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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27화 (127/249)

#127화

“회장님. 강빈 군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나가지.”

진태는 골프웨어에 정글 모자를 대충 눌러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을 옮기던 중, 채규가 목청을 가다듬고는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인천에 있는 게 무엇인지 서재만 사장은 알고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허?”

진태가 불쾌한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설마 나보고 그놈 눈치라도 보라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진태는 코웃음을 치고는 발걸음을 놀렸다.

***

오늘 아침에 자신의 저택으로 찾아오라는 진태의 지시를 받았다.

지난 임원 회의 때, 진태가 무언가 줄 게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저택 앞에 당도한 뒤에 채규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미리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는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진태가 나왔다.

대충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나는 김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보고는 빼입고 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너랑 나랑 같냐? 따라오기나 해.”

“….”

차를 타려는데 문득 평소와 다른 것을 느꼈다.

“그런데 경호원들은 보이지 않네요?”

“나중에 올 게다.”

잠깐 마실을 나갈 때조차 항상 경호원을 대동하던 진태였다.

옷차림을 보고 약간 실망했지만, 경호원까지 빼놓고 가는 곳이 대체 어디일까.

게다가 오늘따라 진태의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오늘 진태와 함께 타고 가는 차는 BMW 사에서 2000년도 한정으로 단 2000대만 생산된 한정 제품이었다.

전생에서 한창 차에 대해 관심이 많을 때라 기억이 났다.

은색의 고급 세단으로, 비싼 차라고 쓰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차는 그중에서도 ‘Forever’ 에디션으로 300대가 조금 넘게 생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기존 차와 다른 점은 대표적으로 친환경 소재 사용으로 인해 부품 교체가 편리한 것이고, 외관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시트에 작은 글씨로 ‘Forever’가 새겨져 있는 정도.

진태의 차를 보니 전의 망나니 서강빈이 진태를 닮았던 건 아니었을지 짐작해 봤다.

진태의 전용기사와 채규가 앞자리에 오르고 나와 진태는 뒷좌석에 착석했다.

말없이 진중한 분위기로 차를 타고 가던 중,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진태에게 물었다.

“저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인천.”

더 얘기할 생각 없다는 듯 짧은 대답이 돌아오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보다 인천에 뭐가 있길래 저렇게 분위기를 잡는 것일까.

정치 쪽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은 없었다.

대기업 중에서는 CQB산업은행과 포더 석유화학의 본사가 인천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설사 그 기업들의 회장을 만난다 하더라도 진태가 이 정도로 격식을 차릴 리는 없을 텐데.

그 뒤로 대화 한 번 없이 인천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옅은 바다 비린내가 코를 스쳤다.

사업 관련해서 온 것 말고는 와 본 적이 없으니, 인천 바다를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연안 부두에는 배들이 중구난방으로 도열해 있었고, 투박한 계류시설이 보였다.

진태는 옅게 미소를 보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 연안 부두에서 태선이 시작되었어.”

“진태산업을 말하는 거군요.”

태선의 근간이 되는 진태산업은 1930년대 중반에 창립되었다.

그리고 이 연안 부두가 바로 진태의 장인어른이 거류지 무역을 꽉 잡고 있었다는 곳이리라.

진태는 그때 생각에 잠겨있는지 시선을 바다에 고정하며 말했다.

“별걸 알고 있구나.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친구 놈에게 돈을 빌려 시작한 게 한과 사업이었어. 그 뒤로 건축일을 했었고. 무역까지 성공가도를 달리고 바뀐 이름이 태선물산이다.”

“태선가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관심이 없다면 모를 일이지.”

진태가 휘적휘적 걷기 시작하고 나는 그 옆에 붙어 같이 걸어갔다.

갑자기 태선의 뿌리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는 진태를 보며 대체 어떤 것을 주려고 이러나,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부두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진태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낡고 허름한 간판에 ‘수정식당’이라고 쓰인 곳이었다.

심지어 간판에서 글자 몇 개가 떨어져 나가 테이프 자국으로 이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옛날 식당이어서 그런지 입구가 낮았지만 진태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메뉴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소박한 식당이었다.

군데군데 묻은 얼룩들에서 오랜 세월이 느껴졌다.

빛바랜 커튼에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었고, 의자와 테이블은 흠집을 가리려는지 청색 테이프를 붙여놓았다.

“어이, 김씨! 여기 따뜻한 밥 두 개만 내오쇼.”

진태가 소리치자 안에서 웬 거구의 남자가 나왔다.

턱에 자란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었지만, 풍채 때문인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밝게 웃으며 진태를 반겼다.

“서회장님! 이게 대체 얼마 만이요. 지난번에는 장남을 데리고 오더니 이번에는 어디 보자… 장손쯤 되는 거요?”

“허허. 장손은 아니고 우리 집안 막내 녀석이야. 인사 안 하고 뭐 해?”

진태의 말에 나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태선물산에서 부사장을 맡고 있는 서강빈입니다.”

“아이고, 이거 또 귀한 분이구만. 앉아요, 앉아. 나는 별 볼 일 없는 동네식당 주인이요.”

나는 묵례를 한 번 더 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김씨라 불린 노년의 남자는 주방으로 들어가고 식당에는 진태와 나만 덩그러니 식당에 앉아 있었다.

채규와 운전기사는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김씨가 밑반찬들과 숭늉을 내왔다.

진태가 먼저 숟가락을 들어 숭늉을 떠먹었다.

그런 모습에 뭔가 이질감이 들어 나는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진태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안 먹고 뭐 해?”

“할아버지가 숭늉을 먹는 게 안 어울려서요. 집안 행사나 따로 밥 먹을 때도 산해진미 좋은 것만 드시잖아요.”

“처음부터 좋은 것만 먹어온 거면 몰라. 입맛은 젊을 때 결정된다는 거 모르냐? 나한텐 이 맛이 제일이야.”

나도 비싸다는 서양식들은 다 제쳐두고 한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조금은 납득이 갔다.

숭늉을 한 입 떠서 먹자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윽고 고등어구이가 식탁에 놓이고 김씨가 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일 크고 팔팔한 놈으로 잡았수다. 필요한 거 더 있으면 말씀하시고.”

“잘 먹겠네.”

젓가락으로 뼈를 바르고 살을 먹어보자 부드럽고 실한 것이 과연, 진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가 여지껏 먹어 본 고등어 중 최고네요. 이 정도라면 저도 가끔 올 거 같은데요?”

고등어의 뼈를 손에 들고 살을 먹고 있던 진태가 말했다.

“참 맛있지? 돈이 없어 밥을 굶을 때 내 손을 잡고 이곳에 끌고 온 사람이 바로 이 집 할매다. 그때는 고등어가 뭐야, 똥국만 먹어도 환장해서 먹었지. 가끔 맨밥에 멸치 대가리만 장에 찍어 먹었는데, 그것만으로 하루 배를 다 채웠어.”

진태는 아스라한 미소를 지으며 느린 손짓으로 밥을 먹었다.

나도 젓가락을 들어 입으로 음식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소식당에서는 돈을 받지 않았다.

들은 얘기로는 그동안 진태의 후원으로 자식들 모두 대학에 가고 취업까지 성공한 모양이었다.

어려운 시절, 진태에게 밥을 지어줬다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이 식당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진태는 김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당에서 나왔다.

채규가 진태에게 단풍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내밀자 진태가 자연스럽게 받았다.

그동안 봐왔던 진태는 지팡이는커녕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기 때문에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허리 안 좋으세요?”

“아니. 이제 산을 탈 게다.”

“산이라니요.. 등산을 해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사람은 무슨.”

진태는 씨익 웃고는 미소식당을 지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진태를 쫓아갔다.

미소식당 뒤편에는 작은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오르는 곳이 바로 이 동산이었다.

사유지라는 안내판과 함께 등산로가 보였다.

아흔이 넘어가는 진태의 나이에 오를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진태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동산 자체는 고지가 높지 않았지만 역시나 진태의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쯤 올랐을까, 진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춘 것이다.

“조금 쉬어 갈까요?”

“아니다. 거의 다 왔어.”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아니면 제가 업어 드릴까요?”

“아서라. 젊은 나이에 허리 나갈 일 있냐?”

진태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다시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런 진태의 한쪽 팔을 잡아 부축했다.

그렇게 십 분은 더 올랐을까.

동산 중턱에 도착하자, 지붕만 파랗고 온통 하얗게 칠한 삼 층짜리 저택이 하나 보였다.

밑에는 절벽이 자리하고 있고, 앞에는 훤히 뚫려 있어 안에서 바다를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절경일 것이다.

진태는 거친 숨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눈은 저택에 고정한 채 반짝이고 있었다.

“... 여기는 또 뭡니까.”

“뭐겠어?”

“별장이라도 되는 겁니까?”

“왜, 첩이라도 한 명 숨겨다 놓았을까 봐?”

정색하며 바라보는 나를 뒤로한 채, 진태는 낄낄대며 앞으로 걸어갔다.

별장 초입에는 푸른 잔디가 반듯이 깎여 있었다.

곳곳에 자리 잡은 스프링클러는 지금은 물을 내뿜고 있지 않았지만, 잔디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을 보아 방금 전만 해도 작동한 모양이었다.

건물 앞에 서 있던 남자 한 명이 달려왔다.

깔끔한 복장에 체격을 보아 경호 팀에서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 연락은 받았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여기 일은 어때, 할 만해?”

“예.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진태 밑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정갈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진태가 나를 턱짓하며 말했다.

“내 손주 놈.”

남자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을 지키고 있는 채윤혁 팀장이라고 합니다.”

“네. 태선물산에서 일하고 있는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윤혁의 뒤로, 근처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던 모양인지 경비원 두 명이 추가로 등장했고 모두 인사했다.

그러기도 잠시, 진태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진태는 시선을 별장에 떼지도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이 내가 너한테 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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