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33화 (133/249)

#133화

“그런데 갑자기 오보가 왜 터졌을까요? 들은 대로라면 한두 군데가 아니던데요.”

예나의 말대로 진태의 사고와 대장암을 터트린 언론사는 규모가 큰 데가 한 곳, 중견급 되는 언론사는 다섯 군데나 되었다.

작은 인터넷 언론사들까지 포함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경주가 한때 국회의원이었다 할지라도 진태와 관련된 일인데 그게 가능할까 싶긴 했다.

“저도 그게 의문이긴 했습니다만 해결되고 있습니다.”

“오늘 일어난 일인데 해결되고 있다고요?”

“네. 그룹 차원에서 나섰거든요.”

“하긴, 태선에서 직접 나섰다면 일도 아니었겠네요. 그래서 오보를 내게 한 주체는 누구였어요?”

“지금은 알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나와 친분이 있는 예나라 할지라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나는 천생 기자였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에서 일하고 있다지만, 태선가의 집안 분쟁은 미국에서도 충분히 대서특필할 만한 소재거리일 것이다.

괜히 태선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만한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수애 씨가 언론사 쪽에 인맥이 상당하다고 들었어요. 한 번 도움을 요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예나 씨가 수애 누나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 말씀 안 드렸나 보네요. 수애 씨와는 몇 년 전에 재벌가 모임에서 만났어요. 수애 씨가 언론 쪽에 관심이 많다고 먼저 다가왔거든요. 지금도 가끔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구요.”

수애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상하게 감이 온다.

전생에서는 수애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을 정도로 정보가 없었다.

지금은 태선호텔의 전무 이사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신경 쓸 가치를 못 느끼던 참이었다.

태선전자나 태선물산은 물론, 태선보험만도 못한 태선호텔에서도 겨우 전무라는 자리에 위치한 인물이다.

나와 경쟁할 거리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니.

마치 내가 태선증권사에서 본부장으로 일했지만, 실상은 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과 비슷했다.

수애 또한 태선가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그제서야 아까 병실에서 보았던 정순이 납득이 갔다.

어딘가 불편하고 초조해 보였던 기색, 진태에게 등을 돌렸을 때 짓던 싸늘한 표정.

경주 혼자 벌인 일이 아니다.

나는 몰랐던 사실.

그러나 과연 진태가 몰랐을까…?

생각을 끝내고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다시 주웠다.

“저는 몰랐던 사실이네요.”

“어? 정말 몰랐어요?”

“저 바쁘신 거 아시잖아요.”

“하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시죠.”

“그러게요. 앞으로 더 신경 써야겠어요.”

이 말은 사실이었다.

내 경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더 위험하게 다가올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내 기억으로, 이번 진태의 살인 미수는 전생에 없던 일이었다.

전생에는 없었던 나의 크고 작은 행동들이 모여 간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무튼 오보였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할아버지께도 잘 전달할게요.”

“네. 한국에 오실 일 있으면 시간 한번 내주세요. 식사라도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강빈 씨 정도의 자산가가 제대로 대접한다니. 괜히 기대되네요.”

“기대하셔도 됩니다.”

예나가 아니었다면 수애, 더 깊숙이 들어간다면 정순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전화를 끊자 아까 들었던 생각이 다시금 찾아왔다.

나야 관심이 없어 몰랐다지만 진태가 수애의 행보를 몰랐을 리 없다.

심지어 예나에게 접근했던 것이 몇 년 전이라면 그 기간이 꽤 길었기에.

창호와 창훈까지 제거하려고 했던 진태가 수애를 가만둘 리는 없고 그렇다면.

“서정순… 서정순이라.”

임기사가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뭐라 하셨습니까?”

“그냥 혼잣말이야.”

진태의 부정(父情)이 생각보다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

서울시 장충동에 위치한 장충더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중 하나라고 불리는 이곳은 보증금만 15억, 월세가 300만 원이 넘어가는 곳이었다.

여타 반듯한 성냥갑 모양의 판상형 아파트들과는 달리 거대한 돔을 연상시키게 하는 건축물이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공간에 한 취객이 정문 앞에 등장했다.

술에 취해 벌건 얼굴은 초췌해 보였고 휘청이는 걸음걸이는 그가 제정신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 손에 든 소주병은 이 공간과 이질적이었다.

젊은 경비원 한 명이 경비실에서 튀어나와 그를 제지했다.

“아이고, 선생님!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큰일 납니다! 돌아가…. 서동만 사장님?”

동만이 초점 없는 눈으로 경비원을 바라보자, 경비원은 즉각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평소와 다르셔서 몰라뵀습니다.”

동만이 누구던가.

이 아파트를 시공한 태선건설의 지주회사 태선물산의 사장이자 장충더힐 안에서도 최상층 전체를 제 소유로 갖고 있던 인물이 바로 동만이다.

물론 이제 과거의 일이었지만 한낱 경비원이 알 만한 사실은 아니었다.

동만은 하얗게 질려 있는 경비원의 어깨를 두드리고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입구로 들어갔다.

과호흡으로 쓰러졌다는 것을 의사에게 들은 뒤, 동만은 동네 슈퍼에 들러 소주를 한 병 샀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드라마에서 한 인물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주를 입에 들이부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의 처지보다 더한 상황이었나, 떠올려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슈퍼의 평상에 앉아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동네 슈퍼에 간 것도, 소주라는 것을 마셔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병, 두 병… 소주병이 쌓여가고 동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퍼에서 소주 한 병을 더 산 채로 택시를 불러 향한 곳은 가족이 있는 집.

“가족? 흐흐.”

택시에 몸을 기댄 채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상상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 허리만 한 남자아이 둘이 자신을 반기고, 방에서 나와 미소를 짓던 경주를.

모두 이십 년도 지난 일들이었다.

지금은….

동만은 더 생각하기를 멈췄다.

지금 일어난 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이 닿는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소주병을 든 채로 문 앞에 도착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순간이 있었을까.

늘 별생각 없이 들어갔던 집 문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지도, 대답도 들리지 않자 다시 한번 눌렀다.

천천히 움직이던 손가락은 어느새 강박적으로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고, 소음이 울렸다.

문이 벌컥 열리며 그렇게도 보고 싶던 얼굴이 나타났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술 먹고 비밀번호라도 잊었어?”

“경주야….”

동만이 쓰러지듯 경주의 품으로 안겼다.

경주는 질색하며 동만을 밀쳤다.

“왜 이래. 징그럽게. 술 먹고 들어왔으면 씻고 잠이나 자.”

“왜 그랬어.”

“뭐?”

“아버지. 왜 그랬냐고.”

경주가 일순 얼굴을 굳힌 채로 동만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

“됐다. 내일 술 깨고 얘기해.”

몸을 뒤돈 채 멀어져가는 경주를 보며 동만이 소리쳤다.

“무시하지 마!”

경주가 발걸음을 멈췄고 창호와 창훈이 놀란 얼굴을 한 채 등장했다.

동만이 손에 들고 있던 빈 소주병을 떨어지며 파열음이 소음을 더했다.

“서창훈, 서창호. 너네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창호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굳어 있었고, 창훈이 순식간에 동만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뭘 했다고요.”

경주가 바싹 말라 있던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말했다.

“그, 그래. 여보. 우리가 뭘 어쨌다는 거야?”

동만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물이 흐르고 있는 얼굴로 하고 말했다.

“그렇게 자상한 목소리는 오랜만이네. 당신도 찔리기는 하나 보지?”

“아, 좀! 왜 이래. 당신. 응?”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 했잖아. 당신이 사람이야? 거기 서 있는 서창호! 서창훈! 너네가 사람이냐고.”

창호가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경주가 떨리는 입술 한쪽을 질끈 깨물고 칼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여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아버지를 죽이다니. 그게 말이 돼?”

“천하의 서진태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저질렀어!”

“무, 무슨. 회장님이 알고 계신다고?”

동만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는 제 발에 소주 파편이 박힌 지도 모른 채 동만의 옷을 잡고 흔들었다.

“그, 그럼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창호는? 창훈이는? 말 좀 해봐! 응?”

동만은 더 이상 할 말도 없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떨군 시선에서 경주의 발에서 새어 나오는 선홍색 피가 보였다.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동만을 누구도 잡지 않았다.

방에서 나온 동만의 손에 들린 것은 응급키트와 의자였다.

동만은 멍하니 현관 앞에 서 있는 경주를 들고 왔던 작은 의자에 앉혔다.

경주의 발을 한 손에 잡자 경주가 발을 빼며 악에 받친 듯 소리 질렀다.

“지금 죽게 생겼는데 이까짓 게 무슨 상관이야!”

동만은 말없이 경주의 발을 다시 한 손에 쥐고 피가 새어 나오고 있는 파편을 빼냈다.

술에 취한 것이 마치 연기였던 것처럼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경주는 고통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동만을 말리지는 않았다.

언젠가 동만의 저런 자상한 모습에 한 번쯤 설렜던 것이 기억났다.

경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진짜 끝이야….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동만은 알고 있었다.

말없이 새어 나오는 피를 지혈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동만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경주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주야. 너 도망가라.”

동만이 일어나서 늘 재킷 한쪽에 넣고 다니던 손수건을 꺼내 경주의 눈가를 닦았다.

“비자금 모아둔 거 남아 있지? 내가 아버지 시선 돌려볼 테니까 그 돈 가지고 어디로든 떠나.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그런다고 다 끝나? 애들은, 애들은 어쩌고.”

“지금 그게 중요해? 일단 살아야 될 거 아니야. 내일 날 밝으면 애들 데리고 곧장 떠나.”

“당신 말 듣고 잘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이번에도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

눈은 축 처졌지만 입가에 미소를 그린 동만이 말했다.

“한 번이라도 들어준 적은 있고? 이번 한 번만 들어줘라.”

동만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서창훈, 서창호. 못난 부모들이어서 미안하다. 그래도 똑바로 살아가면 안 되겠냐?”

창호는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창훈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경주는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때 동만이 문을 열었다.

경주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디가?”

“그냥. 산책.”

산책.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그 말이 경주가 동만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