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레 무언가를 진태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가 태선 그룹 자체에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진태를 위해서 했던 일은 아니었다.
내가 보유한 태선가 지분도 상당했기 때문에 투자금 대비 이득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태선’은 앞으로 내가 차지할 이름이니까.
진태가 실웃음을 짓고는 나를 바라봤다.
“별 게 아니니 기대는 하지 말거라.”
“할아버지가 주신 것 중에 별 게 아닌 것도 있었습니까?”
“이번엔 다를 수도 있지.”
“늘 기대 이상의 것을 받았으니 기대가 안 된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부담을 주는 내 말에도 진태의 표정은 당연하게도 의연했다.
진태가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며 말했다.
“며칠 뒤에 나와 갈 곳이 있으니 부르면 나오거라.”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진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왔다.
진태의 마지막 말을 듣고 내가 짐작하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진태에게 받았던 것은 태선 그룹의 지분들과 물류센터를 지을 때 받았던 용인 부지.
같이 가야 되는 곳이라면 어딘가의 부지를 주려는 걸까?
생각을 하며 이사회실의 문을 빠져나오는데, 밖에 서 있던 범준과 눈이 마주쳤다.
옆에는 재만도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말없이 나를 노려보는 그들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내 뒷모습을 노려보는 따가운 시선들을 느끼며.
***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정순의 운전기사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백미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순은 와락 인상을 구기며 노성을 냈다.
“안 그래도 생각할 거 많은데 시끄럽게 하지 마. 입 닥치고 운전이나 해.”
“죄, 죄송합니다.”
운전기사는 얼굴을 움찔하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앞 좌석에 앉아있던 비서는 1년 새 두 번이나 바뀐 운전기사를 떠올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정순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진태는 준만을 태선물산의 사장 자리에 앉혀 놓은 것만으로 부족해서 강빈까지 부사장 자리에 올렸다.
이런 파격적인 인사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순을 비롯해 모르는 혈육들은 없을 것이다.
준만네 부자를 향한 진태의 전폭적인 지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집안의 찌꺼기들이 어느새 자신을 앞지르고 있었다.
태선가 내에서 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재만과 영만은 그렇다 치고, 자신보다 어린 남순이 기어오르는 것도 열받아 죽겠는데,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일어난 것이다.
정순이 씹고 있던 손톱의 끝자락이 툭, 하고 끊어졌다.
무언가 다짐을 끝내 정순이 결연하게 말했다.
“차 돌려.”
***
임원회의가 끝나고 늦은 밤, 진태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스탠드의 불빛을 받으며 태선물산에 대한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잠드는 순간까지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은 진태의 오랜 습관이었다.
마카오 타워 시공을 중점으로, 태선물산의 입출금 대장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진태는 고개를 돌려, 옆에 의자에 앉아있는 채규에게 말했다.
“물산 자본이 위험하긴 하네. 정순이 계열사 빠르게 정리해.”
“안 그래도 아까 회의가 끝난 뒤에 스키랑, 산악 쪽에 통보했습니다. 내일 수익조사 끝내고 추가로 지시하겠습니다.”
진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타국의 건선사들에게 약간의 자금 조달을 받고, 선수금도 받긴 했지만 마카오 타워의 시공은 대규모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이었다.
이동통신 사업권으로 들어올 수입이 크겠지만, 아직까지는 부채를 감당해야 할 시기.
시공에 들어가는 자금은 태선물산에서 태선건축으로 융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물산은 현재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강빈이가 자신의 자금을 융통시키겠다, 말하긴 했지만 언제까지 손주 놈의 도움을 받을 순 없지 않겠는가.
채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일 처리는 저에게 맡기시고 주무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똑 부러지게 처리하는 건 잘 알지. 그래도 일을 놓으면 감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게 산송장과 다를 게 뭐냐?”
“그래도… 알겠습니다.”
채규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는 듯 열정적으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태선호텔 계열사들에 대한 자료를 읽고 있는데, 밖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진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채규가 빠른 걸음으로 진태의 방을 나섰다.
채규가 돌아왔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만이 쭈뼛거리며 채규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진태는 대놓고 들으라는 듯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이런 못난 놈. 김집사는 뭐 하는 거야!”
죄인처럼 뒤에서 걸어 나온 김집사가 연신 허리를 굽혀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들어오시겠다는 태도가 워낙 완강하셔서….”
김집사는 집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진태의 피를 물려받은 자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설령 내쫓긴 자식이라 할지라도.
진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 김집사 자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일했지?”
“... 올해 31년이 되어갑니다.”
이 대저택의 역사와 함께 한 인물이 김집사였다.
그러나 오늘 그는 진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진태가 말했다.
“채규야. 김집사 대체할 사람 알아봐라.”
“예. 회장님.”
김집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리쳤다.
“회장님! 이실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진태가 말없이 김집사를 응시하자 김집사는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떨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진태의 한 마디로 사라진 이들만 헤아릴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김집사는 깨달았다.
일련의 사건을 눈앞에서 목도한 동만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모를 기대감을 갖고 이 자리에 온 그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열었던 입은 그대로 경직된 채 굳어있었다.
진태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 집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를 어디로 쳐들은 게야?”
“그게…”
“쯧쯧. 이 한심한 녀석아. 너한테 내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피가 거꾸로 솟아.”
“아버지. 저 반성 많이 했습니다.”
제가 말해도 형식적인 말이라는 것을 아는지, 동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진태는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동만을 내쫓긴 했지만, 영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진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혼해라.”
“예?”
“집안을 통째로 집어삼킬 그놈이랑 떨어지라고.”
“아버지!”
아까의 의기소침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경주의 이야기가 나오자 동만의 눈빛이 단숨에 달라졌다.
제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진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너를 밑바닥으로 끌고 간 여자가 뭐가 좋다고 붙들고 있어? 네 녀석이 내친다고 확실하게 약속하면 다시 태선가로 들이마.”
집안도, 출신도 모든 게 부족했던 여인이 경주였다.
집안의 이득을 위해 정략결혼을 했던 다른 남매들과 달리, 온순했던 동만이 똥고집을 피우며 결혼했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그럴 일 없다며 일어섰을 동만이지만, 외가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는지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태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태선보안 알지? 거기랑 경호 쪽 서비스 몇 개 얹어서 자리 마련해주마.”
“아버지… 보안업체라뇨. 물산을 맡고 있던 제가 그런 작은 계열사 사장에 앉으면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안 하겠단 소리는 하지 않는구나.”
경주 같은 야욕 있는 인물이, 유일한 장점이라곤 태선가의 핏줄이라는 점밖에 없는 동만을 곱게 보았을까?
동만이 집안에서 내쫓기고 시간이 꽤 흘렀다.
동만도 이제 정보다는 실리를 따져야 될 때가 온 것이다.
진태는 마지막 쐐기를 박을 한마디를 던졌다.
“창호랑 창훈이 빛도 못 보고 묻히게 할 생각이냐?”
“그게….”
동만이 쫓겨난 뒤, 태선물산의 이사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창호도 같이 경질되었으며, 창훈은 성형병원을 빼앗기진 않았지만, 태선가의 지원이 끊겨 쉽지 않은 경영을 하고 있었다.
창호성형병원의 큰 손들은 주로 진태와 연관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도 자식들의 아비면 제 몫은 해야지. 경주한테 이혼자금은 넉넉히 쥐여줄 테니 두 번 다시 돌아볼 생각하지 말고.”
***
이른 아침, 출근과 동시에 준만의 사장실에 들렀다.
이동통신사업에 쓰일 기술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만과 협상을 할 주체가 준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설명은 필요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준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제 디지털을 쓴다고?”
“네.”
“아날로그랑 정확히 무슨 차이냐?”
아직까진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던 시대였다.
준만이 태선물산이라는 걸출한 기업을 이끌어가는 수장이긴 했지만, 전자와 관련된 지식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나는 쉽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전자시계 아시죠?”
“알지.”
준만이 자신의 손목에 찬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지금 차고 계신 시계가 아날로그라면, 전자시계가 디지털입니다. 일반 시계는 시침과 분침, 초침이 연속적으로 흐르지만, 전자시계는 1초, 1초까지 세분화해서 나타나죠.”
“더 정확하다는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확할 뿐더러 수용할 수 있는 양이 증가합니다. 이번에 태선반도체에서 개발해낸 기술을 통한다면, 예상 수용용량이 10배가 넘어갈 겁니다. 통화품질이 우수한 건 덤이고요.”
원래라면 앞으로 몇 달은 걸렸을 이 기술이, 켈러의 영입을 통해 단축시킬 수 있었다.
준만은 얼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중국처럼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수용할 수 있는 양이 많아진다는 건 중요하지. 네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지?”
“예. 생각보다 훨씬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준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백부한테 얼마나 뜯어낼지 결정하는 거지. 마카오 타워 시공회의에서 뭘 뜯어낼지 고민했던 게 생각나는구나.”
“이제 뜯어낸다는 말도 시원하게 하시네요.”
“사람이 한결같을 수는 없지 않겠냐. 그래서 말인데 강빈아.”
준만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목표는 한결같냐?”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태선은 제 게 될 겁니다.”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다.
나는 반드시 태선을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