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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25화 (125/249)

#125화

차가 부드럽게 코너를 꺾자 태선물산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백미러로 고개를 흔들거리며 운전하는 임기사가 보였다.

전생에서 내 운전기사를 맡았던 사람은 나를 배신해 죽음으로 몰고가는 데 일조했다.

그래서일까.

운전기사를 뽑는 것만큼 신중했던 일도 몇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는 임기사가 운전하는 차만큼 편한 것도 없었다.

차 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작게 흠집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없어졌네?”

나는 차에 관련해선 미세한 차이도 알아차릴 정도로 예민했다.

아무래도 지난 삶 때문이겠지.

임기사가 슬쩍 백미러를 보며 대답했다.

“얼룩 말씀하시는 거면 지난번에 차 내부 청소 맡길 때 사라졌을 겁니다. 제가 신경 써서 지워달라고 했거든요.”

“눈썰미가 원래 그렇게 좋아?”

“하하. 제 직장이나 다름없는데 하나하나 신경 써야죠. 대표님이 주시는 임금만 해도… 어휴, 충성입니다.”

임기사는 붙임성 좋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럴 때는 가볍게 대화하지만, 내가 대화하길 원하지 않을 때는 귀신같이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태선물산의 지하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고 내리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에릭이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무슨 일?”

“페이지한테 투자금 조달 요청이 들어왔거든요. 새로운 검색 엔진이 상용화되기 직전이어서 필요한가 봐요.”

“얼마가 나왔던 달라는 대로 지급해.”

“알겠어요. 하하.”

추가 투자조건을 따지지 말라는 지시에도 에릭은 묻지도 않고 내 말을 따랐다.

에릭도 이제 나를 닮아가는 것인지, 무엇 하나 서툴게 일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더 듬직했다.

구글에게 추가로 투자하는 만큼,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입지도 더 커질 것이다.

멈춰 있는 차 안에서 시트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투자할 만한 곳은 찾았어?”

“현재진행형이죠, 뭐. 예전에는 대표님이 픽해주셨다면, 요새는 많이 바쁘셔서 제가 직접 알아보고 있잖아요.”

에릭의 말처럼 최근에는 미국 쪽에 관심을 갖기가 어려웠다.

태선물산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계받을 사항도 많았고 사업적으로 확장하고 있을 시기였다.

“어쨌든 최종 컨펌은 내가 할 테니까, 큰 건에 대해선 무조건 리스트 보내.”

“알겠습니다.”

“IT기업 말고도, 네가 봤을 때 괜찮다 싶은 투자처들 있으면 싹 다 보내. 투자 규모야 신경 쓸 필요도 없잖아.”

“하하. 그렇죠. 수십억 달러가 놀고 있으니까요. 1분 1초가 돈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일게요.”

“그래. 고생해라.”

전화를 끊자 눈치껏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임기사가 차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임기사 운전실력이면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긋겠어.”

“하하. 과찬이십니다.”

“진심이야. 늘 수고하고 있어.”

임기사의 등을 두드리는 새 뒤따라 들어온 차에서 영균이 내렸다.

영균의 경호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의 엘리베이터는 주차장과 1층만을 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층을 지나가야 했다.

도열해 있는 임직원 일동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런 비효율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당 이사에게 미리 언질을 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사람들 사이에서 황실장이 나와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랐다.

고개를 돌며 가볍게 손짓하자, 황실장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았다.

황실장을 향해 말했다.

“형주 씨는?”

“초안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 일정이 살짝 비는데 미팅 잡을까요?

형주에게 한일월드컵 기간 중 제품에 들어갈 ‘태선’의 로고 제작을 부탁했었다.

초안이 완성된 모양이니 잠시 보고 오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뒤 부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정순이 집으로 가다 말고 차를 돌려 도착한 곳은 인천에 위치한 부두였다.

미리 고지받은 대로 차를 주차한 채 기사와 경호원을 내보냈다.

부두는 사람 한 명 없이 휑했다.

기다리고 있는 시간도 잠시, 누군가 차문을 대고 노크했다.

정순은 돌아보지도 않고 차의 잠금만 풀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여자를 홱 쏘아보며 말했다.

“올케,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죄송해요. 아가씨.”

으슥한 곳에서 모습을 비춘 사람은 현직 국회의원이자, 현재는 태선가에서 내쫓긴 동만의 부인, 문경주였다.

경주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핼쑥해져 있었다.

정순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도대체 뭘 부탁하려고 이런 으슥한 데까지 부른 건데.”

경주는 근 한 달간 매일같이 정순에게 한번 보자는 연락을 보내왔다.

이미 집안에서 퇴출된 것과 다름없는 경주기에, 정순은 당연히 이를 거절해왔고.

그러던 중 임원회의에서 자신의 계열사 몇 개가 날아갔고, 이로 인해 생긴 자금은 강빈이 벌린 일에 융통되리란 것을 통보받았다.

모멸감에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말이라도 한번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경주를 만나러 온 것이다.

솔직히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들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정순은 생각했다.

경주는 저보다 나이도 어린 정순에게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들어보시고 결정하세요.”

“그러니까. 말해보라고.”

정순의 말에 경주는 괜히 차창을 두리번거리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연세가 아흔 다 되어 가세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죠.”

“그게 뭐?”

“오히려 너무 건강해 보여서 의심스럽지 않냐는 말이에요.”

“헛소리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경주는 침을 한 번 크게 삼키고는 말했다.

“최근에 서회장님 건강검진 받으신 거 아세요?”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창훈이가 태선병원 출신이잖아요. 소식통이 다 있죠.”

경주, 자신이 진태에게 남몰래 사람을 붙여서 알았던 사실이지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순이 팔짱을 끼고 들어보겠다는 제스쳐를 취하자 경주가 말을 이었다.

“이거는 회장님 측근들도 모르는 사실이에요. 회장님의 대장에서 혹이 발견됐어요.”

“혹?”

경주는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래서?”

혹이라 해봤자 금방 치료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정순의 모습에도 경주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정순의 귓가 쪽으로 얼굴을 바짝 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악성 종양일 확률이 아주 높대요. 직접 검진을 한 의사한테 직접 들은 거예요.”

“암에라도 걸렸다는 거야?”

“암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는 거죠.”

“만약 진짜 악성 종양이면 아버지 성격에 지금까지 수술을 안 할 리가 없어.”

정순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경주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회장님 고혈압에다가 연세도 있으신데 수술하다 잘못되기라도 하면요? 결국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조심스러운 거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걸 어떻게 이용하게?”

“아가씨 계열사 중 몇 개가 버려진다고 들었어요. 지금이야 아가씨 지분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앞으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겠어요?”

짝!

정순의 손이 매섭게 경주의 뺨을 갈겼다.

경주는 당황한 채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매만졌다.

정순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올케가 뭘 안다고 설쳐? 설치기는. 그딴 말 할 거면 당장 꺼져.”

부어오른 뺨에 이제 눈물까지 글썽이는 경주가 말을 이었다.

“아, 아가씨. 얘기부터 다 들어보시라고요.”

“한 번 더 헛소리 지껄이면 너부터 지금 당장 묻을 거야.”

“네. 네. 바로 말할게요. 제가 처음부터 제안하려고 했던 계획이에요.”

경주가 품에 있던 봉투를 두 손으로 정순에게 넘겼다.

정순은 봉투를 뜯고 안에 있던 한 장의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시선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정순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정순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경주는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곧장 말을 이었다.

“아가씨와 제힘을 합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의환향을 하는 거죠.”

“네 몫은?”

“이전 물산 자리랑 경영권 지킬 지분만 있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아가씨가 가져가세요.”

정순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일에 가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리라.

정순이 여전히 경주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절대 전면에 안 나서는 거 알지?”

“그럼요. 아가씨. 그저 힘만 보태주시면 됩니다. 일은 제가 다 진행할게요.”

정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처리해. 그 노인네가 뒤져야 우리가 살아.”

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뒤, 태선가의 정세는 완전히 뒤바뀔 것이다.

경주가 나간 뒤, 정순은 빈자리를 쳐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경주의 제안대로라면 강빈, 준만은 물론 재만까지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이 잘못되더라도, 경주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운 채 모른 체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태선가에서 내쫓긴 집안, 써먹을 대로 써먹고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경주의 제안은 바로, 진태를 직접 처리하자는 것.

서류에는 그 방법과 그로 인해 상속받게 될 재산들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진태는 아직 유언을 작성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추세로 볼 때, 재만과 준만에게 가장 많은 재산을 쾌척할 확률이 다분했지만, 유언 없이 상속하게 된다면 자신과 그들이 받게 될 재산은 동일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서서히 지분만 잃을 판국에, 경주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서남순.…”

정순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여동생, 남순.

끊임없이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는 자신과 달리, 남순이 경영을 맡고 있는 태선백화점은 꾸준히 매출을 올리며 성장해가고 있었다.

태선백화점의 자회사이자, 진태가 꽤나 관심을 두고 있는 ‘월 마트’도 지금은 태선백화점과 거의 비등할 정도로 성장해냈다.

남순한테만은 절대 뒤처질 수 없었다.

정순이 이를 갈며 높은 파도가 내려치는 인천 바다를 바라봤다.

***

경주가 팔을 쭉 늘어뜨리며 상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정순에게 얻어맞은 왼쪽 뺨이 얼얼했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설득하는데 꽤나 애를 먹을 줄 알았는데, 정순이 곧장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일만 잘 처리된다면 이따위 뺨이야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품 안에 숨겨두었던 것을 꺼냈다.

작년에 디지털사운드에서 출시한 최신형 MP3였다.

MP3의 녹음재생 버튼을 누르자 정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처리해. 그 노인네가 뒤져야 우리가 살아.’

아직 정순이 타고 있는 차가 뒤에 있었지만, 경주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확실한 보험이 생긴 것이다.

하늘하늘 걸어가는 경주의 입 끝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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