 네 모정을 그 아이들도 알지.”
“회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경주는 연신 허리를 굽혀대며 반복해서 말했다.
“단, 그 아이들도 너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다. 너는 저기 들어가 있거라.”
진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큼직한 옷장이 있었다.
VIP실답게 화려한 무늬에 흰색 옷장이었다.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저 옷장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인가요?”
“그래. 저 안에 틀어박혀서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한다. 작은 소리라도 낸다면 거기서 끝이야.”
“조건이 그게 끝인가요?”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에 앉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용서해주겠다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조건에 경주가 반색했다.
“하겠습니다. 하루라도 안에 있을게요.”
“그래. 지금부터 들어가 있어. 구실장.”
“예. 회장님. 데려오겠습니다.”
옷장 안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던 경주가 하던 것을 멈추고 뒤돌아 물었다.
“아이들을 이곳으로 데려온다니요?”
진태 대신 채규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창호 군과 창훈 군이 여기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경주 씨는 소리 내면 안 됩니다. 이게 회장님의 조건입니다.”
“그게 무슨….”
“회장님 지시입니다. 질문은 더 받지 않겠습니다.”
채규가 말을 끝내고 옷장의 문을 닫았다.
이제 경주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잠시간 옷장 틈밖에 없었다.
그보다 창호와 창훈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라니?
듣는 것도 아니고 둘이 할 말이 뭐가 있다고 저런 조건을 단 것일까.
경주는 의아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갈까 입을 꽉 다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경호원 셋이 창호와 창훈을 데리고 등장했다.
자신과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같이 있던 토끼 같은 자식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꽤 험했으니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생각하니 경주는 가슴 한편이 시려왔다.
경주와 달리 창호와 창훈을 바라보는 진태의 시선은 인자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봤자 늘 치켜세우던 눈썹이 조금 내려간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인상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창훈은 겉으로는 호위처럼 보이는 경호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긴장되어 있던 몸이 진태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 조금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진태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왜 부른지는 너희도 잘 알 텐데.”
진태의 말에 창훈이 살짝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창호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그대로 두고 말했다.
“하, 할아버지….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런 창호의 모습에 진태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설마 할애비가 돼서 손주 녀석들을 버릴까.”
창호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창훈을 바라보았다.
창훈은 그런 창호의 시선은 가볍게 무시하고 진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창훈을 바라보며 진태가 말을 이었다.
“너희들한테 마지막 기회는 줘야지 안 그러냐?”
“그, 그래 주신다면 조용히 살겠습니다.”
“조용히는 무슨. 너희들도 태선가 사람 아니냐? 잠깐 유배 생활 보낸다고 생각하고 해외나 갔다 와라.”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창훈이 진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를 굽혀댔고, 창호도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리다 이에 동참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창훈이 허리를 펴고 말했다.
“회장님께서 시키신다면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진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조건으로 너희 어미를 버려야 한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어딜 가든지 너희가 팔 벌리지 말라는 소리야.”
창훈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회장님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차라리 잘됐네요. 저는 그렇게 말렸었는데…. 엄마는 이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채규가 옷장을 슬쩍 봤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태는 표정 변화 없이 창호를 보며 말했다.
“창훈이는 그렇다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창호는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 있는지,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창호를 보며 창훈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형. 뭘 고민하는 거야. 우리가 이렇게 된 것도 다 엄마 탓이잖아. 1년, 아니 몇 달 전만 해도 형 태선물산 이사였던 거 잊었어?”
진태는 제 앞에서 건방지게 목소리를 높이는 창훈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냥 두었다.
창호는 이내 콧김을 한 번 불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엄마를 저버리겠습니다.”
“엄마?”
“아, 아뇨. 문경주 씨를 버리겠습니다.”
창호의 말까지 듣자 진태는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연유를 모르는 창호와 창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채규는 말없이 옷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태는 너무 웃어서인지 기침을 한두 번 하고는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뜬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 있었다.
“야, 이놈들아. 그래도 경주는 마지막까지 너네들 생각하다 갔는데, 자식이란 놈들이 이렇게나 형편없다는 걸 알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창호와는 달리 창훈은 여전히 자신을 시험하려 한다고 생각하는지 대뜸 말했다.
“그거 다 연기일 겁니다.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사람이 저희를 생각이나 하겠어요? 오늘부로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
“그만!”
진태의 호통에 창훈이 몸을 살짝 떨고는 눈을 깜빡였다.
아흔이 다 되어가는 노인네의 목청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태는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들은 제 자식 하나 건사하겠다고 무릎이며 목숨이며 다 놓을 기세인데 네놈들은 그냥 후레자식들이구나. 그래. 그것도 부모의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할아버지…? 왜 그러세…”
“할아버지? 네 할아버지가 어디에 있다고 할아버지라는 거냐?”
창훈은 그제서야 자신이 덫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손을 싹싹 빌어대기 시작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말을 되돌릴 수 있다면야 하루 반나절이라도 그러고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다시 입에 넣을 수는 없다.
진태의 손짓과 함께 경호원들이 창호와 창훈을 밖으로 끌고 나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창호와 창훈이 나가고 몇 초 뒤.
옷장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