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다음 날 경주가 향한 곳은 출국장도, 어디의 한 부두도 아니었다.
그녀는 당도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국내 최초로 지어진 상업호텔이자 한국의 호텔산업 현대화를 이끌었던 태선호텔.
호텔 하나로만 연 매출 1700억 원, 객실 수만 1300실에 아슬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호텔 안에서 가장 높은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곳이었다.
경주가 만나려는 사람은 이곳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VIP실이 즐비한 호텔의 최상층 한편에는 정순의 집무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곤란한 표정의 여직원 한 명이 쩔쩔매고 있었지만 경주는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여직원이 아까 불렀는지, 경호원 한 명이 뛰어와 경주의 앞을 막았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사장님 지시입니다.”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예?”
“국회의원 문경주 모르냐고!”
경주가 양손으로 밀었음에도 경호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네 사장님 올케가 나라고! 알아들었으면 꺼져.”
경호원은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이내 자리를 비켰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가자 정순이 벌떡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경주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정순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전화는 왜 안 받으세요?”
“하, 어이가 없어서. 내가 올케 전화를 꼭 받아야 돼?”
쏘아붙이는 경주의 말 뒤로 경주가 갑작스레 무릎을 꿇었다.
정순은 뜬금없는 행동에 얼굴을 찌푸렸다.
경주가 고개를 들어 정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회장님이 아셨어요. 아가씨가 저 좀 도와주세요.”
정순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곧장 회사 내선 전화기를 들어, 누구든 들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정순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회장님이 아셨다니.”
“말 그대로예요. 회장님이 아셨어요. 전부 다요.”
“회장님이 어떻게 알았다는 건지 설명은 해야 될 거 아니야! 올케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다며.”
“저도 모르겠어요. 어젯밤에 남편한테 직접 들은 얘기예요.”
“나는?”
“네?”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는 아는 거 있냐고.”
경주는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순의 태도를 보며 화가 치밀었지만 겨우 제 감정을 달래고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아직 괜찮아요. 그래서 제가 찾아온 거잖아요.”
정순이 고개를 밑으로 내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 허튼짓 하지 마. 내 이름 벙긋이라도 하는 순간 너, 창호, 창훈이 싹 다 죽을 줄 알아.”
이제 호칭을 부르는 것까지 잊은 정순의 표정은 살벌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진태와 똑같은 차를 브로커에게 웃돈까지 주고 사면서 남아 있던 비자금의 대부분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창호와 창호의 해외도피금을 마련하기 위해선 돈이 더 필요했다.
“제가 그러겠어요? 그러니 한국 빠져나갈 자금만 조금 챙겨주시면….”
“자금은 얼어 죽을. 너랑 연통했다는 증거 남길 일 있니? 쯧, 아니다. 기다려 봐.”
정순이 파우치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책상 서랍 가장 밑에 있는 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꺼낸 돈뭉치 3장을 경주에게 던졌다.
꽤나 뭉툭하긴 했지만 만 원짜리인 것을 보아 어림잡아 1500만 원쯤 되는 것 같았다.
“아가씨…. 장난하시는 거예요? 겨우 이런 돈으로 어떻게 한국을 나가요.”
“내가 너처럼 뒷돈 만지는 줄 아니? 버는 족족 계열사 만드는 데 다 쓰고 그것밖에 없어.”
“...10억. 10억은 주셔야죠. 이건 아니잖아요. 제가 많은 걸 바라는 건가요?”
정순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너한테 대놓고 줄 돈은 없다고. 내 말 안 들었어?”
“하지만….”
“아버지 노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만 기다려. 그 나이에 오래 못 갈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돌아가시고 나면 계열사 하나 줄게.”
“그걸 제가 어떻게 믿어요?”
“계약서라도 써주리? 그리고 너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불안해 죽겠으니까 당장 나가라고.”
경주는 애초에 정순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정순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혹시, 하고 가졌던 기대감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사실, 그녀가 찾아갈 곳은 따로 있었다.
경주는 눈앞에 놓인 푼돈 따위, 관심도 없었지만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우치 안에 넣었다.
그리고 정순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조금은 진정된 정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케. 내가 적당히 챙겨줄 테니까, 좀만 기다리고 버텨 봐. 어려운 거 아니잖아.”
고개를 돌린 경주는 정순을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알겠어요. 아가씨. 약속만 꼭 지켜주세요.”
***
차에 올라탄 경주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경주는 그동안 진태의 자식들의 무시를 받아오며 살아왔다.
태선가의 그 누구도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겨우 행정고시를 통과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집안의 반대에 무릅쓰고 태선가에 입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동만의 아이를 배었다는 것.
동만은 순수한 아이처럼 기뻐했지만, 그의 아버지와 남매들은 그러지 않았다.
늘 싸늘한 시선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 늘 자신을 배려하던 동만의 태도도 기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의 외면을 받고 정치 쪽으로 완전히 시선을 돌렸으나, 정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태선가의 재력을 보고 다가왔던 정치인들은 그녀의 사정을 깨닫고 오히려 그녀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을 대기 시작했던 태선물산 경영이었다.
정치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일들이었지만, 태선물산이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만의 뒤에 숨어 경영에 가담한 경주는 기성복 사업과 케이블TV 사업까지 끌어들였고, 유망한 해외의 건설기업을 인수하는 등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그렇게까지 반대했던 진태도 경주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눈감아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태선물산도 일으키고, 자신의 정치 인생에도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했다.
노정환과의 유착 관계가 발각되며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전까지.
밑바닥인 줄 알았던 삶. 그보다 더 내려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진태를 없애려는 계획을 세웠고 완전히 실패했다.
경주는 앉아 있었으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손에 들려있는 MP3를 더 꽉 쥐었다.
경주가 찾아간 곳은 성황리에 있는 태선백화점이었다.
자연스럽게 VIP용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것을 경비원이 제지했지만, 국회의원 명함을 한 번 보여주니 그대로 통과되었다.
경주가 태선가 사람이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
그렇게 남순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눈앞에 문을 두고서 경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해는 안 가지만 차갑게만 굴던 진태도 남순에게만은 온순한 사람이었다.
남순 또한 진태를 끔찍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 아비를 죽이려던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정순을 찾아간 뒤에, 재만이나 영만에게 갈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런 소식은 진태에게 갖다 바쳐 저들의 성과를 내는 수단일 뿐, 경주 자신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도 남순은 조금 다를 거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늘 자신을 싹싹하게 대하던 모습이 정순과 어찌나 비교되던지….
태선가 사람들은 모두 증오스러웠지만, 그나마 나은 인물이 남순이었다.
남순은 정이 있는 인물이니 자신을 모질게 내치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남순에게 정순이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태선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사실.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는 자에게 인생이 종 치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경주는 정순이 꼭 그런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심을 끝낸 경주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경을 쓴 채 업무를 보고 있던 남순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면서.
반응을 보니 아직 진태가 경주의 일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올케가 왔다고 아까 보고받았는데 늦게 오셨네요.”
“아, 길을 좀 헤맸어요.”
“마중이라도 나갈 걸 그랬어요. 우선 앉으세요.”
남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옮기고 머뭇거리던 경주도 소파에 앉았다.
“올케를 둘이서 본 건 처음 같은데요? 우리 같은 식구끼리 자주 좀 봬요.”
“하하… 그래야죠. 별일은 없으시죠?”
“아버지 쓰러지시고 정신을 빼놓고 있다가 다시 일 시작하려니까 바쁘네요. 올케도 그래서 오신 건가요?”
“네, 뭐. 여전히 걱정되죠.”
“올케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올해 임기 끝났잖아요.”
경주는 올해 4월 국회의원에서 물러났다.
그 흔한 퇴임식 하나 거치지 않고 짐만 챙긴 채로.
남순이 악의적인 의도로 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때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경주가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는 조용히 지내고 있죠.”
남순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긴,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이전처럼은 힘들겠지만 힘내 봐요. 힘든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시고요.”
“저….”
경주가 남순의 눈치를 살피며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 혹시 돈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네?”
같은 태선가 내에서 돈을 빌려달라니.
남순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고개를 기울였다.
“한 10억 원 정도만… 어떻게 안 될까요?”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죠.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경주는 MP3를 보여줄까 하다가 다시 제 품속으로 넣었다.
우선 대가를 약속받는 것이 우선이다.
“일단 돈…”
“드릴게요. 표정 보니까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아버지 말씀처럼 정치하는 데만 쓰지 마시고요.”
“가, 감사합니다.”
남순이 제 비서를 부르고 경주의 계좌로 바로 돈을 입금하라고 지시했다.
비서가 곧장 입금하겠다며 나가고 남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태선가에서 돈을 빌리다니요.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빌리는 게 아니라 그냥 드릴 테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올케도 태선가 사람이에요.”
“네. 명심할게요.”
“그런데 그 정도의 돈이 없으신가요?”
“그… 사정이 있어서요.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
남순이 비서를 다시 호출해 말했다.
“10억 원 더 넣어드려.”
“알겠습니다.”
비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입금하러 나갔다.
남순이 정순을 바라보고 말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받으세요.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요.”
“아가씨…. 정말 감사해요.”
MP3를 넘김으로써 돈을 받으려고 했던 계획과는 달리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어제 동만이 나가고 경주가 연락했던 브로커가 약속했던 시간은 오늘 밤 11시.
그때가 되면 애들을 데리고 중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10억 원이면 어떻게든 생활은 할 수 있을 거고.
“그럼 조심히 가세요.”
“네. 아가씨도 몸 건강히 지내세요.”
돈까지 받았으니 이제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경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몸을 향했다.
나가기만 하면 될 터인데, 몸이 멈춰 섰다.
“아가씨.”
“네. 하실 말씀 남았나요?”
“지금 제가 MP3를 드릴 텐데 거기 녹음본이 들어있어요.”
“네?”
“하나만 약속해주실래요?”
남순은 뜬금없는 경주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지만 우선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주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이어서 말했다.
“밤 11시가 되기 전까지 듣지 마세요. 약속하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