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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14화 (114/249)

#114화

쨍한 햇빛 아래로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지만 몸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 전 생일이라고 내게 보내온 에릭의 선물 덕분이었다.

고가의 낙타모로, 신의 섬유라고 불리는 비큐나가 주 소재로 쓰인 짙은 밤색의 코트였다.

겉보기엔 가늘어 보이는데 밀도와 탄력은 높으면서 부드러워 꽤나 마음에 들었다.

건물에서 나온 지 30분 정도 되었는데, 아직까진 마사토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로 결정하고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놀고 있었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영균처럼 험악한 인상의 사람이 나타나면 그 웃음이 멎을 것 같아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

사람들은 정장을 입고 뒷짐을 쥔 채 서 있는 영균을 피해 다녔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아이를 가져본 적은 없었다.

진태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발악하는 혈육들을 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다.

눈을 감고 생각을 비우고 있는데 에릭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야?”

“일이 있어야 연락하나요. 그냥 가끔 안부나 전하는 거죠.”

천연덕스러운 에릭의 말투에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지내고 있어?”

“저야 늘 하던 대로 대표님이 보내주신 기업분석하고 투자 돌리느라 바쁘죠. 그래도 주말엔 가끔 부모님 뵈러 가고 있습니다.”

“잘했네. 그래, 잘 챙겨드려.”

“참, 코트는 받으셨어요? 그거 돈 있어도 쉽게 못 구하는 겁니다. 하하.”

부드러운 코트를 손으로 한 번 쓸고 말했다.

“따뜻해. 부드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하하. 대표님이 주신다면 뭐든 좋죠.”

“투자 기업 쪽은?”

“아, 구글이 이번에 페이지랭크의 체계화를 끝냈대요. 기존에 야후를 쓰던 사람들이 대거 넘어왔답니다.”

본격적으로 구글이 세계로 뛰어들 준비를 끝냈다.

아마존닷컴의 수익을 훨씬 뛰어넘을 수익이 과연 얼마나 될지 기대되었다.

“지원 필요하다고 하면 네 재량으로 얼마든지 해.”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하하. 대표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월드컵 경기장 관련해서 일본 출장.”

“여전히 글로벌하시네요.”

“원하는 게 많으니까 어쩔 수가 없네. 아, 그리고 RT통신과 하마뱅크도 한 번 알아봐.”

“어, 두 기업 다 일본 IT관련 주 아니에요?”

“맞아.”

RT통신과 하마뱅크는 일본의 IT관련 주로, 버블 붕괴로 인해 줄줄이 도산되던 일본의 기업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이다.

그중 하마뱅크는 1980년대 중반에 창업한 이래로, 소프트웨어 유통업과 IT관련 투자를 주사업으로 세계에서 인정받을 기업이었다.

내가 이어서 말했다.

“버블 붕괴로 겨우 부도를 면한 기업들이야. 투자 가치는 너도 기업분석 들어가면 알게 될 테니까 일단 매수부터 들어가. 지금 주가의 두 배까지는 싹 다 긁어모아.”

“네. 그럼 하마뱅크를 먼저 알아볼게요. 하마뱅크가 IT관련 투자로 지분이 여러 곳에 분배돼 있거든요.”

“그럼 더 좋고.”

에릭은 자세한 얘기를 할 필요도 없이 내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이렇게 호흡이 잘 통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했다.

“전에 말했던 직원은 어떻게 됐어?”

“뽑아서 교육 중이에요. 하버드대를 나온 한국인 친군데, 무슨 말만 하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게 확실히 머리가 좋아요.”

“언어 쪽은?”

“영어는 당연히 되고 전에 말씀하셨던 중국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불어, 러시아어에 또 뭐가 있었지? 아! 희랍어까지 한다고 하더라고요.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나네요.”

나도 언어에 꽤 능통하다고 생각했는데 저 정도까진 아니다.

저게 가능할까 싶어 에릭에게 말했다.

“없는 거 지어낸 건 아니지?”

“저도 의심이 가서 확인도 했는데 진짜더라고요. 잘 교육시켜서 한국으로 보낼게요.”

“바쁜데 면접까지 하느라 고생했다.”

“대표님 일이 제 일이죠, 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에릭을 보며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에릭과 전화를 끊자 곧장 전화가 울렸다.

켄타였다.

시간을 보니 내가 주었던 2시간이 지나기 직전이었다.

에릭과 통하는 사이에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 부사장님! 한국에 가신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시간이 아직 안 지났잖아요. 결정은 했습니까?”

“예. 승인 났습니다. 바로 계약하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이제 돌아가고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직접 계약을 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애초에 월드컵 경기장의 시공비는 내가 감당할 생각이었지만, 대외적으로 계약하는 곳은 태선물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 준만에게 알려 사람을 보낼 생각이었다.

***

한국으로 돌아오고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태선물산으로 출근했다.

어제 미팅에 대해서 보고하기 위해 준만의 집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준만의 비서가 말렸다.

“부, 부사장님. 나중에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표정을 보니 달갑지 않은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준만의 집무실에서 듣기 싫은 고성이 새어 나왔다.

목소리를 들으니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신비서님은 일 보세요.”

“하지만… 알겠습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신비서도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물러났다.

노크를 했음에도 집무실에서는 반응이 없고 여전히 고성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당황한 표정의 준만이 먼저 보였고, 옆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고모.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했음에도 나를 보고 있는 정순의 표정에서 불쾌감이 확실하게 보였다.

정순은 특유의 듣기 싫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도 왔구나? 잘됐네. 자리에 앉아봐.”

자신의 집무실도 아닌데, 앉으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우선 소파에 앉았다.

정순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을 텐데.

“무슨 일입니까?”

“태선가 사람이 태선에 오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니? 준만이 너도 저기 가서 앉아.”

준만이 한숨을 내쉬며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밑도 끝도 없이 저러니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일단 상황을 들어보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준만까지 앉자 정순이 소파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오라버니나 아버지와 다르게 눈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 들고 있는 건 못 봐.”

“갑자기 그런 말이 왜 나옵니까?”

정순이 안 그래도 듣기 싫은 목소리를 더욱 높이며 말했다.

“허, 참. 어이가 없어서! 태선물산 말이야! 태선물산이 준만이 너한테 저절로 굴러온 거니? 주제도 모르는 조카 놈이 동만오빠 등에 칼 꽂고 지 아비한테 바친 걸 누가 몰라?”

“고모. 큰아버지가 할아버지 뒤에서 어떤 일을 꾸몄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공정하게 이 자리를 얻은 겁니다. 그 회의에서 할아버지가 할 말 있는 사람은 분명 그때 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그럼 회장님 앞에서 말을 했어야 됐니? 분수도 모르고 나대는 꼴이 열받아서 직접 온 거야. 이번에 물산이 또 큰 건 따냈다며? 강빈이 너는 청와대에까지 초대받고.”

배 아파서 저런다는 걸 저리도 돌려 말한다.

애 싸움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심지어 태선그룹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고작 저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준만도 자식 앞에서 유치한 누나의 모습을 보자니,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태선 물산 취임 직후 불어난 일 때문에 피곤할 텐데 고작 이런 일에 시달려야 하나 싶은 얼굴이었다.

정순이 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대놓고 이야기할게. 후계 구도는 당연한 거고 이제 태선가에서 뭐든 받아 갈 생각 하지 마. 물산에 만족하고 더 넘보지 말란 말이야!”

혹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전략일까 싶어 정순을 유심히 쳐다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속마음을 훤히 보이고 으르렁거리는 정순의 모습을 본 준만의 반응이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준만은 표정은 여느 때처럼 평온했지만, 주먹을 꽉 쥔 손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준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순을 응시하며 말했다.

“서정순 사장님.”

“하! 누나한테 사장님? 이제 선이라도 긋는 거야?”

“누나? 정말 당신이 내 누나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내가 언제 동생으로 인정받은 적이나 있어? 다른 형, 누나들이 좋은 것들 물려받을 때 혼자 별종 취급당하다가 얻은 거라곤 변방에 있던 태선증권사밖에 없어.”

“너 설마 나한테 반말하는 거야?”

같은 대화를 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순은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준만은 정순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물산은 내 능력으로 가져간 거야. 누나처럼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물려받은 게 아니라. 아직도 나를 천치로 생각했나 본데, 그거 단단히 오해한 거야. 이젠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아.”

“뭐, 뭐?”

준만이 말을 하던 와중에도 계속해서 말하던 정순은, 준만의 말이 끝나자 당황한 기색으로 쳐다봤다.

늘 호구처럼 당해왔던 동생이 당당하게 제 의견을 피력하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준만은 천천히 정순을 지나쳐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정순을 바라보고 말했다.

“나도 이제 내 몫 챙길 거야. 물산? 이거 하나로 만족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누나도 이를 악물고 덤벼야 할 거야.”

“이놈이 정말!”

벌떡 일어나려는 정순 앞을 가로막고 섰다.

나도 준만처럼 시원하게 할 말을 뱉고 싶지만, 개싸움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두 손을 들어 진정시키려는 제스쳐를 취하고 달래듯이 말했다.

“고모. 이렇게 찾아오셔서 이야기하시니까 아버지도 서운하셔서 홧김에 한 말일 겁니다. 저희 아버지 욕심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투자하고 수익 내는 것에 재미 들려 사업하시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동만 오빠를 보낸 놈들이 바로 너희인데, 나를 바보로 아니?”

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가 택배 사업을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는지 아시죠? 고모는 안 될 사업이라고 했지만 결국 잘 됐잖아요. 그땐 서운한 마음이 컸지만 이젠 지난 일이라 괜찮습니다.”

정순은 내가 택배사업을 위해 찾아갔던 일을 떠올리는 듯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와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태선그룹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중국까지 발 벗고 나서서 따온 이동통신사업권은 물산이 아니라 결국 전자가 가져갈 거라는 건 알고 계시죠?”

“뭐? 전자가 가져간다고?”

심술이 나있던 정순은 이동통신 사업권을 태선전자에게 넘긴다는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재만에게 이동통신 사업권을 넘긴다는 것은 사실이다.

태선 자체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선 제 역량에 맞는 곳이 가져가는 게 맞으니까.

물론 대가로는 그에 합당한 것을 받아 올 것이다.

내 속내를 짐작하기는커녕, 정순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정하시라는 말입니다. 태선가의 중역을 맡고 계신 고모가 이런 일로 화내셔야겠습니까?”

정순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가 하는 일들이 태선을 위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데 이제 인정해주시고요.”

정순은 생각하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말했다.

“네가 한 말 지켜야 될 거야. 그리고 서준만. 너 앞으로 조심해.”

준만은 싸늘한 시선으로 정순을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정순이 내 앞을 지나가며 손으로 밀며 말했다.

“비켜.”

박차고 나가는 정순은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에둘러 정순을 보냈다.

지금은 칼을 벼르고 있는 중이기에.

시퍼렇게 칼이 벼려질 그 순간.

정순의 목이 날아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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