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2002년 한일월드컵을 대표하는 엠블럼, ‘붉은 악마’가 스크린 전체를 채웠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귀면와의 도깨비 같은 얼굴에 사나운 표정, 하얀 뿔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이미지와 똑같았다.
자리에 앉아있던 임원들은 대부분 금시초문이라는 눈치였다.
아무도 손을 들고 있지 않은 와중에 준만이 손을 가볍게 들었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준만이 앉은 채로 말했다.
“말씀하시죠.”
“붉은 악마. 우리나라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할 때 썼던 말 아니냐.”
설마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더 있을까 싶었는데, 열렬한 축구 광팬답게 준만은 알고 있었다.
준만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또한 지금 보시는 화면은 한국의 한 축구 팬클럽의 엠블럼입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을 들은지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같은 이름의 팬클럽도 있었구나.
전생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붉은 악마의 시작을 2002년으로 알고 있지만, 붉은 악마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83년도에 있었다.
그 당시 축구 약소팀이라 평가받던 한국 대표팀은, 멕시코에서 개최되었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해낸다.
이런 대이변을 해외언론에서 ‘붉은 악마’로 표현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이후 한국 축구 팬클럽이 1983년도처럼 한국 축구대표팀이 다시 세계를 경악시키기를 바라며 엠블럼으로 제작한 것이 지금의 붉은 악마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붉은 악마에 향해 있었다.
진태는 영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지만, 딴지를 걸진 않았다.
자신이 흥미가 없더라도 내가 진행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편의를 봐주는 것이리라.
나는 마이크를 들어 말했다.
“월드컵 행사 기간 동안 태선의 제품에 이 엠블럼을 붙여서 판매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 범준이 당한 수치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재만이 말을 이었다.
“저렇게 기괴하게 생긴 것을 전자 제품에 붙이라는 말이냐? 매출 떨어질 일 있어?”
“월드컵 기간 내에 일시적인 행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제품에 붙일 필요 없이 사람들의 선호도를 조사해서 그만큼만 생산하면 될 문제 아닙니까?”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는 제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국대팀의 유니폼 색깔인 빨간색과 4강을 기원하길 바라는 용의 얼굴입니다. 특별한 행사에 맞는 상징 아니겠어요?”
질문하는 족족 내가 대답하니 재만은 다른 딴지라도 찾는지 입을 다물고 붉은 악마의 엠블럼을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질문으로 넘어가기 위해 시선을 옮기는데 진태가 말을 꺼냈다.
“부사장 말대로 사전 조사 진행하고 적당히 제작해서 내보내. 한정판 붙이면 사람들 더 환장할 것 아니냐.”
진태는 아예 대놓고 내 의견을 밀어주고 있었다.
하긴, 내가 메인 스폰서까지 따왔는데 이 정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그것보다 방금 재만의 반응을 보며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진태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내 성과와 관계없이 재만은 나를 깔아뭉개기 위해 무슨 수든 쓸 것이다.
그때가 오기 전에 내 성을 더욱 튼튼히 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태는 아까 했던 말로는 부족했는지 말을 이었다.
“부사장이 이번 한일월드컵 메인 스폰서 따오려고 한 일을 알면 너네다 기겁할 게다.”
가만히 있던 범준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거 따온다고 일본에 경기장 하나를 지어주겠다고 하더구나.”
“그걸로 메인 스폰서를 받아왔다고요?”
재만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나서는 범준을 노려보았다.
진태가 손짓하자 이사회실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채규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태선물산의 서강빈 부사장님의 개인재산으로 시공에 들어갈 비용은 한화로 약 2000억 원이 예상됩니다.”
“2, 2000억 원이요?”
범준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럴 만도 하지.
나에게는 그냥 한 번 배팅해볼 수 있을 정도의 돈이니까.
하지만 범준이 사장으로 있는 태선 식품의 영업이익이 1000억 원이 조금 넘는다고 생각하면, 흔쾌히 시공에 2000억 원을 쏟아부은 나를 보고 까무러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돈이 다 범준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 돈은 수중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금액을 들은 범준이 입을 다물고 자리에 가만 앉았다.
채규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몇 장 넘기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기존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였던 삼륜자동차한테도 입찰금을 돌려줄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 입찰금이 3000억 원입니다.”
재만 라인의 임원들은 많이 놀랐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내 재만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재만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물산 쪽의 임원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를 가져오는데 내가 쓴 돈만 무려 5000억 원인 것이다.
뭐, 이 일이 불러올 이득을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 광고를 맡기는 데 그만한 돈을 쓸 사람도, 쓸 수 있는 사람도 나와 진태 말고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선을 즐기고 있을 때, 진태가 말을 꺼냈다.
“우리 집안 막내한테 그 돈을 받아다가 배만 채우면 되겠어? 호텔 자회사 몇 개 뺀 돈으로 건설에 자금 융통하고 삼륜자동차한테도 사업 몇 개 돌리고 깎아 봐.”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곧바로 대답한 채규와 달리 정순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버지! 제, 제 회사에서 뺀 돈을 왜…?”
“주접떨지 말고 앉아라. 적자까지 내면서 계열사 늘린 거 눈감아 줬더니 뵈는 게 없는 게야?”
“하, 하지만….”
더 말해볼까 싶었던 정순은 진태가 말을 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나로선 예상치 못한 수익이었다.
진태의 말대로 한다면 내 투자금에 대한 부담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뭐, 그 정도 돈 없다고 못 할 투자는 없었지만.
채규가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기곤 말했다.
“그럼 서강빈 부사장님 말씀대로 상품화 진행하겠습니다. 특허권은 따로 내신 겁니까?”
“아뇨. 이 엠블럼은 본디 있던 겁니다. 제가 낸 건 아니지만 특허권은 제 소유입니다.”
이 엠블럼이 디자인특허에 출원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 회의가 있기 전에 찾아갔었다.
붉은악마의 특허권을 갖고 있던 사람은 해당 팬클럽의 회장이자 열렬한 한국 축구의 팬이었다.
내가 이번 월드컵의 투자자임을 밝히자, 잘 부탁한다며 약간의 돈만 받고 특허권을 넘겼다.
나 또한 특허권 사용에 있어서 응원의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사용하라고 말하며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끝났었다.
팬클럽의 회장이 순수한 목적의 팬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이룰 수 있던 결과였다.
채규가 고개를 끄덕인 후 수첩을 꺼내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채규가 사업계획서를 짜서 배분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한일월드컵과 관련된 얘기가 끝났다.
그 뒤로 이어진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진태의 빠른 결단력으로 회의 주제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곧장 안건이 결정되었다.
그중에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은 마카오 타워 시공을 따내고, 큰 이득을 불러올 태선물산과 매출은 줄어들면서 자회사 늘리기에 바쁜, 태선호텔이었다.
태선물산에게 줄 보상은 마카오 타워 시공이 끝난 뒤 성과를 보고 결정하는 것으로 미루었고, 태선호텔은 자회사 몇 개를 합병하는 것으로 얘기가 끝났다.
정순은 세상이 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진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회의 끝. 다들 나가 봐.”
항상 그 누구보다 회의실에서 먼저 나가는 진태였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런 진태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줄지어 나가는 임원들 사이에서 진태의 자식들은 자리에 못 박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억울하다, 서운하다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아직도 진태에게 저런 게 통하는 줄 안다는 게 웃겼다.
들어봤자 뻔한 얘기에 진태의 예상되는 반응.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진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빈이. 너는 남고.”
나는 몰래 빠져나가려다 걸린 수강생처럼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진태가 주변을 둘러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네놈들은 왜 남은 게냐?”
준만을 비롯한 임원들이 대부분 나가고 자리에 남은 것은 나와 진태, 그리고 재만과 정순, 영만이었다.
재만이 태연하게 말했다.
“자리에 앉아계신다면 할 말이 남은 것 아닙니까.”
진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콩고물 얻어먹으러 온 거면 줄 거 없으니 다들 나가라.”
“아버지…. 여기 제 회사입니다.”
자신이 사장으로 앉아있는 태선전자의 이사회실에서 나가라니.
재만의 황당한 심정이 이해가 가긴 했다.
그러나.
“말은 바로 하자. 아직은 내가 너한테 빌려준 회사 아니냐?”
재만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진태가 남아있는 자식들을 일일이 쳐다보곤 말했다.
“너희도 빌린 것에 대해 할 말이 있는 게야?”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회장님!”
정순과 영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진태가 나가라고 손짓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갔다.
진태가 재만에게 하는 말을 들었으니, 자신들에게 좋은 소리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오히려 나는 집에서 불러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 부담스러운 상황을 연출한 진태의 의중이 궁금했다.
“할아버지.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집에 따로 부르시지. 다들 있는 앞에서 혼자만 남으라고 하시는 게 답지 않으십니다.”
“오늘 회의에 대해서 바로 이야기하고 싶어 그랬다. 네놈이 그리 태선에 좋은 일을 가지고 왔는데 들뜬 놈이 아무도 없어.”
“그야 제가 혼자 낸 성과라 그런 거 아닙니까.”
“너한테 물산 말고 태선 전체를 광고하라고 했을 때 네 반응이 어땠냐?”
“네?”
강변 산책로를 걸으면서 했던 진태와의 대화.
태선물산을 메인 스폰서로 올리겠다는 내게, 진태는 태선그룹 전체를 광고해보라고 했지.
태선 전차라….
내 꿈에 다가가는 것 같았고, 그걸 진태가 알고 있는 것 같아 기뻤다.
진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는 그때 제 일인 것처럼 들떴다. 그게 무엇 때문일 것 같으냐.”
“그야… 저희 그룹이 다 잘되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웃기는 놈. 그런 설탕 발린 말을 들으려고 하는 줄 알아?”
진태의 말에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럼 말만 살짝 바꾸겠습니다. 제 그룹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저희가 아닌 제.
태선 그룹에 대한 내 소유욕을 드러내자 그제야 진태는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니까 얼마나 보기 좋냐. 다른 놈들을 면전에서 무시한 이유가 이거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못 알아듣습니다.”
“너 말고 다른 놈들은 제 밥그릇 지키기 바쁘단 말이다. 자기 스스로 태선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 것 같냐?”
“일단 제 눈앞에 계시네요.”
내 말에 진태가 껄껄대며 웃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웃음이 잦아들자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네게 줄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