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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20화 (120/249)

#120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일본의 대형건설사들이 해외 현지화로 우후죽순 일본을 빠져나간 상황에서 카지마 건설은 유일하게 일본에 잔류한 건설사였다.

카지마 건설의 지주회사, 카지마그룹은 카지마 건설 또한 해외현지화로 눈을 돌리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던 중에 카지마 건설의 대표, 마츠다 코노가 한일월드컵 경기장인 ‘사이타마 스타디움’의 시공권을 가져오며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되었다.

방금 전의 전화를 받기 전까진.

쨍그랑!

코노가 던진 유리잔이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코노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과 펜대, 심지어 CRT모니터까지 바닥으로 내던졌다.

튀어오른 파편에 코노의 손등에는 생채기가 났다.

코노의 비서, 히로시는 손에 걸레를 들고선 겁에 질린 채 한쪽 벽에 붙어있었다.

언제 던진 건지 모를 화분은 깨진 조각과 흙이 뒤섞여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히로시가 양손을 들며 진정시키려 애를 썼지만, 코노는 요지부동이었다.

기어이 책상까지 넘어뜨린 코노가 노성을 터트렸다.

“태선 이 빌어먹을 새끼들…!”

방금 코노에게 전화를 걸었던 상대는 일본의 외교부 차관, 켄타.

켄타는 말을 빙빙 꼬아서 말하긴 했지만, 말하려고 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놈들도 똑같아. 이제 와서 손을 떼고 태선한테 넘기라고? 지진 전만 해도 완공을 눈앞에 둔 사업을? 히로시. 우리가 투자한 예산이 얼마야.”

히로시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말했다.

“...97억 3500만 엔 정도 됩니다.”

액수를 들은 코노가 머리를 짚고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카지마 회장님은 아직도 연락 없고? 일단 시공을 끝내야 만회라도 할 거 아냐.”

코노는 이 모든 일의 시작되었던 두 달 전을 회상했다.

예상대로라면 사이타마 스티디움을 짓는 데 쓰일 예산은 150억엔 안팎이었다.

정부에게 약속받았던 시공대금이 200억 엔이었으니, 건설사의 평균 영업이익보다 훨씬 남겨 먹는 알짜배기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사이타마 스타디움은 카지마 그룹의 지시를 무시할 수 있던 이유이자, 일본에 잔류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나 사이타마 스타디움은 준공을 앞두고 지진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예산을 남겨 먹기 위해 내진설계를 부실하게 하기도 했지만, 이런 재앙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진으로 인해 정부에게 받은 시공 대금을 초과하는 예산이 쓰이게 되자, 카지마 그룹 측에서의 반응은 싸늘했다.

코노가 카지마 그룹의 회장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돌아온 답은 그저 계열사 내에서 해결하라는 것뿐이었다.

히로시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며 코노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말했다.

“경기장을 지어주는 대가로 요구한 게 고작 결승전 한 경기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시공권은 여전히 일본 정부에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카지마 건설이 진행해 왔던 시공이다.

마지막 수로 추가 대금을 요구하기 위해 켄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돌아온 답은,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빠른 시일 내로 마무리해야 된다는 것.

그게 안 된다면 태선건설에 시공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타마 스타디움이 무너지며 근처 시설의 피해가 컸다.

그 피해를 복구하는 데만 해도 손해가 자꾸 빠져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건축까지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코노는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코노가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향한 곳은 청와대였다.

일본 정부에게 한일월드컵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잡음 하나 없이 평화로운 곳이었다.

처음 왔을 때 생경하기만 했던 청와대의 길을 익숙하게 걸어갔다.

그때와 같이 만남은 영빈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 태영, 외교부 차관 희문, 재정경제 수석차관 호민과 이루어졌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세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호민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일본에서 서 부사장이 아주 큰 일 했습니다! 여기 계신 장관님도 얼마나 칭찬했는지 몰라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잘했어요. 아주. 서 부사장이 일본에 다녀오고 나서 해외 기사들이 싹 다 한일월드컵으로 정정 표기 하던데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일본 측에서 이유까지 설명하진 않은 듯했다.

하긴, 일본의 경기장을 자국 기업도 아닌, 태선 건설이 지어주겠다고 했으니 외부에 알리기는 꺼려질 것이다.

나도 지금 알려져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 태연하게 말했다.

“발로 뛰어다니니 해결이 되더군요. 일이 잘돼서 저도 다행입니다.”

태영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겸손까지 갖춘 친구라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요? 일본 정부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합니다.”

“그간 국가교류에 힘써오신 장관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한 번 띄워주자 태영이 좋다고 입꼬리를 올렸다.

태영의 옆에 앉아있던 희문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결승전 경기도 한국에서 진행한다던데 정말 어떻게 설득한 겁니까?”

“서로의 이득을 챙겼다.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저만의 비즈니스 방법이 있거든요.”

“이거 하나만 묻겠습니다. 나중 가서 저희에게 불이익이 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럼 저도 약속 하나만 하겠습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이죠.”

자신감 넘치는 내 말에 희문이 의심을 거두고 물러났다.

태영이 희문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하하. 고생한 서부사장한테 할 말이 따로 있지, 이 사람아. 기업가들 한둘 상대하나? 아무튼 서부사장.”

“예. 장관님.”

태영이 말에 무게라도 실으려는 듯,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이번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는 태선이 맡게. 삼륜 자동차 측에는 얘기해두었어.”

벌써 얘기까지 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기에 벌떡 일어났다.

태영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태선이 되겠습니다.”

“하하. 공손하기까지. 서부사장. 사람이 너무 완벽해서 되겠어요?”

그때와는 완전히 태도를 뒤집은 태영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나는 다시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제 저희 태선은 물론 한국 전체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겁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청와대 측과 좋은 교류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우리도 시키는 일 잘하고, 원하는 걸 갖다주는 모범기업과 오래 일하고 싶네. 이번처럼만 하면 문제없을 거야.”

정부의 심부름꾼을 원한다고 대놓고 얘기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갖다주고 내 이득만 챙기면 될 일이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

청와대를 나와 내가 향한 곳은 진태의 저택이었다.

마지막에 진태를 만났을 때, 메인 스폰서의 이름으로 ‘태선’을 허락받았기 때문에, 오늘 메인 스폰서로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제는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장 차를 타고 진태의 저택으로 향했다.

서재로 들어서자 진태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뉴스 채널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마침 한일월드컵의 귀추가 주목된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진태가 TV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말했다.

“왔냐?”

온다는 말도 없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 말했다.

“저인 줄 어떻게 아신 겁니까?”

진태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감히 나를 찾아오는데 약속도 안 잡고 오는 놈이 너 말고 더 있을 것 같으냐?”

진태의 말에 멋쩍게 웃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진태의 옆자리에 앉았다.

진태가 TV를 끄고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냐.”

“태선 건설이 일본의 경기장 하나를 건설해주기로 했고, 그 대가로 메인 스폰서를 받아왔습니다.”

중간에 한일월드컵의 명칭 확정과, 결승전 얘기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진태도 이미 보고는 들었을 테니 간단하게 말해도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는 그 재만조차 가져오지 못한 일이다.

돈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청와대와 인맥이 두터운 진태조차 거절당했다.

진태는 감탄사를 내뱉고는 말했다.

“허허. 그 복잡한 일을 그렇게 명쾌하게 정리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것 잘 안다.”

진태가 보기에도 대단한 성과를 이번에 가져온 것이다.

진태는 실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건설해준다는 걸 보니 사이타마를 말하는 거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태선의 정보 라인을 뭐로 보고. 네놈이 월드컵 건드린다길래 알아봤지.”

일본의 월드컵 경기장 중 재건축에 들어가는 곳은 사이타마 스타디움밖에 없지만, 일본에서도 쉬쉬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내가 일본 정부와 접선했다는 것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던 일.

아무리 진태의 정보 라인이 대단하다 해도 이것까지 알아봤을 리는 없으니, 정보 라인도 대단하지만 진태의 감 또한 상당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지출이 컸겠지만, 네 녀석이 불리한 조건을 떠안지는 않았을 터. 대체 어디까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게냐?”

사이타마 스타디움 시공비에 메인 스폰서 입찰비까지 삼륜자동차에 물어내려면 상당한 지출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이 좋은 성적을 거둘 것 같습니다.”

“웬 동문서답이야?”

“사람들의 관심이 여느 때보다 뜨거울 거라고요. 그리고 태선은 그 흥행에 힘입어 한국은 물론 세계에 그 이름이 퍼질 겁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바라보는 태극전사들의 유니폼에는 ‘태선’의 이름이 당당하게 박혀있을 것이다.

“제가 쓴 돈과 광고효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클 겁니다. 이번에 제가 이번에 태선을 알리는 데 쓴 돈은, 그때 돌려주시죠.”

“내가 언제 네가 한 몫을 덜 챙겨준 적 있어? 성과만 확실하게 내오면 계열사라도 하나 통째로 내어주지.”

“계열사 하나로는 안 되실 겁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진태는 웃지 않았다.

진태가 나지막이 말했다.

“한 번 지켜보마. 네가 성사시킨 그 일이 어떻게 되돌아올지.”

“실망하실 일 없을 겁니다.”

내가 기억하던 일들은 여지없이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보다 월드컵에서 거둔다는 좋은 성적은 뭐냐? 본선도 못 가는 팀을 뭘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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