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36화 (136/249)

#136화

강빈과 남순이 빠져나간 뒤 채규는 곧장 병실에 들어왔다.

“회장님!”

진태가 머리를 짚은 채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뱉고 있었다.

채규가 들어왔을 때와 맞물렸는지, 마침 경호원이 의사를 부르기 위해 뛰쳐나갔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혈압약은 아까 남순이 병실에 들어오기 전에 먹었을 터였다.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로 짐작 가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 서정순 사장도 가담되었군요. 괜찮으십니까…?”

제 자식이 죽이려고 들었는데 멀쩡한 사람이 있을 리가.

강빈과 남순에게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정황만 있고 확증은 없었다.

피붙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참아왔던 격통을 이제야 터트린 것이다.

진태는 어느새 숨을 낮게 내뱉고 진정하고 있었다.

뒤에서 경호원과 함께 의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채규는 괜찮다고 손짓해 보이고 진태에게 다가갔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구나. 어제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예전 같으면 코 한 번 풀고 넘겼을 일들인데 말이야.”

“회장님 젊었을 때는 코 묻은 아이들이었잖아요. 이런 일 없었을 겁니다.”

“채규야. 정순이를 어떻게 해야 되겠냐.”

“저에게 물으셔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저는 회장님만 생각하겠습니다.”

“네가 키운 아인데 어찌 나보다 매정하냐.”

채규가 막 태선물산에 입사했을 때는 아이들이 한창 자라고 있을 때였다.

재만 혼자 일본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고, 나머지 아이들은 한국의 학교를 다녔다.

그런 아이들에게 과외를 붙이고 운전기사 역할을 수행하며 놀아주기까지 했던 게 채규였다.

지금까지도 결혼하지 않고 진태 곁을 모시고 있었으니, 진태의 자식들이 그가 키워본 유일한 아이들일 것이다.

채규가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제가 회장님을 모실 때 하셨던 말 기억나십니까.”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기억이 나? 너 나 놀리냐?”

“나를 모셔라. 대가는 충분할 거다.”

“헛소리를 했구먼.”

진태도, 채규도 그때를 아스라이 떠올리고 있었다.

“무너져가던 저희 집이 이제는 상류층에 속합니다. 친인척 할 것 없이 모두 다요. 제가 회장님께 받고 있는 돈은 일개 직원이 벌 수 있는 돈이 아니니까요. 비록 제 삶은 회장님을 모시다가 끝나겠지만, 제 가족은 제가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너는 무슨 재미로 살고?”

“아직도 제 생일이면 누이고 동생이고 손편지를 써다 줍니다. 하하. 명절날은 혼자 사는 저희 집에서 모이고요. 그런 재미 아니겠습니까?”

채규를 슬쩍 보니 정말로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 표정은 차갑게 굳었다.

“저는 단 한 번도 가족을 저버린 적 없고, 가족도 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희생했다는 허례 없이도요. 저는 이런 게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이제 나에게 설파하려 드는구나.”

채규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지시에도, 그 지시가 진태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유를 따지지 않고 이행해왔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제 의견을 피력하는 이유는 진태,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 피가 흐른다고 다 같은 자식은 아니지. 결정했다. 서정순 불러와.”

***

진태의 호출을 받고 정순이 형설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형설병원의 건물 위로 간간이 별들이 떠 있었다.

드러난 맨살로 겨울바람이 스쳐와 몸이 추위로 살짝 떨렸지만 눈은 왠지 모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경주와의 일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만약 그 일을 진태가 알았다면 사람을 보내 잡아가지, 이렇게 부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진태와 독대한 지가 벌써 2년 전이었다.

심지어 진태의 호출이 아닌 태선스키를 창업하기 위해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

진태는 늘 독대할 때마다 무언가를 주었다.

어떨 때는 계열사 하나를 해보라고 자금을 던져주든가, 어떨 때는 지분을 조금씩 내어주기도 했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진태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 그만의 방식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독대는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태선호텔을 물려받은 직후에는 진태의 저택을 자주 들락거렸지만, 시간이 흐르고 성과가 줄어들기 시작하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때문에 최근 준만이 진태와 독대했다고 들었을 때는 속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기다려. 서남순. 내가 너보다는 더 인정을 받아낼 거니까.’

정순은 경박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빠른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진태가 머물고 있다는 VIP실로 향했다.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진태 앞에서는 작은 흠집 하나 보이지 않기 위해 몸가짐도 철저히 하고 왔다.

퇴근했던 스타일리스트를 급하게 호출해 단정한 옷과 수수한 화장까지 마친 상태.

자신이 봤을 때도 오늘 화장은 근 1년 사이 가장 잘 먹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옅게 미소를 지으며 진태 앞으로 다가갔는데 진태는 자신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불안감이 커졌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설마…?’

침을 꿀꺽 삼키고 진태 앞에 놓인 간병인 의자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고 했다.

“누가 앉으라 했어.”

몸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에 정순은 마음을 졸였다.

정순이 고개를 들어 본 진태는 자신을 보지도 않고 책을 다음 장으로 넘기고 있었다.

“아버지? 방금 잘못 들은 거죠?”

“채규야.”

진태는 정순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채규를 불렀다.

정순은 자신을 신경 쓰지도 않는 진태를 보며 불안한 마음이 요동쳤다.

옆에 서 있던 채규가 정순에게 MP3를 건넸다.

“이게 뭐죠?”

“들어 보시면 알 겁니다.”

채규의 말에 불안감은 증폭되고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그러나 무엇인지는 까봐야 아는 법이다.

정순은 천천히 재생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 노인네가 뒤져…’

정순이 MP3를 던지자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까지 딸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지만, 그 낯선 음성과 대사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정순의 숨이 가빠지며 허벅지를 짚었다.

“아, 아버지. 이건 그, 제일호텔 아시죠? 거기 회장이 저번에…”

“끝까지 들으셔야죠.”

채규가 정순의 말을 끊으며 MP3를 주어 다시 건넸다.

“뒤 내용이 무엇인 줄 알고 그러십니까.”

“이실장님…?”

자신을 상대할 때 늘 자상하게 대해주었던 채규였다.

그런 채규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있는 것을 처음 본 정순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정순이 가만 서 있자, 채규가 직접 이어폰을 정순의 귀에 꽂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서진태 오늘 죽거나 산송장 된다며!’

뒷 내용을 들을수록 정순은 기함했다.

누가 듣더라도 자신과 경주의 합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애의 목소리….

그래도 눈치는 빨랐는지 곧장 진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회, 회장님….”

진태가 드디어 입을 뗐다.

“아까 들어올 때는 아버지라면서. 왜, 죽이려던 사람한테 차마 아버지라고는 말 못 하겠더냐?”

“그, 그게 아, 아니고….”

진태는 여전히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음 책장으로 넘길 뿐이었다.

“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예요. 누군가 일부러 저와 수애의 목소리를 내서…”

“아까는 제일호텔 얘기를 꺼내더니, 이번에는 흉내를 내었다?”

“회장님!”

진태가 돋보기안경을 한번 치켜올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내일 내부감사 들어갈 거다. 사장이 지 애비를 죽이려고 해서 내쫓는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변명거리는 만들어 놔야지.”

“회장님. 제발….”

정순은 진태가 말한 내부감사가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감사가 아닌, 실수를 만들어내기 위한 감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동만이 태선물산에서 물러날 때 행했던 방법이기도 했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네가 해야 될 건 채규가 설명해 줄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할수록 더 진흙밭에 구른다는 걸 명심해. 쉽게 넘기는 게 좋을 게다. 아비로서 하는 마지막 충고야.”

“....”

태선가로서 제명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진태의 말에 정순은 동공이 풀린 그대로 서 있었다.

진태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정순을 보고 말했다.

“순례가 준다는 건 건들지 않을 터이니, 아사하진 않을 게다. 대신 나 몰래 순례를 만나기라도 하면 그것마저 없어진다는 걸 명심해라.”

진태와는 완전히 반대의 천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 순례였다.

그 흔한 보신탕도 개를 때려잡아 만든다는 것을 듣고는 한 입도 대지 않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순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태가 죽을 뻔했다는 것에 더해 그 범인이 정순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충격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

정순은 저도 모르게 같잖다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회장님, 아니 아버지! 새엄마가 갖고 있는 지분이 얼만데 그거 먹고 떨어지라니요. 태선을 천 등분을 해야 겨우 하나를 받는 게 새엄마가 가진 전부인데….”

정순의 말마따나 순례가 갖고 있는 재산은 태선 전체 그룹 지분의 0.1프로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순례는 집안에 몇 대에 걸쳐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준 진태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진태가 그래도 몫을 챙겨주겠다며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례는 자신이 죽고 모든 지분을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나누겠다고 선언한 바가 있었다.

자식들이 총 6명이었으니 0.1프로의 지분을 또다시 6등분으로 쪼개야 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웬만한 로또 당첨에 버금가는 큰돈이니 두 손 벌려 환영하겠지만, 태선의 한 축을 차지하고 경영권까지 넘봤던 정순에게는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진태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정순을 향해 말했다.

“감히 네가 나를 죽이고, 조카를 죽이려고 하고도 바라는 게 있어? 순례의 지분을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말해라. 내 기꺼이 없애줄 터이니.”

진태라면 순례의 상속내용을 바꾸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정순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독기 가득한 정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수경이는 이 일과 아무 상관 없어요.”

“그 아이도 지금 태선호텔의 이사 아니더냐. 괜한 말 나오기 전에 내보내야지.”

“아버지…. 저희는 그럼 뭐 먹고 살아요. 다 굶어 죽으라는 말과 뭐가 같냐구요.”

“순례 지분만 해도 꽤 될 테고 지금껏 모아둔 돈도 있을 텐데 뭐가 문제냐? 네가 어릴 때부터 곱게 살아서 다른 집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나 보구나.”

진태가 사업이 바빠 신경 쓰진 못했지만 정순은 물론 모든 자식들이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음식만 먹였고 좋은 옷만 입혔으며, 그들의 교육과 심지어 일자리까지 진태가 마련해주었다.

정순은 그제서야 진태에게 받은 것이 없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초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 작은 계열사라도 만족할게요. 아버지. 제가 창업한 곳들 많잖아요. 스포츠 쪽이나 아니면 관광…”

“쫓겨날지, 네 발로 직접 나갈지만 지금 정해라. 단 쫓겨나면 네 손에서 무엇을 앗아갈지 몰라.”

단호한 진태의 말은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순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진태를 설득할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노력과 달리 머리는 점점 새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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