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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32화 (132/249)

#132화

“경주 고모까지 연관되어 있으면 창호 형도 이번 일에 가담했을 겁니다.”

동만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진태를 보며 말했다.

동만은 정신이 나갔는지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았고, 진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증거는?”

“창훈이 형이 일하는 병원뿐만 아니라 집에서 온다 한들 기본 한 시간이 넘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빨리 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됩니다. 창호 형도 그때 같이 왔으니 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셋이 작당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곧장 왔다?”

“예.”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고?”

마지막 말에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진태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건조한 표정으로 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만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올려 진태를 보았다.

“아, 아버지….”

그러고는 바닥을 기어가 진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말씀하신 대로 이혼하고, 경주와는 다신 보지 않겠습니다. 제가 잘 말할 터이니…”

“아직도 제 가족을 지키려는 게냐?”

“아버지께 받은 모든 걸 내려놓겠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제가 잘 말할게요. 부디…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으면 경주와 자식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제 목을 노리려던 놈들을 진태가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진태가 여느 때보다 싸늘한 시선으로 동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연놈들을 죽여야 내 속이 풀릴 것 같다.”

“아버지! 뭐든, 뭐든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요!”

제 몸에 있는 물은 다 토해낼 심산인 듯, 동만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동만이 이번 일과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정말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만약 내게 아내와 자식이 있다 한들, 저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빌 수 있을까.

저런 아버지와 남편을 두고 이따위 짓을 벌인 경주네 가족에게 치가 떨렸다.

한평생 자식들과 담을 쌓으며 사업만을 바라보던 사람이 진태였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고개를 돌려 진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길래 눈물이라도 흘릴까 싶었지만,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진태는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동만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기라도 하는 걸까.

동만은 숨까지 헐떡거리며 진태에게 손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빌었고, 나는 그 모습을 더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말 없는 진태를 잠시 바라보다가 병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 나와 있었는지, 채규도 병실 밖에 있었다.

이제 병실 안에는 늘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 두 명과, 진태와 동만밖에 남지 않았다.

“이실장님…. 할아버지 괜찮겠죠?”

“뭐가 말입니까?”

“자식…은 아니지만 며느리와 손주들이 작당하고 죽이려 든 거잖아요.”

“이 정도 일로 무너질 분이 아닙니다. 강빈 군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람인데 모르는 일이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채규는 아무 걱정 없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런 믿음을 주는 일조차 채규가 맡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병실 문이 발칵 열리며 경호원 한 명이 동만을 들쳐메고 나왔다.

동만의 풍채도 상당했기에, 경호원의 근력에 놀란 것도 잠시, 동만이 눈에 들어왔다.

동만은 숨을 꺼억꺼억 내쉬며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안에서 나온 다른 경호원 한 명이 말했다.

“과호흡이 온 것 같습니다. 병원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괜찮을 겁니다.”

대체 빌면서 얼마나 울었기에 과호흡까지 온단 말인가.

그놈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울어줄 가치가 있을까?

나는 진태가 걱정되어 열려있는 문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진태는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서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진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말했다.

“고모랑 사촌형들. 죽을까요?”

채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결정에 달렸죠.”

사람의 목숨마저 제 손에 쥐는 재벌가에 대한 혐오가 오랜만에 밀려왔다.

납득은 갔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누군들 안 죽이고 싶어 할까.

그러나 나만은, 나만큼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런 일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면, 나를 죽였던 서범준과 다를 바 없기에.

발걸음을 떼어 진태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곁에 다가갔음에도 진태는 초점을 잃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응?”

진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조금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꼼짝도 못 하고 죽을 뻔했다. 고맙다.”

“예. 제가 한 말 덕분에 차를 타지 않으셨죠. 제가 할아버지 목숨을 살린 겁니다. 저한테 빚지신 거예요.”

“녀석. 무슨 말을 그렇게…”

“대가는 지금 받겠습니다.”

“뭐?”

“문경주랑 서창호, 서창훈. 이 세 명의 목숨값으로요.”

갑자기 이상한 바람이라도 불었나, 내 입이 제멋대로 나불대고 있었다.

고작 이따위 신파극을 찍으려고 그동안 피땀 흘려가며 노력했던 것이 아닌데.

진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세 사람의 목숨. 거두지 말아주세요.”

“그건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할아버지!”

겉으론 차갑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늘 따뜻한 시선을 보내왔던 진태였다.

그런 진태가 지금, 처음으로 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까지 화를 내고 있었다.

“너까지 죽이려던 연놈들이야. 대체 뭐가 아쉽다고 네가 나서!”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을 식히기 위해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자 지금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까지 죽이려 했다라.

“저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뭐?”

“그들이 언젠가 또다시 저를 죽이려 들 것 같아서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진태 스스로도 제 목숨이 몇 년 안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 손에 피를 묻히려는 이유는 그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자 후계자로 점찍고 있는 사람인 내가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진태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저를 위한다면 그들을 죽이지는 마십시오.”

“....”

“그 사람들한테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빼앗는다면 힘없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런 일까지 벌인 눈먼 놈들이다.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야. 너한테 지장이 안 갈 것 같아?”

“안 갑니다. 확신해요. 저 그만큼 힘 있고, 더 쌓아 올릴 겁니다. 오히려 이런 일로 할아버지께서 쌓아 올린 태선의 명예가 실추될 것 같아 그래요. 할아버지께서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그 견고한 태선이 흔들릴 것 같아서 그런다고요.”

진태가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칼 든 놈을 어설프게 휘두른다고 대충 달래 보내면 그 칼 잘 갈아서 언젠간 네 목을 다시 찌르러 올 게다.”

“걱정 마세요. 그런 일 없도록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게냐?”

“예.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진태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놈한테 홀렸을꼬.”

“원래 닮은 사람한테 끌리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를 보면서 젊을 때가 생각난다고 하신 적 있지 않습니까.”

“내가 너같이 못생겼는 줄 알아?”

“사진 보니까 제가 훨씬 낫던데요.”

진태가 나를 보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피곤했다.

피로함에 쓰러지듯 시트에 몸을 기댔다.

정신은 이미 한계에 달한 듯 곧장 잠들라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20대의 젊고 건강한 몸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아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감히 자신을 죽이려 한 가족에 대한 배신감과 더불어, 자신이 인정한 손자를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 잃을 뻔한 진태.

나에게 가감 없이 제 마음을 보여주는 진태를 보며 내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왔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진태의 허락은 떨어졌다.

이제 더욱더 빠르게 태선의 자리에 오르려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태선의 흩어진 지분들을 모으고, 그 정상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

물론 내가 정상의 자리에 앉을 때를 위해 태선이 세계의 정상에 서 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문경주.

진태에겐 내가 그녀를 용서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용서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목숨을 빼앗지 않는 것일 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처절히 짓밟을 생각이었다.

진태의 말마따나, 언젠가 다시 내 목숨을 노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지금은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고.

“임기사 조금만 천천히 가지.”

“예. 알겠습니다.”

생각을 비우고 눈을 감고 있는데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예 배터리를 꺼내야지 생각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는 미국에 있을 예나였다.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먼저 전화할 일은 없을 텐데….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예나 씨. 무슨…”

“강빈 씨!”

귀를 찌르는 고성에 휴대폰을 잠깐 멀리 대었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사고가 나셨다면서요? 몸은 괜찮아요?”

“하…. 그거 오보입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아, 그래서 기사가 내려갔나 보네요.”

오보여서라기보다는 진태의 힘으로 막은 거긴 하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만큼 피곤했으니까.

예나는 머쓱했는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걱정 많이 하셨어요. 기사 보시고 서 회장님과 연락이 안 된다고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네요. 그런데 서회장님은 괜찮으세요? 기사는 내려갔지만 대장암으로 곧 돌아가신다는 찌라시가….”

“예나 씨도 기자인데 찌라시를 믿습니까? 회장님 아주 정정하십니다.”

“강빈 씨가 말하는 거 들으니까 확실히 알겠네요. 그런데 찌라시는 계속 돌고, 사람들은 지금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아요. 회장님 관련된 오보가 나오고 기사가 내려가기까지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태선그룹 전체 주가가 평균 1프로 정도가 내려갔던데요.”

1프로.

단 1프로지만, 어마어마한 금액의 손실이 일어나고 있었다.

진태의 사고와 대장암 소식으로 인한 일시적인 하락이었지만, 정정 기사를 낸다고 한들 복구하기는 쉽지 않다.

경주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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