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잘 처리해. 그 노인네가 뒤져야 우리가 살아.’
‘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 거야? 서진태 오늘 죽거나 산송장 된다며!’
‘명심해. 나는 이번 일 절대로 모르는 일이야.’
남순의 하나뿐인 언니, 정순의 목소리.
‘그런데 고모. 사고만 내면 끝난 거 아니에요? 대장암은 왜 터트리라는 거예요?’
‘와. 완전 치밀하네.’
자신이 어릴 때부터 자주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었던 수애.
남순은 더 듣지 못하고 귀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어, 어떻게….”
경주에게 받은 MP3에서 믿기지 못할 말들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경주는 11시 이후에 MP3를 들으라고 했지만, 뒤돌아가는 모습이 괜스레 신경이 쓰여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6시도 되지 않았다.
수화기를 눌러 비서를 호출하고 코트를 걸쳤다.
남순의 다급한 목소리에 비서도 놀랐는지 1분도 되지 않아 나타났다.
“경호팀 싹 다 동원해서 문경주 잡아 오라고 해. 우리 힘만으로 안 되면 아버지 이름 대고 경찰을 동원하든지, 오빠들한테 도움을 청하던지 수단 가리지 말고 무조건 잡아 와.”
“네? 네! 알겠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서 돈까지 보내라고 시켰던 남순이었다.
비서는 당황스러웠지만, 남순의 이렇게까지 싸늘한 표정은 처음 보기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언니… 아니다. 난 회장님 병원으로 갈 거니까 차 대기시키고.”
“네!”
비서가 나가고 남순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
차를 타고 형설병원으로 가며 남순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늘 강인한 모습만을 보여왔던 진태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자신에게 알린 경주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순, 수애는 진태의 피를 이어받은 혈육들.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을 알게 되면 진태가 쓰러지지 않을까.
우선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차에 오르긴 했지만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남순이 고민하는 사이 벌써 형설병원에 도착했는지 기사가 뒷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
남순의 손에는 이어폰이 칭칭 감긴 은색 MP3가 쥐어져 있었다.
남순은 생각했다.
이번 일을 진태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큰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굳게 결심하고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남순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병실 문을 열었다.
“응? 기별도 없이 웬일이냐.”
진태는 침대에 누운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제가 언제 이유가 있어야 아버지를 찾아갔나요.”
“그렇긴 하지.”
“입원은 언제까지 하시는 거예요?”
“입원은 무슨. 이참에 쉬다가 가는 거지. 그보다 무슨 일인데 기죽은 표정을 짓고 있어?”
“....”
남순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진태에게 다가갔다.
한 마디라도 꺼낸다면 울음을 참지 못할 것 같아 침대맡에 앉아 진태를 바라보기만 했다.
진태가 버럭 성질을 냈다.
“영호 그놈 때문이야? 착한 줄로만 알았더니 이놈을 그냥…”
“하하…. 아니에요. 아버지. 그이가 얼마나 착한데요.”
금방이라도 일어설 것 같은 진태의 모습에 남순이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남순은 조금 진정되었는지 숨을 고르게 쉬고는 말했다.
“제가 말하는 것보다 들으시는 게 빠를 것 같네요.”
남순이 진태의 귀에 이어폰을 조심스레 꽂았다.
재생 버튼만 누르면 정순이 어떤 일을 꾸몄는지 진태가 낱낱이 알 수 있을 터였다.
수십 년을 봐 온 언니가 제 아비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남순은 차마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손을 덜덜 떨었다.
진태는 그런 남순을 가만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 직접 들으마.”
진태는 남순의 떨리는 손이 꼭 쥐고 있던 MP3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남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끔찍한 현실을 듣고 있을 진태의 얼굴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그저 소리를 죽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고개를 숙이고 있어.”
평소와 같은 느긋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목소리였다.
남순은 천천히 고개를 진태의 얼굴을 확인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내려가 있는 입꼬리, 사납게 치켜 올라가 있는 눈썹.
늘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내 목숨을 노렸던 놈들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그리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언니가 그런 짓을 벌일 거라고 예상했다고요?”
진태는 말없이 남순을 바라봤다.
남순은 그 침묵이 긍정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썩어버릴 대로 썩었을 진태의 속을 생각하자 다시 한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또 왜 울고 난리인 게야. 내가 우는 거 싫어하는 거 모르냐?”
남순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
어제 수애와 언론사의 관계를 듣고 곧장 영균에게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영균은 따로 이용하고 있는 흥신소가 있을 정도로 이런 일에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오후, 영균은 가장 처음 기사를 냈던 오백일보의 한선귀 기자에게 자백을 받아냈다.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한선귀 기자를 포함해 각종 언론사에 진태와 관련된 정보를 뿌리고 지시했던 것은 수애였다.
확실한 증거가 생겼으니 내가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형설병원의 VIP실에는 예상치 못한 사람이 진태와 함께 있었다.
“고모도 있었네요.”
남순은 고개를 돌린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진태는 그런 남순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 무슨 날이냐? 남순이도 그렇고, 너는 왜 왔어?”
곧장 본론을 꺼내려 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남순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내 속내를 눈치챘는지 진태가 말했다.
“남순이한테 못 할 말은 없다. 말해 보거라.”
남순을 힐끗 바라보고 말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지 않은 사고가 났다는 것과 대장암이라는 오보를 낸 게 수애 누나입니다. 방금 오백일보 기자한테 들은 거고 사실확인까지 끝냈습니다.”
어차피 처리해야 될 일이라면 시간 끌 것 없었다.
게다가 수애가 관여되었다면 정순도 이번 일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태선을 나눠먹을 사람이 한 명 더 줄어드는 것이니 망설일 필요도 없지.
게다가 경주의 목숨도 살려준 판국에 혈육인 수애나 정순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걸리는 게 없으니 그저 행동할 뿐.
놀란 눈빛을 할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진태는 미동도 없이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할아버지?”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뛰어온 게야?”
“예. 그런데 안 놀라십니까?”
“놀라길 바라는 눈치구나.”
“그럴 만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역시 제 예상대로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것 같네요.”
역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보 라인.
심지어 수애가 언론 쪽과 관계되었다는 것을 진태는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시작부터 달랐다.
진태가 코웃음을 침으로써 내 말이 사실임을 알렸다.
진태가 남순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빈이 말대로 알고 있던 사실이야. 네가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남순과 죄책감이라니?
진태의 말을 독해하는 사이 고개를 돌린 남순의 얼굴이 보였다.
번진 화장과 선명한 눈물 자국.
“설마 남순 고모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남순이가 가져온 거다. 너도 들어봐라.”
진태가 건넨 은색 MP3를 받았다.
내가 예상했던 경주, 수애는 물론이고.
“큰고모도 얽혀있었네요.”
정순이 이 사건과 관계가 있을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듣게 된 이 녹음본.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진태가 어제 며느리와 손자들이 자식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오늘은 딸과 손녀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도라면 평범한 사람도 미칠 지경일 것이다.
침묵이 이어지고,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예상외로 남순이었다.
이제 더 울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눈가가 건조했다.
“이 MP3를 주면서 올케가 오늘 밤 11시까지 듣지 말라고 했어. 아마 어딘가로 도망치려는 거겠지?”
남순의 말을 듣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경주가 11시까지 듣지 말라고 해서 11시에 도주한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떠날 준비를 끝내거나 이미 떠난 시간이 그때일 것이다.
“그걸 왜 이제야…”
“사람을 시켰어. 우리 백화점 경호팀들이 전부 나가고 부족하면 사람도 더 쓰라고 했으니까 잡아 올 거야.”
남순이 저렇게까지 얼빠져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심란한 상태에서도 할 일은 끝낸 것 같다.
나는 진태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도망가는 건 제가 못 봅니다.”
진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야지. 넌 네 방식대로 해라. 나는 내 방식대로 하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방종은 수술하실 생각이시죠…?”
“지방종? 그게 뭐예요? 아버지 대장암 아니셨어요?”
남순이 놀란 눈을 하고서 진태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 할아버지 암 걸리신 거 아닙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응…?”
남순이 여전히 의문을 표하고 있었지만 설명이 복잡했다.
대장암도 아닌 지방종이었지만, 진태가 여태까지 입원해있는 이유가 있었다.
오보까지 난 마당에, 진태는 지금 당장 수술을 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의학 수준이 내 전생만 못 한 수준이었다.
최고 수준의 시설을 겸비하고 있긴 했고, 지방종 자체가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진태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괜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방종 중에서도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선종’이 아니었음으로 그냥 놔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지만….
“그게 뭐라고 방치를 해? 안 그래도 그날 바로 수술할 걸 하고 후회 중이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또 호들갑을 떠는구나.”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정말 하실 생각이라면 조심해야 됩니다. 술이나 담배는 다 피하시고요. 그리고 수면시간은…”
“내 알아서 하마.”
“걱정하는 사람도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고모 안 보이세요?”
진태가 남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순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진태가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 그대로 두면 위험할 것만 같아 진태를 보며 말했다.
“우선 얘기는 끝난 것 같으니 고모 데리고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네가 잘 챙겨줘라. 심성이 여린 아이야.”
남순의 나이가 쉰이 넘었는데도 진태 눈에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이는 것 같다.
나가기 전에 진태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
“그리고 정순 고모는 어떻게 할까요.”
“내가 알아서 하마.”
“알겠습니다.”
정순도 이 일에 가담했다는 것에 치가 떨렸지만, 이 모든 일을 주도했던 경주만큼은 아니었다.
진태가 어련히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더 묻지 않았다.
남순을 일으켜 세우고 부축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할아버지. 더 자주 뵈러 오겠습니다.”
진태는 대답 없이 옆에 놓인 책을 펼쳤다.
아주 잠깐,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병실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