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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24화 (124/249)

#124화

창훈이 입에 담배를 물었다.

태선병원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할 때부터 금연을 시작했으니, 근 8년 만에 손을 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어제 자신의 집을 찾아온 경주 때문이었다.

창훈이 연기를 뱉으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하… 시발. 이젠 나보고 뒷조사까지 하라고?”

태선가에서 쫓겨난 이후 원인이 된 경주를 멀리하기 위해 집까지 나왔는데, 어젯밤 갑작스레 경주가 집에 찾아왔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경주는 최근 진태가 건강검진을 받았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엄마이지만, 집안을 말아먹은 인물이 경주였다.

건강검진의 결과를 알아보라는 경주의 말에, 창훈은 일을 더 꾸미지 말고 제발 좀 조용히 살라며 단박에 거절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경주에게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아들. 이번 한 번만 엄마 도와줘. 우리 집안이 태선가 들어가려면 이제 남은 수가 없다. 어차피 이제 잃을 것도 없잖니. 그냥 건강검진 정보만 알아봐 달라는 거야.’

이번에도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잃은 것도 없다는 경주의 말에 공감이 되기도 했다.

정보 하나쯤 알아냈다 해서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을 것 같았고.

창호는 꽁초를 건물 외벽에 던지곤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건 대상은 창훈과 같은 태선병원의 동기이자, 현재 태선병원에서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조호현’이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예전 같았으면 신호음이 세 번이 울리기도 전에 받았던 호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술이라도 들어간 걸까 생각해봤지만, 괜한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2번, 3번… 5번을 전화하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이에 비해 중후한 호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창훈은 버럭 성질을 부렸다.

“전화는 왜 안 받았냐? 너도 이제 나 무시하는 거야? 응?”

“아, 창훈아. 갑자기 전화 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냐? 나. 수술 들어갔다 나오는 길이야.”

“너도 나 무시하는 건 아니고?”

“내가 널 어떻게 무시하냐. 네가 밀어준 게 있는데.”

“하… 일단 알겠고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천하의 서창훈이 할 부탁이 뭔지 들어는 보자.”

항상 자신을 떠받들던 호현에게 부탁한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에 금이 갔지만 지금 상황에선 최선이었다.

창훈이 나지막이 말했다.

“최근에 태선병원에서 회장님이 건강검진 받았다며.”

“너 설마 그거 알려달라는 건 아니지?”

“... 그거 맞다.”

“창훈아. 너 도움으로 내가 자리 잡은 건 맞는데, 그건 아니지. 회장님 건강검진 결과면 1급 비밀이야. 인마.”

“내가 너한테 부탁한 적이 있냐?”

“....”

창훈은 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해도, 제가 준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는 사람이다.

호현에게 베풀었던 호의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내며 말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지방대학 나온 네가 태선병원에 발이라도 붙였겠냐?”

“그야 알지. 아는데…. 하.”

“호현아. 나 태선병원 윗놈들이랑은 아직도 연락하고 지낸다. 회장님이 제 손주는 못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태산이라고. 내 호의 물리고 싶지 않으면 생각 제대로 하고 말해.”

수화기 너머 호현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호현이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

전화기를 끄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은밀하게 일을 진행했는지, 호현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자료는 못 보내. 나도 몰래 들어가서 눈으로 보기만 했다.”

“알겠어. 그래서 결과는?”

“회장님 고혈압 있는 건 너도 알지? 칼슘길항제 더 처방해 가셨고, 그리고 대장내시경까지 했는데 꽤 큰 혹이 두 개 정도 있더라.”

“혹? 자세히 말해봐.”

“작은 혹이 두 개 있어. 리포마 알지?”

“지방종?”

“어. 알다시피 리포마는 거의 악성화 되지 않으니까 치료는 잘 안 하잖아. 건강검진 할 때까지 말 안 했던 거 보니까 회장님은 증상도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수술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나 봐. 아무튼 신교수님이 하신 거니까, 리포마인 건 확실할 거야.

지방종(Lipoma).

지방 조직으로 구성된 양성 종양으로 보통 크기도 작고 증상도 없어 우연히 발견 되는 경우가 많은 종양이다.

악성 종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고, 그 기간이 길어 급하게 수술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크기도 작다면 더욱 그럴 거고.

창훈은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이용해먹을 가치는 있을 것이다.

“일단 알겠어. 고맙다.”

“그래. 아무튼 오늘 일은 잊어도 되니까 앞으로 이런 부탁은 좀 자제해줘라. 신교수님 방에 몰래 들어가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

“보고.”

“야! 너…”

목소리가 들려오는 휴대폰을 그대로 접었다.

그리고 경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한편, 동만은 할 일 없는 백수의 삶이 지속되고 있었다.

태선물산의 사장으로서 쌓아온 지위와 인맥은, 태선가에서 쫓겨나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업제의를 위해 여러 곳에 연락을 돌렸지만, 수락하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집에만 머무르기엔, 가족들의 눈초리가 따가워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시간이 되면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골프라도 칠까,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체력도, 정신도 너무 지쳐 있었다.

공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 노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

그 때문인지 그동안 경주만 바라보며 달려왔던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집안에서 내쫓긴 이후 경주와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쫓겨나듯이 접대용 방에서 머무르기 시작한 지도 벌써 반년이었다.

베개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 경주는 소름 끼친다는 눈빛을 보내며 근처에 있는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그런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진태의 저택을 찾아갔건만, 진태에게 들은 말은 아예 경주와 이혼하라는 것.

평소라면 당연하게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왜 고민되었을까?

생각에 잠긴 채 집에 돌아오니 거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제가 말했던 대로… 직접… 확실하니까.”

“창훈아. 엄마 생각에는…”

“그래. 어머니… 회장님…”

신발장 앞에 서서 몰래 얘기를 듣고 있는 스스로의 꼴이 웃겨 동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들어갔다.

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동만이 말했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사람이 들어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하고 말이야. 허허.”

당연히 오신 줄 몰랐다며, 이제 오셨냐며 반길 줄 알았던 자식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주야 늘 그래왔던 거니 예외로 치고, 자식들까지 이런다니.

동만은 서러운 마음을 삼키고 창훈을 보며 말했다.

“집 나가보니 어떠냐. 아주 개고생이지?”

“살 만합니다.”

딱딱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동만의 표정도 한껏 굳었다.

동만이 터벅터벅 걸어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회장님 어쩌고 얘기하던데 무슨 얘기한 거야?”

동만의 말에 경주가 창호를 째려보았고, 창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알아서 뭐 하게? 괜히 사고나 치지.”

경주의 말에 동만은 가슴이 한 움큼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된 것이 경주의 탓이 대부분인데 경주는 저리 당당하고, 마치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만은 지금 진태에게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안다면,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노력해왔던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이들한테 너무나도 서운했다.

그리고 화두를 던졌다.

“며칠 전에 아버지 만나고 왔어.”

이혼을 제안받았다고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진태를 만나고 왔다고 하면 가족들의 반응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온전한 착각이었다.

자신의 몸에 근 몇 달간 손도 대지 않던 경주가 손바닥을 등을 후려치며 말했다.

“가서 또 무슨 헛소리를 했어, 응? 가만있어도 모자랄 판에 왜 자꾸 일을 벌여! 왜!”

“언제는 어떻게든 빌어서 다시 자리 찾아오라며.”

“좀!”

경주의 반응에 동만도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냥 가만히 못 박힌 듯 있을까? 당신이 나한테 원하는 게 대체 뭔데 그래!”

“원하는 거 없어.”

“뭐라고?”

“원하는 거 없으니까 그냥 닥치고 틀어박혀 살라고. 당신 할 일도 없이 밖에 돌아다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애들도 다 알아. 할 짓도 없으면서 쏘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 박혀 있으라고.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동만은 밀려오는 수치심과 함께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고 결심이 섰다.

***

부사장실에서 물산과 관련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준만의 배려로, 검토 및 승인처리만 하면 됐기 때문에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나와 관련된 사업 같은 경우는 관심을 갖고 꾸준히 보고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서류는 정순의 계열사 중 몇 개가 인수되거나 합병되고, 그 과정에서 나온 차익금을 태선 건설에 융통한다는 보고서였다.

정신없이 서류를 훑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국제전화였다.

“서 부사장. 나 한옌이오.”

“예. 무슨 일입니까?”

“마카오 타워 시공…”

뭐라고 떠들어대긴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중국어는 간단한 회화 정도만 가능한 수준인 이유도 있었고, 한옌이 쓰는 중국어가 표준어가 아니라, 지방 사투리가 끼어있기 때문도 있었다.

중국어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착신전환으로 황실장을 불렀다.

비서실에서 곧장 황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와서 통역 좀 해줘.”

황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황실장은 영어와 중국어까지 3개국어가 가능했다.

한옌과 중국어로 대화를 몇 번 주고받고는 말했다.

“건설에서 추가로 융통된 자금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부사장님이 신경 써주신 거냐고 묻네요.”

“뭐, 그렇다고 하지.”

황실장이 중국어로 맞다고 말하며 전화를 이었다.

진태의 지시로 정순의 계열사들을 정리하며 나온 돈이었다.

황실장이 수화기를 살짝 떨어뜨리고 말했다.

“리옌홍 대표에게 큰 투자를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네요. 그 외에 다른 기업에도 큰 투자를 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가능성을 봤을 뿐, 서로에게 윈윈이었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음에 중국에서 꼭 한번 만나자고도.”

한옌.

어쨌거나 덕분에 바이두의 리옌홍을 소개받기도 했고.

사람 자체는 탐욕스럽고 속내가 검었지만, 앞으로도 중국 관련 투자할 때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통역을 이어갔다.

이번에 투자한 중국 IT기업들은 아마존닷컴, 그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줄 귀한 자금줄이다.

내가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저쪽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실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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