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26화 (126/249)

#126화

한일월드컵 한정 로고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형주의 갤러리를 찾아갔다.

가는 길에 영빈의 작업실도 있었기에, 영빈에게 함께 가자는 말을 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임기사의 차가 영빈의 갤러리 앞에서 멈추고 영빈이 내 옆자리에 탔다.

영빈이 차에 타자마자 손을 들어 올리자 나도 빙긋 웃으며 짝, 소리 나게 손을 마주 대었다.

영빈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가 평일에 시간도 내고, 어쩐 일이야?”

“형주 씨한테 외주를 맡겼거든. 못 들었어?”

“아, 형주한테 들었던 거 같다. 그 태선그룹의 로고를 새로 만든다던 거지.”

“완전히 새로 하는 건 아니고, 월드컵 한정이지.”

붉은 악마의 이미지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았고, 대신 가운데 들어갈 ‘태선’의 로고 제작을 의뢰했다.

영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듣기는 했는데, 굳이 로고를 바뀔 필요가 있어?”

“더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거지. 서회장님 말로는 한정판 붙이면 사람들 환장한다더라.”

“하하. 회장님다운 말이네. 그렇게 영향이 있을까?”

사람들은 로고 디자인의 영향을 쉽게 간과하지만, 로고가 갖고 있는 힘은 브랜드 가치에 직결될 정도로 그 영향력은 상당했다.

영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리복이 나이키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랑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리복이 좋던데.”

영빈의 말에 피식 웃고 차창을 바라봤다.

서강빈으로 살기 시작할 때만 해도, 저층의 건물이 대부분이었던 서울에 이제는 제법 길쭉한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보였다.

여전히 꽉 막힌 도로와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2000년도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위대한의 위대한 아트 갤러리’

‘위대한’이라니.

여전히 저런 이름이 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갤러리의 이름이었다.

차가 거리에 서고 뒤이어 영균의 차도 그 뒤에 바짝 붙어 세웠다.

영균이 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것을 보며 말했다.

“차실장은 저기 카페에 가 있어.”

“괜찮습니다.”

“겨울이야. 몸이 따뜻해야 경호도 잘하지.”

영균은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모를까, 내가 말한 카페는 갤러리 바로 밑층에 있는 카페였다.

형주가 건물창고로 쓰이던 걸 사서 예술인들을 위한 카페로 개조했다고 들었다.

같이 계단을 오르다 영균이 먼저 카페에 들어가고 나와 영빈은 그 위층으로 향했다.

갤러리는 전체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는지,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도배되어 있었고 가구들도 독특하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쇼 픽쳐스’에서 형주의 그림이 고가에 팔린 이후로, 형주의 그림들의 가격이 수십 배는 뛰었다고 들었다.

가난한 화가들을 위한 재단도 차렸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형주도 제 꿈을 향해 확고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형주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강빈 씨, 영빈아!”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야. 하하.”

형주가 우리를 안쪽에 따로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형주는 머리를 기른 지가 꽤 되었는지 질끈 묶은 머리가 어깨에 닿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서로의 근황에 대해 먼저 얘기를 나누었다.

형주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미술관이나 거부들로부터 연락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따로 일정을 관리해 줄 사람까지 고용할 정도로.

그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보자고 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중, 형주가 뒤에 있던 종이를 몇 장을 꺼내오며 말했다.

“우선 초안들입니다.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우선 첫 번째 도안은 붉은 악마와 색이 대비되는 파란 색깔로 깔끔하게 ‘TAESEON’의 글자가 기입되어 있었다.

형주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성의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가장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하하.”

“좋은데요? 거창하게 꾸미는 것보다 사람들의 뇌리에 더 잘 박힐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현재 태선의 로고는 삼색으로 양분된 둥근 원에 흰색으로 기업명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보다 오히려 깔끔한 폰트가 들어간 형주의 디자인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왔던 로고는 한국 국가대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각종 포즈를 취하며 영어로 태선의 이름을 만들고 있었다.

영빈이 형주를 보며 말했다.

“이건 진짜 사람들 같은데?”

형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스튜디오 빌려서 촬영한 거야. 생각할 땐 나름 괜찮았는데 사진으로 보니까 별로더라고. 정신없지?”

“음… 포스터로는 좋은데 로고로는 안 맞는 느낌? 강빈이 너는 어때?”

“저도 이 도안보다는 처음 게 나은 것 같네요. 그래도 뭔가 아쉬운데 이 도안은 광고 쪽으로 제작해보는 게 어떨까요?”

형주가 반색하며 말했다.

“제 아이디어가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이죠. 얼마든지 사용하세요!”

“네. 태선기획 쪽에 보내 볼게요.”

태선기획은 태선증권사처럼 지주회사를 두지 않고 진태가 따로 보유한 종합 광고대행사였다.

태선의 광고는 대부분의 경우, 태선기획을 거쳐서 제작된다.

로고 제작을 의뢰했는데,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거두었다.

그 뒤로도 종이를 계속 넘겨보았지만, 처음 보았던 로고가 가장 인상 깊고 마음에 들었다.

첫 도안을 형주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다른 디자인들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 세계가 보는 행사다 보니 깔끔한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네요.”

“네.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저도 처음 게 가장 좋더군요. 그렇게 하시죠.”

형주가 그려낸 도안들만 10개가 넘어갔다.

얼마나 이 일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한 사례는 약속한 것 이상으로 톡톡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중, 영빈이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허벅지를 치곤 말했다.

“맞다. 형주야. 강빈이가 이번에 태선물산 부사장 자리에 올랐어.”

“뭐? 그 정도면 뉴스에도 실렸을 텐데, 내가 뉴스를 안 보니까 못 들었네. 축하드려요. 강빈 씨.”

마음만 먹었으면 사장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다는 걸 형주가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나는 그저 옅게 미소를 지었다.

형주가 눈을 반달처럼 휘며 말했다.

“무명 작가를 키워주신 은인이 축하받을 일이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강빈 씨만을 위한 그림을 그려 드리겠습니다.”

“이거 기대되는데요?”

“하하. 이번만큼은 기대하셔도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 둔 게 있거든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림으로 메모를 한다던 형주의 습관이 생각났다.

그것보다 무슨 그림일까?

전생이라면 지금 시기에 형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정말 기대됩니다. 완성되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형주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궁금한데? 그때도 같이 오자.”

형주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는데, 영빈이 할 말이 있다며 밑층에 있는 카페로 가자고 했다.

“둘이?”

“응. 네가 꼭 들어야 될 말 같다.”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영빈의 의도가 뭘까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서 있는 영균이 보였다.

“차실장. 계속 서 있던 거야?”

“아닙니다. 대표님이 내려오시는 게 보여서 일어났습니다.”

“알겠어. 형이랑 얘기 좀 하고 출발하지. 앉아서 쉬고 있어.”

영균이 알겠다고 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은 밖을 향한 것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경호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페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주고 나서야 영빈은 얘기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서동만, 그 양반이 회장님한테 다시 복귀 제안을 받았댄다.”

“뭐?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나도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태선가의 정치판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영빈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 작업실에 그 양반이 직접 왔어.”

“큰아빠가 형을?”

진태의 혈육 중 우리 가족과 남순을 제외하곤 모두 영빈을 천대했다.

특히 재만의 아내, 강숙은 재벌가에서 광대 짓이나 하는 놈이라며 대놓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영빈답지 않게 욱해서, 화가랑 광대가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는 말이 기억났다.

동만이라고 다를까 싶었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영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술에 완전히 꼴아가지고 찾아와서 하소연하더라. 아내한테 무시 받던 건 일상이었는데 이젠 자식들까지 자길 무시한다고. 작업실에 다른 동료들도 있었는데 그 양반 때문에 내보낸 걸 생각하면…. 어휴.”

“하소연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형을 찾아올 이유는 아니잖아.”

영빈이 그때가 생각났는지 실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나도 어이가 없는 게, 동생이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는데 형이라는 놈이 왜 이리 태평하냐면서 따지더라니까? 그러면서 나보고 손을 잡자고 하더라.”

“허, 그래서?”

“나는 그냥 어깨만 으쓱했지.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네가 하는 사업이나 투자 정보를 빼 오면 나를 더 높은 자리에 올려준다나.”

“이건 멍청한 건지, 주변이 그렇게 만든 건지.”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갔다.

그만큼 동만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영빈이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내가 자리 욕심이 없기도 한데, 권력도 자리도 없는 양반이 무슨 능력으로 나를 끌어올려? 나 참 기가 막혀서.”

“할아버지한테 복귀 제안을 받았다는 건 무슨 소리야?”

“국회의원 문경주 씨랑 이혼하면 어디 계열사 하나 준다고 하더라. 회장님 눈에는 큰아빠도 자식은 자식인가 보지.”

예전에 동만이 저택에 들어오는 것을 두고만 봤을 때 예상하긴 했다.

뭐, 전생에서도 경주가 문제였지, 동만이라는 사람 자체가 문제였던 건 아니니까.

사람이 멍청하기는 해도 선 넘는 행위를 할 만한 인물은 되지 못했다.

그보다 이런 얘기를 먼저 꺼내준 영빈이 새삼 기특했다.

“고민해 볼 법도 한데 이렇게 먼저 얘기 꺼내줘서 고마워.”

“고민은 무슨. 야! 내가 너 형이야. 인마. 안 그래도 사업이니, 경영이니 네가 다 떠맡아줘서 편하게 그림 그리고 있는데 귀찮게 그런 일을 왜 하냐?”

말은 저렇게 해도 집안일을 내가 맡아서 하는 게 내심 고마운 모양이었다.

이렇게 자리까지 마련해 얘기하는 것을 볼 때 영빈은 정말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 나에게 익숙하지 않던 이 단어가 가끔 이렇게 마음을 들쑤셨다.

준만을 태선물산의 사장 자리에 올렸던 계획도, 준만을 믿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