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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21화 (121/249)

#121화

황비서의 명찰에 실장이라는 직급이 눈에 띄었다.

“승진 축하해. 황실장.”

황비서, 아니 이제 황실장은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도 않으며 말했다.

“부사장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네 능력으로 단 거지, 뭘.”

“이직하면서 부사장님이 힘쓰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직급에 맞게 더 열심히 할게요.”

“지금처럼만 해주면 돼.”

내가 태선물산으로 오게 되면서 황실장도 곧바로 이직했고, 받게 된 직급은 실장이었다.

태선 물산 안에서도 비서실이 있었지만, 황실장은 나의 직속으로 따로 부서가 창설되었다.

앞으로도 나의 비서 역할은 황실장이 수행겠지만, 밑으로 다수의 팀원들이 생긴 것이다.

황실장은 내가 했어야 할 증권사의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 이제 어지간한 증권사의 임원보다 날카로운 사업 능력을 갖게 되었다.

실장을 달기엔 아직 젊은 나이지만, 능력은 충분했다.

내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연결되는 번호를 보니, 태선 건축 쪽이었다.

“서강빈입니다.”

“부사장님. 저 건축 박현욱입니다.”

아무래도 마카오 타워 건축 현황을 알려주려 전화를 건 듯했다.

당연히 비서실이나 기껏해야 임원진에게 올 줄 알았는데 사장이 직접 전화하다니.

“박사장님이 직접 전화 주셨네요.”

“사장이라고 해도 지주회사 부사장만 하겠습니까. 부사장님이 제 상사신데 직접 전화 드려야죠.”

“그 정도로 격식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쁘실 텐데 편하게 하세요.”

육십을 바라보는 현욱이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조금 어색했다.

새삼 태선 물산의 부사장이라는 자리가 어떤 위치인지 깨달았다.

현욱은 오히려 자신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대하는 게 오히려 제가 편해요.”

“그렇다면 박사장님이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어제부로 료시끄 건설을 마지막으로 마카오 타워 시공에 참여한 모든 기업이 1차 공사 대금을 지급했습니다.”

우선 태선 건설이 선공사를 진행하고 후에 건설비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보니, 일정 주기로 보내온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말했다.

“연체되는 곳 없이 빠르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그간 말썽이었던 철물비도 정상화가 되어서 예정보다 빠르게 완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료들은 부사장님 이메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완공하면 박사장님께 충분한 프리미엄이 지급될 겁니다. 완성까지 조금만 힘내주세요.”

“하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걱정되지 않게 잘 처리하겠습니다.”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무용 전화를 끊자 거의 동시에 휴대폰에서 준희에게 전화가 왔다.

준희는 들뜬 목소리였다.

“대표님! 저 여준희 사원입니다.”

“오랜만이네. 그래, 중국에선 잘 지내지?”

“네. 5성급 호텔에서 머무르는 데 전혀 문제없습니다. 하하.”

“다행이네. 무슨 일 있어?”

“오늘부로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까지 계약 진행했어요. 조건은 그때 대표님이 정하셨던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 앤 무어에서 보낸 팩스 받았어.”

그렇지 않아도 아까 앤 무어에서 작성한 계약서가 팩스로 왔기 때문에 확인한 참이었다.

내가 검토했을 때도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준희가 내심 기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태선물산으로 돌아갈까요?”

준희의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와본 적도 없으면서 뭘 돌아가.”

“대표님 못 뵙고 가는 게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돌아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중국의 3대 IT기업 투자도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남은 것은 그 기업들이 내 어항 안에서 대어가 될 때까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

여느 때처럼 태선전자의 이사회실에서 임원회의가 열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태선물산 쪽 사람들이 있는 곳에 앉았다.

태선물산의 전 부사장이자 현재는 태선중공업의 사장 자리에 있는 윤지형과 준만이 보였다.

태선물산 자회사 중에선 태선 건축만 마카오 타워 시공으로 인해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준만에게 먼저 인사하고 지형에게도 깍듯이 인사했다.

“윤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까 좋네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하하. 바빠서 찾아뵙지 못했네요. 최근엔 해외 출장이 잦았습니다.”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저야 언제든 시간 낼 수 있는 사람이니 시간 나실 때 연락 한 번 주시죠.”

지형은 현욱과 마찬가지로 태선물산 자회사의 사장이었지만, 진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준만은 사장 자리에 오르고 나서 지형과 함께 일을 자주 했는지 이젠 꽤 편해 보였다.

이번 임원회의에는 부사장 이상급만 참여했기 때문에 전보단 사람이 적었다.

그럼에도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이긴 했지만.

태선택배의 사장인 재심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서대표님! 이제는 부사장님이라고 불러야 될까요?”

“하하. 그래야 될 겁니다. 보는 눈들이 많아서요. 여기 앉으시죠.”

내가 일부러 비워두었던 옆자리를 두드리자 재심이 자연스럽게 앉았다.

태선택배는 태선가 내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단적인 회사였지만, 내 소유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모인 이들 중 가장 내가 챙겨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재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새 택배 시장은 어떻습니까?”

“순항 중입니다. GB택배와 합병 이후 국내시장 점유율 80프로 달성 이후 계속 올라가는 추이입니다. 물론 해외 진출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요. GB로지스틱스가 그간 쌓아왔던 연줄이 통하고 있어요.”

“좋습니다. 해외에서 추가로 계약할 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미국에 있는 제 회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말씀만으로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기분 좋게 재심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전자 쪽에 자리 잡은 정순이 연신 손톱을 물어뜯으며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부사장 자리를 달고, 정순이 찾아왔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적의를 숨기지 못하더니 오늘도 같았다.

별로 신경 쓸 가치를 느끼지 못해 시선을 돌렸다.

물산 쪽 임원들과 사업 관련 얘기를 하고 있는데 진태가 나타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진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진태가 앉는 것을 확인한 직원이 스크린에 화면을 띄웠다.

화면 상단에 적혀 있는 것은 ‘태선그룹 4분기 전략회의’.

말이 전략회의지, 그동안 이룬 성과에 대해 평가받고 진태가 그에 따라 몫을 쥐여주거나 뺏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이번 분기 마카오 타워 메인 시공사라는 걸출한 사업권을 따낸 태선 물산 측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매출이 저조했던 호텔, 관광 계열 사람들의 긴장되어 잔뜩 질린 얼굴이 대비되었다.

정순도 그 사이에서 역시 굳은 얼굴로 진태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레저 사업을 맡고 있는 정순은 사실 태선가에서 가장 많은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본 총액은 레저계열 전체 합이 1조 원 안팎으로 다른 자식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즉, 숫자만 많지 안은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곧바로 성과 발표가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회의의 시작은 기존과 다르게 흘러갔다.

회의의 이름 다음으로 넘어간 화면에는 ‘태선과 한일월드컵’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었다.

재만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한일월드컵 메인 스폰서라니요? 거절당했던 사업 아닙니까?”

자신이 해내지 못했던 일이 거론되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진태가 재만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이번에 태선 그룹이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를 맡게 되었다. 옥내 광고는 물론 한국 선수들 유니폼에 태선의 이름이 새겨질 게야.”

“대체 어떻… 설마.”

재만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이내 재만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나는 무심하게 재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임원들 역시 모두 나를 쳐다보며 나의 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에서 드러난 감정은 놀람, 의아함.

나는 재만을 바라보며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재만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 네가 어떻게…?”

대답은 내가 아니라 진태가 했다.

“태선 이름을 알리는 데 주체가 누가 중요하냐? 회의 방해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

“... 알겠습니다.”

재만은 나를 한껏 노려보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진태가 손을 내젓자 스크린을 맡은 직원이 화면을 다음으로 넘겼다.

화면에는 내가 이룬 성과가 직관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해외 언론사들의 표기를 한일월드컵으로 통일한 것과, 원래는 일본에서 치렀어야 할 결승전을 우리나라로 갖고 온 것.

다들 화면을 보고 있자 진태가 말했다.

“이번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가 우리 태선이 되었다. 누구 덕분인지는 다들 알아야지. 서강빈 부사장. 일어나.”

진태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시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피곤할 일이 생길 것 같아 곤란한 와중에 진태가 말했다.

“모두 박수.”

박수?

진태의 입에서 박수라니?

저런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던 사람이던가.

재만의 눈치를 살피던 임원들이 하나둘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진태까지 마지막에 박수를 치자 다들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표정 관리를 하며 박수를 치고, 심지어 재만까지 박수를 치고 있는 와중에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진태가 그를 지목했다.

“서범준. 그 태도는 뭐냐?”

진태의 말에 박수 소리가 일제히 멎고 이사회실은 삽시간에 싸늘한 분위기로 변했다.

당황한 범준이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 예?”

“네 아비도 못 했던 일을 네 사촌동생이 해왔어. 커다란 공을 세웠는데 고작 박수 한 번이 힘들더냐?”

범준이 헉, 하는 소리를 내더니 숨을 낮게 내쉬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그럼 확실하게 해.”

“네. 죄송합니다.”

진태의 말을 들은 범준이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서 있는 사람도 회의 진행을 위해 서 있던 직원 한 명을 제외하면 범준밖에 없었다.

싸늘한 눈초리가 범준에게 쏟아지자 범준은 얼굴이 붉어지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고요한 이사회실에서 범준의 박수 소리만이 울렸다.

재만이 뒤에서 뭐라고 하자, 범준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더 거세게 박수쳤다.

그 한심한 모습에 내가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범준의 박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진태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이어졌다.

범준이 시선을 나에게 고정하고 눈을 부릅뜬 채로 자리에 앉았다.

진태가 나를 향해 말했다.

“홍보 방안에 대해 서강빈 부사장이 준비해온 게 있다더군. 한 번 들어보지.”

“네.”

진태에 말에 짧게 대답하고 스크린을 담당하고 있던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도 미리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나에게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넘겼다.

나는 마이크를 받아 손으로 툭툭 치고는 입에 가까이 대며 말했다.

“저는 이번에 태선그룹이 메인 스폰서를 맡은 만큼, 태선 제품에 한일월드컵에 걸맞은 엠블럼을 새겨 상품성과 홍보 효과를 높일 계획입니다.”

한 호흡을 쉬고, 내 말에 주목하고 있는 청중들을 향해 말했다.

“혹시 붉은 악마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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