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아까는 왜 말린 거야? 이런 거 참는 성격 아니잖니.”
“그래도 고모인데, 둘 중 한 명은 참아야죠. 그동안 아버지가 참아왔으니 이번엔 제가 참는 겁니다.”
만약 나까지 나서서 정순을 헐뜯었다면, 정순은 정말 이 악물고 우리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준만은 할 말은 꼭 하는 내가 참은 게 의외라는 듯 말했다.
“맞는 말이구나. 네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으니 조마조마하긴 했다.”
“하하. 누가 들으면 오해합니다.”
“오해가 아닐걸? 그것보다 아침부터 집무실엔 무슨 일이냐? 어디 다녀와도 곧장 집무실에 틀어박히던 녀석이.”
“일본 가서 계약 따냈습니다.”
나는 일부러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준만은 놀랐는지 여러 번 되물었다.
“설마… 청와대에서 했던 이야기 그대로 된 거야?”
“네.”
“진짜로?”
“하하. 진짜예요. 청와대와의 조건 달성했으니, 이제 만나서 한일월드컵 메인 스폰서만 받아 오면 됩니다.”
준만은 얼이 빠진 듯했다.
하긴, 국가 간의 일을 내가 나서서 해결하리라곤 예상 못 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돌린 거야? 그놈들 우리 정부 권고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명칭을 내보내는 놈들인데.”
“다른 건 아니고, 일본 지진으로 중단된 스타디움 건설 비용 제가 대기로 했습니다.”
“그, 그게 얼만 줄은 알고 말했어?”
“2000억 원이 조금 넘더군요. 제가 댈 테니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세요. 큰 비용이지만, 저희 물산이 메인 스폰서도 맡았습니다. 아, 그리고 결승전은 우리 태선에서 건설할 서울 스타디움에서 진행하기로 말 맞췄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준만이 벙찐 채로 말했다.
“그걸 다 가져왔다는 거냐?”
“네. 이제 아버지 더 바빠지실 겁니다.”
준만이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나는 바쁜 게 좋다. 일이 재밌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비용적인 측면은 나도 보태마.”
“괜찮습니다. 저야 차고 넘치는 게 돈이잖아요. 한 달이면 벌어들일 돈이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녀석…. 아, 그리고 나는 마카오에 한 번 갔다 올 것 같다.”
“언제쯤 가십니까?”
“스케줄 잡힌 대로라면 한 달 뒤?”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네가? 웬일이냐.”
준만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반응이 당연했던 것이, 집에서도 밥을 잘 먹지 않을 정도로 나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와 같았다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중국에서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중국 정부의 해외사업본부장, 한옌.
이번에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
준만에게는 그냥 둘러 말했다.
“저도 이제 물산 직원인데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다른 임원 보내는 것보다 네가 처리하는 게 확실하긴 하지. 그것보다 마카오에 왜 가는지는 안 물어보냐?”
준만의 말에 아차 싶었다.
내 일만 생각하다 보니 준만에게 왜 마카오에 가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무슨 일로 가는 겁니까?”
“자식, 빨리도 물어본다. 별건 아니고 건설 현장 시찰 좀 하고 관리감독 한 뒤에 한옌 총감과 차 한잔하고 오면 돼.”
“혹시 이동통신사업권에 대해 말 나온 게 있습니까?”
마카오 타워 메인 시공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이동통신사업권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체계화를 거친 뒤에 좋은 값을 받고 태선전자에 넘길 생각이었다.
준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르겠다. 우리나라처럼 빨리빨리 하는 나라가 아니다 보니 매사가 느려. 아마 형식적인 정기 보고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네가 한번 이야기 나눠봐라.”
“그 정도야 뭐. 알겠습니다. 한 달 뒤라고 하셨죠?”
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맞춰서 스케줄 비우고 갔다 올게요.”
“그래. 고맙다.”
중국에 가려면 통역사가 필요하다.
에릭의 말에 따르면 6개국어를 한다는 새로운 직원이 궁금해진다.
***
전용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마카오국제공항이었다.
최근 해외로 나갈 일이 많아 비행기를 자주 타긴 했지만, 전용기를 타고 와서 그런지 오히려 개운했다.
입국장으로 나오니 ‘서강빈 대표님’이라는 글자가 적힌 피켓을 흔드는 남자가 보였다.
다들 깔끔하게 프린트한 피켓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혼자 양팔을 벌려야 겨우 들 정도로 큰 피켓을 들어서 눈에 띄었다.
에릭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던 말이 이런 의미였다니.
한숨을 내쉬고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시력이 안 좋은지 동그랗고 큰 안경 사이로 굴절되어 눈이 무척 작아 보였다.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이발한 지가 꽤 되었는지 곱슬머리가 덥수룩했다.
“제가 서강빈입니다.”
다가가서 말을 걸자 그는 황급히 피켓을 내리더니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여준희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서 주변의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굽혔던 허리를 피고는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영 어리바리해 보였다.
“앞으로 인사는 묵례로 짧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목소리는 조금 낮추시고.”
“알겠습니다.”
그래도 대답 하나는 시원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에릭 장 말로는 능통한 언어가 6개국어 정도 된다던데 맞습니까?”
“네. 더 됩니다. 중국어, 광둥어, 영어, 일어, 아랍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됐습니다. 중국어랑 광둥어는 가능하시다는 거죠?”
“중국어는 현지인 수준으로 가능합니다. 광둥어는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사업 관련 대화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언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보다 쓸 수 있는 언어가 10개국어는 넘는 것 같은데 그쪽으로 재능이 엄청난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언어는 어떻게 배웠습니까?”
“음… 어려서부터 배워와서 그런지 쉽게 배우는 것 같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유능한 건 좋네요. 차는?”
“회사 카드로 구입해서 주차장에 있습니다. 기사 분이… 아! 쓰푸!”
쓰푸는 중국에서 사부라는 의미도 있지만, 일상적으로는 기사를 뜻하는 말이다.
준희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국인 남성 한 명이 주차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기사의 뒤에 있는 차는 메르세데스 벤츠 사의 맥라렌이었다.
벤츠 내에서도 대표적인 슈퍼카.
“차는 네가 고른 거야?”
“네. 에릭 총괄님이 대표님이 쓰실 건 무조건 최고로 쓰라고 했거든요. 하하.”
“잘했어. 보여지는 위치니까 앞으로도 가격 신경 쓰지 말고 처리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준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사 쪽으로 이동하니 반질반질한 은색의 차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준희는 기대감이 실린 눈빛으로 차를 바라보았다.
차는 주차장 한가운데에 있었고, 차종은 메르세데스 벤츠 사의 맥라렌이었다.
벤츠 내에서도 대표적인 슈퍼카이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은색의 차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세상에… 제가 이런 차를 타볼 날이 오다니.”
“나랑 같이 일하면 익숙해질 거야.”
기사가 중국어로 뭐라고 하더니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차의 내부로 들어가자 붉은색 베이스의 부드러운 가죽으로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컵홀더에는 커피가 든 잔이 꽂혀 있었다.
준희가 커피잔을 내밀며 말했다.
“얼음이 다 녹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남아있네요.”
“미리 주문한 거야? 센스 있네.”
에릭이 괜히 준희를 뽑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카오 타워의 부지로 향하며 준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GB에는 어떻게 지원한 거야?”
“GB인베스트먼트야 워낙 유명하잖아요. 게다가 온갖 투자를 성공시키면서 단기간에 미국 재벌회사에 들어갔으니 모를 수가 없죠.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케임브리지에서 단숨에 날아갔죠.”
하긴 나는 워싱턴포스트에서 인터뷰를 했고, 에릭도 저번에 뉴욕타임즈에서 인터뷰를 했으니까 증권인이 아니더라도 꽤 인지도가 있을 것이다.
“투자 일 쪽은 원래 관심이 있었나?”
“전공이 그쪽이고,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GB인베스트먼트에 오기 전까지는 통역 알바를 하고 있었어요.”
“회사에 다니진 않고?”
“저 학교 다니다가 취업한 겁니다. 하하.”
학생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일 처리가 깔끔했다.
내가 직접 뽑은 게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직원으로 쓰기에 충분했다.
마카오 타워 부지에 도착했다.
임시 주차장도 보이지 않아서 공사 자재들이 즐비한 공터 한쪽에 주차했다.
마카오 타워는 아직 뼈대밖에 없었지만 모양새가 꽤 그럴싸했다.
전생에서 내가 기억하던 것과 거의 동일했다.
준희가 끝을 헤아리는 듯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엄청 높은데요?”
“300M 이상은 되니까.”
준희가 감탄하며 마카오 타워를 바라보았다.
건설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반장과 노동자들이 눈에 띄었다.
마카오 타워 설계도면은 까다롭고 복잡한 기술을 요하는 부분이 많다고 들었는데, 작업하고 있는 것을 보니 태선건설이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작업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그들을 지나치고 현장 옆에 있는 임시 거처에 들어갔다.
내부는 깔끔하고 넓었다.
설계도면과 공사 관련 자료들이 널브러져 있는 테이블 안쪽에 한옌이 앉아있었다.
나를 본 한옌이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옆에 있던 준희가 곧바로 통역을 시작했다
“대표님이 올 줄 몰랐다는데요? 뉘앙스로 볼 때 조금 불편한 기색인 것 같습니다.”
한옌은 준만과 나에게서 대놓고 로비를 요청한 전적이 있었다.
물론 우리는 거절하고 이동통신 사업권이라는 큰 이익을 거두었지만.
그때 생각이 나서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옌에게 중국어로 간단하게 인사했다.
“닌하오.”
닌하오, 중국어로 정중한 인사라고 들었던 말이었다.
한옌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
준희가 곧장 통역하며 말했다.
“앉으시랍니다.”
나와 준희는 둥근 테이블에서 한옌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옌의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둘러 널브러진 종이들을 치우고 차를 내왔다.
한옌을 보면서 말했다.
“공사 현장은 문제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동통신사업권을 어떻게 활용할까 궁금하신 것 같아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준희가 중국어로 통역해 곧장 말하고 한옌이 다시 말했다.
“사업 시작을 언제 할지 서둘러 정해달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기간제 계약이니,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독점기간 5년, 권리 기간 5년으로 총 10년의 기간제 사업권이다 보니 빠르게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 아직 마카오 타워가 완공도 되지 않았는데 사업권부터 뿌릴 생각을 하다니.
중국 정부 측에서 바라본 이동통신사업권이 얼마나 쓸모없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여 불쾌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준희에게 말했다.
“마카오 타워가 완공되기 전까진 계획서 작성해서 보낸다고 전해.”
준희가 한옌에게 말하고,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준만의 말대로 차 한잔하고 시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자리였다.
물론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나는 준희에게 말했다.
“바이두를 아냐고 물어봐.”
준희가 곧장 통역하기도 전에 한옌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바이두를 자네가 어떻게?”
한옌과 리옌홍은 베이징 대학교의 선후배 사이로, 나이 터울이 꽤 되지만 같은 동호회 출신으로 친분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
준희에게 통역을 들은 뒤 말했다.
“바이두의 리옌홍. 그자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고 전해.”
통역을 듣고 있는 사이에 한옌의 눈이 일순 커졌다.
그리고 곧장 준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뭐래?”
“자기가 그동안 대표님을 오해했다고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