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경주는 멍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계획이 완벽한 줄로만 알았다.
같은 차종에 같은 번호판을 단 차까지 준비했으며, 혹시라도 일이 반만 성공할 경우를 대비해 진태가 대장암을 앓고 있다는 기사까지 냈으니까.
그러나 진태는 불구는커녕 폭발사고에 전혀 휘말리지 않았고, 기사는 내보낸 지 2시간도 안 지나서 모조리 내려갔다.
심지어 종이신문으로는 나오지도 않았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심혈을 기울여 계획했던 일이지만 모든 것이 무산된 것이다.
경주는 그제야 자신이 건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서진태.
대한민국 재계 1위이자 정재계 인사 중 그의 손을 안 거쳤다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 빠져나갈 계책을 세우긴 했지만, 확실한 것은 두 번 다시 태선가에 재입성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경주는 품에서 꺼낸 MP3를 손에 꼭 쥐었다.
***
자식들이 모두 병실을 떠나고 늦은 저녁, 채규가 병실로 들어왔다.
안에 든 정보가 금싸라기보다 귀한 수첩을 한 손에 든 채.
“그날 건강검진을 진행했던 담당의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길래 취조실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전 CCTV가 통째로 누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게 대체 언제 적 건데 이제 안 게야? 태선병원 경호팀은 일 안 해? 싹 다 갈아엎든가 해야지. 이것들을.”
“그게…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사라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이면 기사 터지고?”
“예. 일이 잘못된 걸 알고 증거가 될만한 걸 빼돌린 모양입니다. 서부경찰서에 연락 돌렸으니 곧 수사 들어갈 겁니다.”
“보나 마나 창훈이 그놈 짓이겠지. 그놈은 일단 건드리지 마. 엮여 있는 놈들 쳐낼 거니까.”
일반인도 아니고, 의사 생활만 10년을 넘게 해 온 창훈이 치료하지 않아도 되는 병과 목숨이 위태로운 병을 헷갈렸을 순 없다.
진태는 자신이 폭발사고를 당하고 대장암을 앓고 있다고 오보를 낸 범인이 창훈임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를 지탱해온 직감이 창훈 혼자 벌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네. 창훈 군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건 저와 회장님, 그리고 강빈 군밖에 모르는 사실입니다. 저희 쪽 정보라인 싹 다 풀었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래. 나가 봐.”
채규는 나가라는 진태의 말에도 가만 서 있다가 입을 뗐다.
“회장님. 제아무리 핏줄이라도 이런 일을 벌인 이상…”
“알고 있어. 어떤 자식이라도 흘려보낼 생각 없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제 자식 관리 못 한 내 잘못이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회장님 자제분들 교육은 제가 담당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게 부족한 저의 잘못입니다.”
진태는 고개를 돌려 채규를 보면서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똑바로 처리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강빈이도 다시 불러.”
“알겠습니다. 혹시 부르시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놈 생각도 들어봐야지. 같이 겪은 일 아니냐.”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채규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아마 오늘 밤, 진태를 배신한 놈을 잡기 위해 잘 시간도 없을 것이다.
진태는 병원 침대에 누워 차갑게 천장을 응시했다.
“문경주는 확실하게 엮여 있을 거고. 동만… 서동만이… 그런 일을 벌였다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멍청한 표정의 제 아들, 서동만.
경주야 이미 자신을 물 먹이려고 한 전적이 있었고, 이번 일과 관련해서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었지만, 동만은 달랐다.
아무리 못난 놈이라 한들, 제 핏줄이 자신의 목을 노렸다고 생각되자 진태는 목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현재로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숨이 막혀왔다.
그때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동만이 나타났다.
“아버지!”
진태의 앞까지 순식간에 달려온 동만은 진태가 멀쩡한 것을 보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태는 동만을 내려다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인 게야, 생쇼를 하는 게야?”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됐다. 여기엔 웬일이냐.”
진태는 아무리 봐도 동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은, 아버지가 다쳤다기에 서둘러서 오는 길입니다. 무슨 폭발사고에 휘말렸다면서요! 기사는 또 뭡니까! 예?”
뒷북도 제대로 된 뒷북을 치자 진태는 골이 당기는 것을 느끼며 뒤통수를 짚었다.
이런 놈을 두고 의심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래. 일 벌인 놈들도 멍청하지만, 너는 더한 놈이었어.”
“일을 벌였다니요? 그보다 몸은 괜찮은 거 맞습니까?”
진태가 동만을 향해 베개를 힘껏 던지며 말했다.
동만이 베개를 받으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래! 이놈아! 허리만 살짝 삐끗했을 뿐이야.”
동만은 머리를 부딪쳤는지 머리를 문지르면서도 실없는 웃음을 내었다.
“허허. 맞아보니까 정정하시다는 걸 알겠네요. 그럼 대장암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태는 동만을 지그시 바라보며 사실대로 말해도 될지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결정을 내렸다.
“저기 앉아서 기다려라.”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이제 곧 설명해 줄 놈이 올 거야.”
진태의 말에 동만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진태의 말대로 병실 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
채규를 통해 문자가 왔다.
‘회장님 지시입니다. 지금 바로 형설병원 VIP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하….”
이제 막 태선물산에 도착해 밀린 일들을 처리하려던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태와의 일정으로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그러나 진태의 지시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오늘 일은 글러 먹었네. 임기사. 다시 형설병원으로 가 줘.”
“예? 아까 갔던 병원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회장님 지시야. 최대한 빠르게 가지.”
“아, 알겠습니다!”
진태의 지시라는 것을 들은 임기사가 허리를 곧추 펴며 액셀을 밟았다.
가던 길이어서 그런지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병실에 도착했다.
병실의 도착하자 뒤늦은 손님이 와 있었다.
“큰아버지가 와 계신 줄은 몰랐네요.”
“그, 그래. 오랜만이다.”
동만이 나를 보고 놀랐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동만을 그대로 지나쳐 진태에게 다가갔다.
“연락받고 곧장 출발한 게냐?”
“누구 말씀이신데 당연하죠.”
“녀석.”
진태가 나를 보며 옅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동만이한테 말하려고 한다.”
진태의 말을 듣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동만을 바라보았다.
동만은 여전히 긴장한 기색으로 자리에 가만 앉아 있었다.
진태에게 몸을 내밀어 속삭이듯 말했다.
“할아버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창훈이 형이 가담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둘째 큰아버지에게 이야기하다니요.”
“저놈은 그럴 깜냥이 안 돼. 너도 느끼고 있지 않느냐.”
진태의 말대로 나 또한 동만이 이번 일에 관계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동만과 연결되어 있는 경주였다.
지금 진태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제 아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진태의 속내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진태는 아마 동만을 확실히 내치려는 것이다.
자식을 저버리는 일이기에 납득은 시켜주고 싶은 거겠지.
진태가 이 정도까지 말했으니 나도 어쩔 겨를이 없었다.
낮게 한숨을 내쉬고 동만에게 다가갔다.
“큰아버지.”
“응?”
“오늘 창훈이 형의 사주로 할아버지가 죽을 뻔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동만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덤덤하게 동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까지 휘말려서 죽을 뻔했고요.”
“차, 창훈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너 창훈이가 무슨 일 하는지 몰라서 그런 거야? 응?”
“성형외과에서 일하고 있다는 거 잘 알죠. 그리고 그 직위를 이용해서 할아버지가 대장암을 앓는다는 오보까지 냈고요.”
“오보라니, 아버지가 대장암이 아니시란 거냐?”
“예. 할아버지가 판정받은 것은 지방종입니다.”
“지방종?”
말끝을 올림으로써 자신은 그것이 뭔지 모른다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동만에게 지방종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설명을 끝내자 동만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방종은 양성 종양, 즉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고의적으로 할아버지의 질병이 대장암이라고, 마치 목숨을 위태롭다는 듯이 기사를 터트렸더군요.”
“아버지가 정정하시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너 지금 창훈이 모함하려고 일 꾸미는 거 아니냐?”
되레 나를 의심하는 동만에게 주먹이 날아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동만은 멍청한 것도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네. 그래서 사고를 내고 어차피 암 걸려 죽음 목숨이었다, 죽지 못해도 암에 걸렸으니 곧 죽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차에 수작 부리고 대장암이라는 기사까지 쏟아낸 거고요.”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실장님!”
내가 소리치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채규가 들어왔다.
병실에 들어오기 전 마주쳤는데, 모든 자료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채규는 얘기를 다 듣고 있던 모양인지, 곧장 동만에게 서류 더미를 넘겼다.
채규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통화목록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오후 12시 37분경 창호 군이 태선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조호현 전문의와 통화한 내역이죠.”
“그,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러시는 겁니까?”
“상관이 있죠. 서회장님의 건강검진 자료를 빼돌린 게 이 사람이거든요.”
“그걸…”
“통화목록 조회 이후에 취조했습니다. 결국 자백까지 했고요.”
CCTV가 분실되었다는 것까지는 들었는데, 통화목록을 통해 잡아낼 줄은 몰랐다.
일을 벌였던 창훈도 태선의 정보력이 이 정도까지인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채규가 이어서 말했다.
“확인하셨으면 다음 장으로 넘기시죠.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동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넘겼다.
서류에 있는 것은 프린트된 사진들이었다.
가장 위에 있는 사진은 진태의 원래 차, BMW 2000 ‘Forever’에디션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장에선 조선족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손에 수갑을 찬 채 찍혀 있었다.
나도 처음 보는 사진이었기에 채규를 바라보자 설명해주었다.
“인천의 브로커들을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화물선에 실리기 직전에 말이죠. 자동차를 팔았다던 조선족도 근처에서 발견해 경찰에 넘긴 상태고, 그자도 자백했습니다.”
“자백이라면…?”
“네. 자신에게 같은 차종을 구매하게 하고 차를 바꿔치기하도록 사주한 게 문경주 의원이라더군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들.
동만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쇠를 긁는 듯한 괴성을 질렀다.
“으아악!”
잠자코 누워서 듣고만 있던 진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으론 비정해 보이고, 다르게 보면 비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동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