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진태의 건강검진이 끝나고 식사는 병원에서 함께했다.
병원식이라고 해서 별반 기대하지 않았는데 VIP실의 특식은 차원이 달랐다.
검진 때문에 하루 종일 공복을 유지했던 진태를 위해 나온 식사는 기본적인 전복죽부터 시작해 바닷가재 무침과 칠면조의 다리 살만으로 만든 백숙 등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고급졌다.
그런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도 진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영 입맛이 없네.”
“그래도 드셔야지 위와 장이 제 기능을 합니다. 제가 먹여드리기라도 해요?”
“예끼! 이놈아. 누굴 시체로 아는 게냐?”
진태가 버럭 성질을 냈지만 결국 숟가락을 드는 것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진태는 전복죽이 담긴 숟가락을 내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뭘 웃어?”
“그냥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할아버지 같아서요.”
“내가 그럼 할아버지지, 네 애비냐?”
“아뇨. 하하. 우선 드세요.”
“너는?”
“저도 당연히 먹어야죠.”
건강검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미리 밥을 먹고 온 참이었지만, 나도 숟가락을 들었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함께 밥을 먹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긴다지 않던가.
게다가 아까부터 풍겨오는 전복죽 냄새가 내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진태는 정말로 입맛이 없었는지 먹는 둥, 마는 둥이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식사를 해치운 것은 나였다.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입 안에 넣을 때마다 진태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그릇에 담긴 전복죽을 다 먹고 진태의 그릇을 슬쩍 보자, 진태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그릇을 내 쪽으로 밀었다.
“병원까지 와서 할애비 밥을 탐내는 건 너밖에 없을 게다.”
“더 시켜드려요? 천하의 서회장이 시키면 곧장 대령하겠죠.”
“됐다. 너 더 먹어라.”
진태는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나는 진태의 전복죽까지 바닥이 보일 정도로 긁어먹었다.
진태가 말했다.
“복스럽게도 먹는구나.”
“그렇게 먹는 게 호감 사기 좋다네요.”
언젠가 들었던 것을 말하자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을 보니까 맞는 말도 같다. 처음으로 내 밥그릇을 뺏은 놈인데 혼낼 수가 없구나.”
젓가락으로 칠면조 백숙을 몇 번 뜯어먹고 식사를 끝냈다.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옆에 서 있던 병원 직원들이 재빨리 음식들을 치우고 가져갔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진태를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 고혈압이잖아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진태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어떻게 안 게냐.”
“전에 저보고 약 꺼내달라고 할 때 성분표를 외워뒀어요. 찾아보니까 고혈압과 관련된 약이던데요.”
그때 꺼내주었던 약통에 성분표가 적혀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대충 둘러대었다.
의약 관련 지식은 없지만, 진태가 먹던 약은 칼슘길항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고혈압약 중 하나였다.
혈관을 확장시켜 혈압을 낮추고, 심장의 수축력을 억제하면서 박동 수를 조절하는 데 쓰였다.
진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나이 먹고 지병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별것도 아니다.”
긴장감 하나 없는 표정을 보며 나는 진지하게 말하기로 했다.
“할아버지. 고혈압이 전 세계에서 사망 위험 요인 1위인 건 아세요?”
“그게 뭔 소리냐.”
이곳에 오기 전 읽었던 기사의 내용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망 원인 1, 2위인 심혈관질환과 뇌혈관질환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게 고혈압이라고요. 그리고 고혈압이 치매의 요인이 된다기도 한다는데, 만약 치매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럽니까?”
내 말을 듣고 있던 진태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벽에 똥칠이라도 한다는 게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내가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며 말한 이유는 전생에서 진태의 사망 원인이 바로 고혈압성 질환이었기 때문이다.
늘 전문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진태지만, 방심하면 골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진태가 딱딱하게 말했다.
“건강 문제는 내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신경 쓰지 말거라.”
“고혈압 완치되면 그때 신경 끄겠습니다.”
“한 마디를 안 지는구나.”
말을 하며 진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네 말마따나 건강 챙겨야 되지 않겠냐?”
VIP실을 나가는 진태의 뒤를 쫓았다.
진태의 차를 타고 간 것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강변 산책로였다.
갈색으로 시든 건조한 갈대가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묘한 풍경이었다.
차에서 내린 진태는 곧장 산책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태와 나의 20미터 앞뒤에는 경호원들이 따라붙었다.
산책 한 번 하는데도 조심해야 되는 자리라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말없이 걷기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까.
진태는 옆에 있던 수행비서가 건넨 물로 목을 축이고는 말했다.
“푸른 집은 어떻더냐.”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평화롭더군요. 차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내 말에 진태는 껄껄대며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천하태평인 건 어딜 가나 똑같구나. 긴장도 안 되더냐?”
“처음에는 긴장됐습니다. 조선 시대로 돌아간다면 왕족을 만나고 오는 거니까요.”
“결국은 안 했다?”
“예. 그들도 결국 수익을 좇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더군요. 제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만 난 줄 알고 반창고 하나를 붙인다기에 이왕 줄 거면 통으로 달라 했습니다.”
청와대에선 이동통신사업을 쓰레기로 알고 있겠지만, 그거야말로 알짜배기 사업이다.
물론 내가 전생에서 이동통신사업을 받았던 현암건설을 기억해서 이용할 방법을 알아낸 것이지만.
진태가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며 말했다.
“앞에 부분은 뭘 말하는 건지 알겠고, 반창고는 뭘 말하려는 거냐?”
“부도난 기반건설 대신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시공을 마무리하는 게 청와대에서 붙이려던 반창고입니다.
“통은?”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로 태선물산이 발탁될 수도 있습니다.”
진태가 발걸음을 멈추고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놈들은 하나같이 여우 같을 놈들일 텐데 어떻게 구워삶은 게야? 아니 그보다 메인 스폰서라면 미리 입찰했어야 된다고 전자에서도 까인 일인데?”
태선전자도 뒤늦게 메인 스폰서에 참여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나도 몰랐던 일이다.
이어지는 진태의 말을 들어보니, 재만이 힘을 써보려 했지만 해외 쪽 기업은 정부가 손 쓸 방도가 없고, 삼륜자동차에서 오랫동안 공들인 사업이라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발탁에 실패하고 아쉬워했을 재만이 눈에 선했다.
게다가 재만도 못 한 일을 내가 해낸다면?
재만은 복통으로 몸을 뒤집어 구를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대신 제가 일한이 아닌 한일월드컵으로 확정지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 때문에라도 저는 일본에 갈 생각이고요.”
“네가 무슨 수로 국가 간의 일을 건든단 말이냐?”
당연히 무슨 수가 있다.
인간이 어찌할 수도 없는 재앙이 일본을 덮칠 예정이니까.
“제가 언제 근거 없이 거래한 적 있습니까.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서 지금은 넘어가시죠.”
“흠….”
진태는 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냈다.
“만약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로 발탁된다면 태선물산이 아닌 태선의 이름으로 나가거라.”
“예?”
당황스러웠다.
진태의 제안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진정 원했던 일을 오히려 진태가 먼저 요청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계열사가 아닌 태선 전체.
이름을 알리는 일이라면 태선물산뿐만 아니라, 태선 자체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고, 가지게 될 것은 한국 최고의 기업 태선이 아니라, 세계 최고에 자리 잡은 태선이다.
전생에서도 태선이 달성하지 못했던 세계재벌 그룹 1위의 자리.
아직 태선물산의 부사장 자리에 있는 나로선, 스폰서로 태선 물산밖에 걸 수 없지만 태선의 회장, 서진태의 이름을 빌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태선가 내에서 유일하게 태선이란 이름을 세상에 내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권한을 지금 내게 허락했다.
나는 이상하고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식도 아니고 손주인 나를, 이제 승계 구도에 두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표현하지 못할 감정에 휩싸여 멈춰 서 있었다.
진태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앞서나가고 있었다.
***
강빈과 헤어지고 늦은 저녁, 진태는 서재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안경의 브릿지를 한 번 올리고는 신문을 넘기는데 갑자기 신문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을 신문에 가까이 댔음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채규가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진태는 대답하지 않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규가 말했다.
“상주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진태가 손을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러고선 서랍을 열어 고혈압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의자에 완전히 기댄 진태가 말했다.
“채규야.”
“예. 회장님.”
“요즘 들어서 자꾸 자식들이 눈에 밟힌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게 자식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겁니다.”
“눈에 넣으면 자식이 아니라 손주라도 아픈데 무슨 헛소리야.”
진태는 뻑뻑한 느낌이 들었는지, 연신 눈을 찌푸리며 문질렀다.
채규가 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래도 정해놓긴 해야 될 거 아니냐. 지금 내 나이면 자다가 그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회장님….”
“아, 이 사람. 요즘 따라 왜 그래? 자네도 나이가 들긴 한 모양이야. 사람이 감정적으로 변했어.”
채규는 진태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배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그게 문제야. 그래도 장남이니까, 재만이한테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건 너도 알 거다. 그 정도면 자식 중에서 능력도 제일 낫고. 그런데 자꾸 딴 놈이 눈에 밟혀.”
채규가 짧게 웃은 뒤에 말했다.
“요새가 아니라 몇 년 전부터 늘 해오던 말 아닙니까.”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세월을 가늠하는 듯 진태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채규가 말했다.
“강빈이는 이제 부사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승계 구도를 잡으려면 우선 사장 자리에 올려야 합니다.”
“그놈이 하기 싫다는데 뭘 어쩌겠어?”
예전에 동만이 퇴출되고 있었던 임원회의에서 진태가 판까지 만들어줬음에도 강빈은 태선물산의 사장 자리를 거절했다.
그래도 이번에 태선물산의 부사장 자리를 받긴 했지만, 태선반도체의 부사장 겸임은 거절했다.
진태는 강빈을 어떻게든 재만과 비슷한 위치에 앉혀 명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강빈은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제는 진태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
하긴, 장손도 아닌 강빈이를 진태의 힘으로 올린다 한들 그다음이 문제였다.
주변의 인정이 없다면 허수아비 왕에 불과하니까.
강빈의 천부적인 투자 수완과 경영 능력도 몇십 년이나 태선을 위해 일해온 재만의 시간을 이기긴 힘들었다.
진태도 강빈이 제 능력만으로 태선을 집어삼켜야지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태선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강빈이 성장할 때까지 이 야속한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자식들은 눈에 불을 켜고 태선가를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그럼 강빈은 제대로 겨뤄보기도 전에 밀려나겠지.
유일하게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손자가 자리 잡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 보고 싶은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진태가 입을 뗐다.
“채규야. 네가 강빈이 설득 좀 해봐라. 부사장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제대로 된 계열사 사장 자리에 올려주겠다고.”
“회장님의 말씀도 안 듣는데 제 말이야 듣겠습니까.”
“하기사.”
진태가 옅게 웃었다.
제 의지로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강빈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