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경주는 무능한 남편을 뒤로하고 스스로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정순을 찾아가 함께 일을 하자고 제의했던 까닭은 그녀와 자신이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야욕.
예상대로 정순은 경주의 제안을 수락했다.
제 아비를 죽이려는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경주가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계획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태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승계할 사람에게 물려주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한 바 있었다.
때문에 아직도 그 빌어먹을 상속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이고.
어차피 동만과 정순은 후계 구도에서 눈 밖에 나 있는 상황이었고, 상속받을 재산이라고 해봤자 현재 가지고 있는 지분을 유지라도 하면 다행인 수준.
함께 진태를 제거하고 여느 남매와 동일한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다.
정치자금으로 쓰려고 모아두었던 비자금을 모았지만, 진태의 눈 밖에 나면서 정치 생활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결국 경주는 남아 있던 비자금을 모두 털어 신분이 없는 조선족을 고용해 진태가 가장 최근에 샀던 차 ‘BMW 2000’를 구입했다.
저번에 진태의 저택에 들렀을 때 차의 번호판을 찍어 두었기 때문에 완전히 동일한 번호판으로 갈아 끼울 수 있었다.
한정판인데다가 신분이 없는 사람을 시켜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지출이 컸지만 상관없었다.
계획만 성공한다면 달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맘때쯤이면 진태가 자신의 별장을 찾는다는 것과, 그날 오전엔 경호원들을 대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순에게 들었기 때문에 계획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차를 샀던 조선족을 시켜 운전기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재빨리 일을 감행했다.
근처에 있다가 경호팀이 오면 들킬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리 손을 본 차로 바꾸고 자리를 뜨도록 지시했다.
일을 벌이고 몇 시간 뒤, 현장을 완전히 벗어난 조선족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4분 전 폭발음 들림. 도로에서 구급차 두 대가 지나감.’
경주는 희열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도 않고 즐겼다.
그리고 곧장 정순의 둘째 딸이자 언론사 쪽에 인맥이 두터운 수애에게 연락했다.
수애를 조력자로 선택했던 이유는 정순의 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언니인 수경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순의 첫째 딸이자 태선 호텔의 경영이사인 수경이 아닌, 수경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수경이 태선호텔을 물려받을 것은 뻔했기 때문에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악착같은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수애는 언론을 만지는 데 특출난 능력을 보였다.
적절한 타이밍에 광고를 던질 줄 알고, 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번 일로 정순에게 확실한 보상을 약속받았는지, 수애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연락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진태의 폭발사고와 더불어 대장암까지 물밀듯이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일주일 전쯤, 수애에게 계획을 설명하며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런데 고모. 사고만 내면 끝난 거 아니에요? 암은 왜 터트리라는 거예요?’
‘보험이야. 꽤 크게 사고가 날 거긴 한데, 숨은 붙어있을 수도 있잖아.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대장암 걸렸다고 기사가 터지고 나면, 임원들이 가만있겠어?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 기사 나와도 입막음했다고 생각하겠지. 사고로 불구에 대장암까지 얻었다는 걸 알면 그대로 산송장 취급당할 테니까, 그것도 우리 의도대로 되는 거지.’
‘암이라는 증거는요?’
‘아니라고 증명하려면 검진 기록을 까봐야 할 텐데, 대장에서 혹이 두 개 발견됐어. 지방종이긴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때쯤이면 서회장은 힘을 다 잃었을 거고, 우리 쪽에서 손대면 돼.’
‘와. 완전 치밀하네. 고모하고 일 오래 하면 안 되겠어요. 발등 찍힐라.’
‘뭐, 뭐?’
정순을 쏙 빼닮았는지 워낙 싸가지가 없었기에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그 대화가 기억났다.
일만 잘 처리되고 품 안에 잘 보관하고 있는 이 MP3의 녹음본만 있으면 정순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목줄을 잡고 흔드는 것은 나중 가서 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차를 제대로 손봤으니 진태는 겨우 숨만 붙어있을 것이 뻔했다.
아니면 이미 숨을 거두었거나.
눈에 거슬리던 강빈도 같이 있다고 들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런데….
“강빈이가 거기에는 왜 간 거지?”
혼잣말을 뱉으며 강빈에 대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경주는 창호와 창훈을 데리고 진태가 입원해있다는 형설병원에 거의 도착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한 시간이 겨우 지났는데 벌써 이곳에 도착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태의 별장 근처에 미리 미행할 사람을 붙여두었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로는 자식들과 함께 인천과 밀접한 호텔에서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빨리 생사 확인을 하고 싶었고, 만약 산송장으로 살아있을 경우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집안에서 내쳐진 며느리라지만, 병문안을 온 사람까지 내쫓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을 처리한 조선족에게 돈가방의 위치와 다신 연락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내고 대포폰을 창밖으로 던졌다.
“내가 정치 인생이 끝났지, 재벌 인생이 끝난 줄 알아? 창훈아, 창호야. 두고 봐라. 이 엄마가 너희를 어떻게 이끄는지.”
운전대를 잡은 창호는 못 들은 척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창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가 손톱을 물며 차창으로 인천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경주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확 찡그렸다.
“쪼그만 게 좀 기다리지. 지 엄마 닮아서 성격이 급해.”
“누군데 그래요?”
“최수애.”
아직은 신경 써야 할 때이기 때문에 경주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속내와는 다르게 콧소리를 내며 달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으응, 수애야. 무슨 일 있니?”
“저 숙모가 시킨 대로 다 했어요. 제 몫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응? 정순 아가씨가 주기로 한 거 있지 않았니?”
“그건 그거고. 숙모도 따로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아니었으면 진행 안 됐을 텐데.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정정 기사 낼까요?”
이제 와서 일을 무르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애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아, 아니야. 원하는 거라도 있는 거야?”
“번영건설 아시죠? 저 내년에 거기 장남하고 결혼해요. 태선물산 받으면 건축은 저 주세요.”
“뭐? 수애야. 내가 다른 걸로 알아볼 테니…”
“정정 전화 돌려요?”
“아, 알겠어. 건설은 수애 너 해. 숙모는 물산만 있으면 돼.”
수애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경주가 버럭 성질을 냈다.
“이 싸가지 없는 기집애가!”
“어머니. 건설을 주다니 무슨 말이에요?”
창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경주는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줄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 계약서라도 썼다니? 저렇게 분수도 모르고 나대니 지 언니한테 밀리지.”
정순에게도 분명 대가를 받아갈 텐데, 자신에게도 대가를 바라는 그 심보가 꼴보기 싫었다.
경주는 갖고 있는 녹음본만 있으면 수애는 물론 정순에게 뜯어낼 사람은 자신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전까지는 입조심을 단단히 해야한다.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창호와 창훈이 행여나 말실수를 할까 봐 염려되었던 것이 이유였다.
창훈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어디 갔어요? 까맣게 잊고 있었네.”
“또 밖에 싸돌아다니고 있겠지. 됐어. 신경 쓰지 마.”
동만은 이미 경주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태가 상속할 재산을 빼내오기 위해서 잘 보일 필요는 있었지만,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될 일.
동만이 보기완 다르게 속정도 깊어 제 아비를 죽이려는 계획에 동참할 리도 없고, 만약 동행해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진태가 입원해있는 형설병원이 시야에 보이고 있었다.
***
한편 태선전자의 이사회실에서는 임원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자계열의 임원들뿐만 아니라 물산계열, 금융계열 등 갖은 곳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였다.
물론 다른 계열사의 사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적어도 전무 이상의 사람들이었다.
재만이 오랜 시간 공들여 제 사람을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마침 현 태선전자의 부사장이자 진태의 최측근인 류현철은 미국으로 출장을 간 상태였다.
진태도 모르게 진행 된 이번 임원 회의는 재만이 스스로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고, 후계 싸움이 진행될 때 자신을 지지하라는 압박을 가하기 위함도 있었다.
연신 굽신대는 임원들을 보며 재만은 마치 자신이 진태라도 된 듯한 기분에 취했다.
진태가 참석한 임원회의에서는 대놓고 무시 받던 범준도,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범준을 보며, 재만은 그동안 자리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이 태선 그룹을 물려받고 범준을 전자의 사장 자리로 올려놓는다면 제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범준은 들뜬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케팅이라는 겁니다. 마케팅 부서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상품기획부터…”
태선식품을 다년간 경영해온 이력 때문인지, 범준도 이제 제법 쓸만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범준의 브리핑이 끝나고 박수 소리가 이사회실을 울렸다.
박수 소리가 멎어갈 때쯤 재만이 말을 꺼냈다.
“내가 앞으로 이끌 태선 그룹은 사람을 쉽게 버리는 기업이 아닙니다. 물론 제 사람에 한정되지만요. 하하.”
방금 재만이 했던 말은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확실히 잡으라는 압박과 다름없었다.
재만의 웃음소리에 사람들이 저마다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연기로라도 웃지 않으면 밉보일 것이 뻔한 자리였다.
재만이 말을 이었다.
“제가 회장 자리에 오르면 장차 전자를 이끌 여기 범준이도 잘 부탁드립니다.”
범준은 괜히 인정을 받아 헤벌쭉 웃다가 고개를 젓고 정색했다.
그런 멍청한 표정을 본 재만은 순간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이어서 말했다.
“범준이가 장가갈 시기를 놓쳤는데, 여기 계신 분 중 한 분이 제 사돈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괜찮은 연줄이 있다면 좀 알려주세요.”
“사, 사장님?”
“하하.”
정략결혼에 반발심이 들었는지 범준이 벌떡 일어났지만 재만은 입막음시키려는 듯 범준의 허리를 두드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임원들은 자신들도 태선가와 가족으로 얽힐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푸는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때 재만의 비서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재만에게 다가왔다.
“임 비서. 회의 중에 누가 들어오라고 했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그런 말을 했지만,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임 비서가 회의 도중 들어올 리가 없었다.
임 비서가 입에 양손을 모으는 제스쳐를 하자 재만이 슬쩍 귀를 가져다 댔다.
얘기가 끝났을 때 재만은 동공이 커진 채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범준이 재만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재만은 범준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을 돌려 그대로 이사회실을 나가려는 재만을, 임원들은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범준은 따라가야 되나, 망설이고 있었다.
재만이 걷다가 말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오늘 회의는 끝일세. 그리고 범준이는 나 따라오고.”
재만의 말을 들은 범준이 서둘러 재만의 뒤를 쫓았다.
아무 설명도 듣지 않은 채 재만에 차에 탄 범준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비상이다.”
“예?”
“회장님이 탄 차가 폭발에 휘말렸다는구나. 게다가 대장암까지 발견되었대.”
임 비서의 말에 따르면 진태가 탄 차가 폭발해 현재 인천 형설병원에 입원해있으며, 대장암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한다.
사고는 경미하다고 했기에,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지만, 대장암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진태의 상황을 확인하고 대처해야 했다.
진태는 아직 상속을 배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상태로 세상을 뜨기라도 한다면, 능력도 없는 동생들과 지분을 동일하게 상속받아야 되는 것이다.
‘잠깐, 인천에 있는 병원이라고?’
진태가 인천에 갈 명분은 하나밖에 없었다.
진태의 비자금 대부분이 묻혀 있는 별장.
몇 년 전부터 이맘때면 재만을 데리고 함께 가곤 했었다.
웬일로 자신을 부르지 않았는지, 재만은 의문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재만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