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일본 기상청은 오늘 오전 10시 37분경 일본 사이타마현의 남서쪽 1km 지역에서 규모 7.1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지진의 진앙은 북위 35.60도, 동경... 지진 발생의 깊이… 강도 높은 지진으로 부상자가 속출… 사이타마 스타디움…”
차에 탑재된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신호가 잘 안 잡히는지 중간중간 끊기긴 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뉴스의 내용처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진도 7.1 강도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번 지진으로 열차의 바퀴 일부가 레일에 벗어나 쓰러졌고, 수도관이 파열되어 맨홀에 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완공을 앞둔 월드컵 경기장, 사이타마 스타디움은 재해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지진이 일어나고 일주일 뒤, 나는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통역사는 대동하지 않았고, 사이타마행 전용기에 탄 것은 나와 경호실장인 영균, 경호팀원 두 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 호황이었다.
세계 2위의 국가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33개의 기업이 세계 50위 안에 들어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IT버블의 붕괴를 시작으로 큰 위기를 맞은 상황이었다.
설비 투자가 대폭 감소하면서 일본의 제조업들은 쇠락했고, 일본을 내로라하는 수출대기업들은 해외 현지화를 통해 일본 국내의 제조업체들을 버렸다.
일본이 기나긴 장기 불황을 맞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균이 미리 준비해놓은 차에 올라탔다.
차의 운전은 영균이 직접 맡았으며, 다른 경호팀원 두 명은 따로 차를 빌려 우리의 뒤를 쫓았다.
차를 타고 바라본 거리의 풍경은 처참했다.
쓰레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길모퉁이나 구석에 콘크리트 부스러기들이 쌓여있었다.
나름 청소를 한 것이겠지만,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방치된 모양이었다.
황비서가 연락한 일본축구협회에 도착했다.
월드컵 담당자와 일본 정부 쪽의 인사가 먼저 자리에 앉아있었다.
일본 축구 협회의 회장, 마사토와 일본의 외교부 차관, 사토 켄타.
켄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내가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말하자 켄타와 마사토는 놀란 눈치였다.
켄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일본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시니 기분이 좋군요. 오늘 이야기가 잘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저도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미소를 띠고 있는 나를 보며 마사토가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투자 쪽으로 큰 재능이 있으신 것 같더군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하. 당당한 모습이 멋지시네요. 일본을 겸손의 나라라고도 부른다지만, 저는 서 부사장님 같은 분을 더 좋아합니다.”
마사토가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이어서 말했다.
“혹시 일본기업 중에 투자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귀띔이라도 해주시죠.”
“하하. 좋은 정보가 있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담은 뒤로하고 제가 여기 온 것부터 얘기해볼까요.”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켄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도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월드컵과 관련된 부분을 다시 논의하자니요?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 아닙니까?”
켄타의 말에 기가 찼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일본 측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예? 그게 무슨…”
“공식명칭을 한일월드컵으로 한다고 FIFA에서 승인까지 떨어졌습니다. 일본도 결승전을 가져가면서 이를 받아들였고요. 그런데 아직도 언론은 일한월드컵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켄타는 살짝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한국은 언론, 출판의 자유라는 말을 모르나 봅니다? 정부가 그런 사소한 일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가 요구한 게 아니고요?”
“그건….”
일본 언론사들이 일한 월드컵으로 보도하도록 정부의 압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월드컵이 끝나고 밝혀진 사실이다.
내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켄타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사토는 켄타의 눈치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이번엔 마사토를 응시하며 말했다.
“마사토 씨. 제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들으셨습니까?”
“예. 지진으로 무너진 사이타마 스타디움에 재건축을 의뢰받기 위해서 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현재 일본의 국내 건설업체 중 월드컵 시작에 맞춰 완공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사이타마 스타디움은 뼈대가 되는 골조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진 상태다.
심지어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은 다른 건축물들에 비해 골조 공사비가 높은 편.
사이타마 스타디움 건설에 올인한 카지마 건설은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다른 대형 건설업체들은, 정부의 설비 투자 감축으로 인해 해외 현지화로 시선을 돌린 상황이었다.
이에 전생에서는 일본이 큰 시공비를 지급하며 독일의 건설사에 시공을 의뢰했었다.
마사토가 뒤에 서 있던 사내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미야키! 나가 봐. 문단속 철저히 하고.”
“예. 회장님.”
미야키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사내가 나간 것을 보고는 마사토가 말을 이었다.
“조심스러운 사안이라 이런 것이니 이해해주십시오. 아직 대외적으로는 카지마 건설이 시공을 그대로 잇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국내 건설업체들의 협력도 생각중입니다.”
“세계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뛰어다닐 경기장을요?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시공했다가 무슨 욕을 들어먹으려고 그럽니까.”
전생에서도 독일의 한 건설사가 시공을 맡을 정도로, 일본 내의 남아있는 건설사들 중 빠른 시일 내에 완벽하게 경기장을 만들 업체는 없다.
“이나모토 준이치의 활약이 기대되지도 않나 봅니다. 게다가 다른 자국의 선수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준이치는 2년 전에 있었던 청소년 월드컵의 주축 멤버이자, 올해 시드니 올림픽에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선수였다.
게다가 지금은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명문가인 아스날 FC의 입단이 확정되면서 여론은 더욱 들끓고 있었다.
수비형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골들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준이치의 이름까지 거론하자 마사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사토를 보며 고개를 저은 켄타가 말했다.
“마츠다 코노 씨가 쉽게 수락하지 않을 겁니다.”
코노라면 마카오 타워의 메인 시공사를 결정하던 행사에서 봤던 인물이었다.
태선 건설이 메인 시공사를 맡는 조건으로 코노에게 사이타마 스타디움 인근의 휴양시설에 대한 시공권을 받았었다.
다른 비용이 아닌 시공권을 대가로 줬던 이유는, 다른 데 눈 돌릴 새 없이 경기장 건설에 온 힘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 사이타마 스타디움이 지진으로 폭삭 주저앉았으니 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켄타에게 말했다.
“코노 씨가 시공권을 다른 건설사에 팔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아뇨. 사이타마 스타디움의 시공권은 국가가 갖고 있습니다. 코노 씨에겐 그저 의뢰했을 뿐이지요. 다만 기업 간의 거래에서 도리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도리요?”
“네. 카지마 건설을 잘라 내더라도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보니 켄타는 처음부터 나에게 사이타마 스타디움의 재건축을 맡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카지마 건설의 처분에 대한 얘기를 내 앞에서 꺼낸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 재벌그룹 소속의 한 투자자가 200억 엔 규모의 사이타마 스타디움의 시공을 맡았다.”
“네?”
의아해하는 켄타와 마사토를 두고 계속 말을 이었다.
“투자자의 축구에 대한 순수한 애정 때문에 진행한 이 일을 보고 감복한 정부와 일본축구협회는 월드컵 결승전 경기를 한국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어떻습니까?”
“그니까 지금 서 부사장님 말은 건설비용을 일체 청구하지 않고 경기장을 지어주겠다는 겁니까?”
“예. 비용적인 측면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200억 엔이면 한화로 2200억 원이 조금 넘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결승전을 한국으로 갖고 올 수 있다면, 한국의 세계적인 인지도는 물론이고 국내에서 태선의 위상도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켄타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건설비용을 청구하지 않고 경기장을 재건축해준다면 카지마 건설도 어쩔 수 없겠네요. 하지만 그 대가가 결승전인 게… 흠.”
“단 한 번의 경기를 20억 엔에 사겠다는 건데 싫은 겁니까?”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척했다.
당황한 마사토가 따라 일어나면서 내 앞을 막아섰다.
“뭐 하는 겁니까? 비키세요.”
“아니 거절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얘기를 좀 더 들어보시고…”
“저는 얘기 끝났습니다. 할 얘기가 있다면 그쪽에서 하셔야죠.”
마사토와 켄타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켄타가 말했다.
“저희는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건 윗분들 결정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서 부사장님!”
켄타가 말하던 중 몸을 돌린 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윗분들에게 잘 말해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들이 말하는 윗사람이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외교부장관, 그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내각총리대신이겠지.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시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쓴 제 하루가 얼마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작년의 수익을 하루 단위로 나누면 제가 하루에 버는 돈이 20억엔 정도더군요.”
20억엔. 한화로 약 220억 원이다.
황비서의 조사로 정리된 어림잡은 수익이다.
미국 쪽은 복잡한 회계 절차로 인하여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된 어림잡은 수익이다.
아직 기업공개가 되지 않은 투자 지분과 주식들도 있기 실제론 그 이상이었다.
20억 엔이라는 숫자를 들은 켄타의 입이 쩍 벌어졌고, 마사토는 믿기지 않다는 듯 얼이 빠져 보였다.
그들을 향해 말했다.
“두 시간 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없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시간 내에 승인받겠습니다.”
협회실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언론사 쪽에 일한이 아닌 한일월드컵으로 명시하라고 분명하게 지시 내리십시오. 하나의 언론사라도 잘못 표기한 곳이 있다면, 짓던 월드컵 경기장을 다시 무너뜨리고 떠날 테니까요.”
켄타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사토의 손에는 어느새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