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형설병원의 VIP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태선가 사람은 경주였다.
창호와 창훈을 대동한 채 문을 연 경주는 멀쩡히 누워있는 진태를 보고는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딘가 얼이 빠져 보이는 표정을 짓고는 겨우 말을 이었다.
“아, 아버님. 몸은 괜찮은 거, 끅. 죠? 다친 곳은 없구요?”
진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빨리 왔구나.”
“기사를 보고, 끅. 창훈이가 수소문을 했어요. 봤을 때는 어찌나, 끅. 놀랐는지…. 괜찮으신 거 맞죠?”
경주가 말하는 내내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눈이 삐었어? 멀쩡하다.”
퉁명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진태는 경주를 내쫓지 않았다.
병문안을 온 것이 고마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들이 오기 전 나에게 했던 말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너 빼고 모두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 게다.’
게다가 경주는 진태를 속인 전적이 있기 때문에 유력 용의자 중 한 명이었다.
나는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경주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창호와 창훈도 울상을 지으며 진태에게 다가갔다.
창훈이 연기라도 하는 듯, 어색한 톤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사고 낸 놈은 찾으셨나요?”
“네놈이 알아서 뭐 하게? 그보다 동만이는 어디 가고 네놈들만 온 거야?”
창훈이 당황하자 경주가 나섰다.
“마침 아이들하고 저만 있어서 곧장 달려왔죠. 제 남편한테 연락하는 것도 깜빡할 정도로 급하게 왔어요. 기사에는 차가 못 쓸 정도로 폭발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딸꾹질은 멈췄지만 경주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나가 보여서, 정말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진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차에 안 탔어. 어떤 상놈의 자식이 낸 기산지는 몰라도 곧 내려갈 게다. 그 기사를 사주한 놈은 지금쯤 똥줄 타고 있겠지.”
일순 경주의 표정이 굳었다가 풀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확신할 때가 아니었다.
두 시간쯤 흘렀을까, 그다음으로 도착한 사람은 재만이었다.
소식을 듣고 태선전자에서 바로 출발해야 겨우 도착할 시간이다.
재만은 내 얼굴을 보고는 대놓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설마…. 아니다.”
재만이 나를 보며 이를 갈았지만 지금 급한 게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시선을 돌리고 진태에게 다가갔다.
재만은 침대에 양손을 짚은 채 말했다.
“아버지! 대장암이라뇨,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알고 계셨던 거예요?”
“나인들 그런 게 몸에 있을 줄 알았겠냐. 나도 오늘 안 사실이다.”
진태는 말을 하고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재만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했다.
“모르고 계셨다고요? 태선 병원 이놈들이…. 제가 당장 전화해서 엄포를 놓겠습니다. 일단 해외 쪽으로 전문의 알아보고…. 아니다. 우선 병원부터 옮기시죠.”
“됐다. 형설병원 괜찮아. 내 후원받은 지가 20년이 다 되어 가는 곳이야. 신경 쓰지 마라.”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아버지가 혹시라도 갑자기 돌아가시면…”
“왜. 네 재산이 다른 자식 입에 들어갈까 봐?”
“아버지!”
내가 봤을 때 정곡을 정확히 찌른 말이었지만, 재만은 이를 부정하듯 역정을 내었다.
그러고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제 아비도 안 왔는데 저놈은 어떻게 벌써 여기 와 있는 겁니까?”
“여기가 인천인데 왜겠어? 뻔한 거 아니냐.”
태연하게 말하는 진태와 상반되게 재만의 얼굴은 빠르게 무너졌다.
“설마… 아니죠?”
진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별장에 다녀왔다. 아, 그리고 오늘부로 별장은 강빈이 것이 되었어. 그곳에 볼일이 있으면 강빈이를 통하거라.”
짐작이 사실임을 확인시키자 재만은 대번에 침대를 짚으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아직 서른도 안 된 애새끼가 그걸 어떻게 써먹겠습니까! 재고해주십시오.”
호오, 어떻게 써먹는가라.
땅에 묻혀 있는 게 쓸 만한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내 결정이다. 그리고 지금 태선에 누가 이득이 되고 있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냐.”
태선 전자가 올 한 해 벌어들인 수익보다 내 개인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더 많다.
게다가 진태의 도움으로 지출이 줄긴 했지만, 한일월드컵의 메인스폰서로 태선이 발탁되기까지 내가 쓴 돈만 수천억 원이다.
성과로 따지면 재만도 내 비교 대상이 안 된다.
재만의 뒤에 서 있던 범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던 중 문이 열리며 준만이 들어왔다.
급박하게 진태를 찾던 다른 자식들과 다르게 준만은 평소처럼 걸어오더니 진태 앞에 섰다.
준만이 무덤덤한 얼굴로 진태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암이시라면서요.”
“그래. 오늘만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러게 평소에 건강 관리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너 말하는 꼬라지가 그게 뭐냐?”
“자식들은 뒷전에 두고 일만 해오니까 건강이 무너질 때까지 모르셨던 것 아닙니까.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예?”
어느새 준만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진태도 준만의 얼굴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잠자코 바라만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진태가 위독하다 해도, 준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남매들에게 천대받던 자신을 방치하고, 늘 짐덩이처럼 바라본 사람이 진태니까.
그러나 제힘으로 태선물산 부사장 자리에 오른 뒤부터 진태와 터놓고 얘기하는 시간이 생겼고, 저번에는 진태와 단둘이 긴 시간을 보내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내가 준만을 보며 조금이나마 부정을 느꼈던 것처럼, 준만도 변화가 있었던 걸까.
진태의 몸에 암이 생겼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여기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보다 재만도 지금 당장 진태가 죽는다면 좋을 것 하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범인은 아닐 거고.
남은 사람은….
***
영만과 정순까지 도착하고, 마지막으로 온 사람은 남순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순이 한달음에 진태에게 달려갔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눈에서부터 번진 화장이 턱 끝까지 검은 줄을 그리고 있었다.
남순이 진태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어대는 통에, 진정시키고 격려하는 것은 환자인 진태였다.
“괜찮다. 다 괜찮아. 그만 울거라.”
막내딸에게는 진태도 어쩔 수 없는지 자상한 모습이었다.
환자복에 화장이 묻어나는 것도 모르고 남순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벌써 가시…면 안 돼요.”
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는 울음 때문에 한 번 말을 멈추곤 이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만 때보다도 더한 죄책감이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사실 남순은 누가 봐도 허튼짓을 할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남순은 진태에게 이쁨을 받고 있었고, 이끌고 있는 태선백화점을 비롯한 계열사들도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일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처음 이 병실에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정순이 신경 쓰였다.
진태 앞에서는 형식적인 말들을 내뱉으며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몸을 돌렸을 때 보았던 싸늘한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남순은 어느새 눈물을 멎고 화장이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VIP실 내부에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진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분위기는 금방 가라앉았다.
혈육들의 따가운 시선이 가끔 나에게 꽂혔지만, 진태까지 있는 자리여서 그런지 오래가지 않았다.
정적을 깬 것은 창훈이었다.
창훈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진태에게 다가가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회장님. 지방종이시라면서요? 제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쾌차하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잠시만, 지방종이라고?
거슬리는 단어가 들린 가운데 창훈이 말을 이었다.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대장 전문의로 일하는 선배가 한 명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부를 테니 치료받으시죠. 제가 직접 미국으로 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창훈의 연신 떠들어대는 말속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진태가 건강검진에서 판정받은 결과는 지방종이었지만, 혈육들 중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터였다.
일부러 그걸 노리고 숨기고 있었는데, 설마 정말 걸려드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다른 혈육들 중 이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나야 검사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던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지방종이나 대장암이나 같은 병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거나.
그러나 긴 시간 차례대로 절차를 밟아오며 의사 자리에 오른 창훈이 착각할 리가 없다.
창훈은 의사다.
지방종과 종양을 헷갈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검진 결과를 알아내고 지방종을 대장암으로 기사를 내보내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경주네 가족이 그렇게 빨리 형설병원에 도착한 것도 말이 안 됐다.
심지어 동만을 빼놓고 먼저 오다니.
우연의 일치로 경주네 가족이 한곳에 모여 있다가 소식을 듣고 가장 빠르게 출발했다 해도 시간이 맞지 않는다.
경주네 가족이 살고 있는 장충동에서 인천에 있는 형설병원까지 차가 안 막힌다는 가정하에 아무리 빨리 밟아도 1시간은 넘게 걸린다.
그런데 창훈과 창호까지 데리고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기사가 터지고 1시간도 안 지났을 때였다.
세 사람의 얼굴을 차례대로 살폈다.
서창훈, 서창호 그리고 문경주.
세 사람 모두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진태도 스스로가 놓은 덫이기에 창훈이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에 관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심증이 확실하지만 물증이 없으니 확실하게 보내버릴 생각일까.
진태는 창훈에게 네 인맥 따위 필요 없다며 성을 내긴 했지만, 다른 얘기는 더 하지 않았다.
***
저녁 시간이 넘어가자 진태는 쉬고 싶다며 자식들을 모두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정순을 밖으로 나와서 차에 타고 나서야 참고 있던 노성을 터트렸다.
노성과 함께 정순은 있는 힘을 다해 양 주먹으로 차 내부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비서 겸 운전기사 역할을 수행하는 남자는 차 밖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차창이 내려가며 정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 잠깐 어디 갔다 와. 내가 오라고 할 때 재깍 튀어오고.”
“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자리가 불편했던 남자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이윽고 어둠 사이에서 나타난 인물은 경주였다.
화가 잔뜩 오른 자신과 달리 태연해 보이는 모습에 정순은 소리를 질렀다.
“야! 빨리 안 튀어와?”
정순의 말에도 경주는 제 걸음걸이를 끝까지 유지하며 차에 탔다.
정순이 경주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 거야? 서진태 오늘 죽거나 불에 타서 산송장 된다며!”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차명으로 한정판 차 산다고 얼마를 쓴지 아세요?”
“뭐, 뭐? 빌지는 못할망정…”
“아니, 수애한테나 일 똑바로 시키세요. 기사가 뜬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기사가 내려가요?”
정순은 짜증이 치밀었다.
일이 진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빌빌거리던 경주가, 일이 실패하자 뻔뻔하게 구는 이 태도에.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이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순간 관계를 끊을 생각이었지만, 자신까지 붙잡고 벼랑에 떨어질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정순이 한쪽 손을 들어 경주의 뺨을 갈기려 했지만 경주가 팔목을 잡아챘다.
이를 악문 채 정순이 말했다.
“얘 봐라? 너 미쳤니!”
“아가씨, 저도 한때 태선가 사람이었고, 국회의원이었어요. 제가 왜 맞아야 해요?”
“뭐? 너 설마 나 끌고 늘어지려고 이러는 거야?”
“저는 여기 제 사활을 다 걸었어요. 아가씨도 공평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 기집애가! 일 다 망쳐놓고 나보고 책임지라고?”
경주가 해탈한 듯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저희가 일을 너무 만만하게 봤어요. 다 잘될 줄 알았는데…. 다….”
일이 잘못되었음에도 태연하게 굴길래 제 살길은 숨겨놓은 줄 알았다.
지금 보니 경주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순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했다.
“너 미친 게 맞구나? 당장 꺼져. 그리고 명심해. 나는 이번 일 절대로 모르는 일이야.”
경주가 정순의 말을 듣고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창 밖을 보이는 경주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같이 느긋했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정순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불안감에 한참 동안 몸을 떨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