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태선증권사의 본부장 자리는 완전히 정리하고 태선물산으로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규모 자체가 다른 회사다 보니 낯설긴 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준만의 배려로 나에게 주어진 일은 따로 없었고, 늘 해오던 대로 개인투자를 위한 초석을 다지는 것이 내 주 업무였다.
내가 기존에 쓰던 본부장실도 웬만한 중견기업 사장실보다 넓었지만, 태선물산의 부사장실은 그의 2배는 될 정도로 널찍했다.
인테리어도 마음에 들었지만, 한쪽 벽의 절반에 해당하는 창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바람이 정말 기분 좋았다.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들고 있던 펜을 잠시 내려놓고 여유를 즐기는데, 전화가 울렸다.
태선물산의 비서실로부터 온 전화였다.
“부사장님. 행복홈쇼핑의 홍해성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안내할까요?”
“5분만 있다가 안내해.”
“알겠습니다.”
해성과 보기로 한 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았는데 일찍 온 모양이었다.
나는 짧지만 이 여유를 조금만 더 즐기기로 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얼굴의 해성이 들어왔다.
예전에 어깨까지 길렀던 머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화려한 의상을 입었던 이전과 달리 점잖게 차려입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 낯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성을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우선 앉으시죠.”
“전에 뵀을 때는 본부장이셨는데, 이제는 이런 대기업의 부사장님이시네요.”
해성은 본부장실을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도 자리에 앉고 옅게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투자자로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기업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지요. 하하. 큰 금액을 투자해주셨으면서, 경영은 저에게 맡기셨으니까요. 게다가 부사장님이 만들어놓으신 사업방안을 토대로 행복홈쇼핑의 성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건물도 이전해서 마지막으로 보실 때와는 아예 딴판일 겁니다.”
사업확장에 따른 건물 이전을 허가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게 벌써 2년도 더 된 일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홈쇼핑 사업의 수익은 꾸준히 입금되고 있었다.
처음에 김희선 가방으로 대박을 터트린 후에 살짝 시들해지긴 했지만,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서 오히려 케이블 방송 가입자 수가 크게 늘면서 매출은 원복을 넘어 연일 흑자를 갱신하고 있었다.
해성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감사하다고 말할 기회만 찾고 있었는데, 부사장님께서 워낙 바쁘셔서 못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직접 만나 뵙고 전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아닙니다. 저야 처음 기반만 마련해줬지, 이렇게까지 올린 건 홍사장님의 덕분이지 않겠습니까.”
서로 훈훈한 대화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투자했던 사업들을 계속 신경 쓸 수는 없었지만, 몇 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비추는 것이 좋았다.
특히 해성은 전생에서 한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모조 다이아로 홈쇼핑이 위기를 맞았었으니까.
화기애애한 대화를 지속하던 중 나는 일부러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 글쎄. 저번에 인조 다이아몬드를 천연인 것처럼 속여 팔려는 사람이 있지 뭡니까.”
“예? 갑자기 무슨….”
“홍사장님이야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저를 뒤통수치려는 사람은 절대 그냥 안 보냅니다. 그 사람이 만든 공장까지 밝혀내면서 재산 몰수시키고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큰일 날 뻔하셨군요. 그런 사람들은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죠.”
“네. 이래서 제품을 사고팔 때는 잘 살펴봐야겠더군요.”
해성은 일을 할 때 항상 꼼꼼히 실수 없이 하라는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홈쇼핑에서 선보일 제품을 검수할 때 좀 더 신경 쓰겠지.
가끔 걱정이 되다가도 전생이었다면 한 번쯤 사고를 쳤을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을 보면 이젠 믿어도 되겠다 싶었다.
어쨌거나 해성은 홈쇼핑 관련 분야에선 한국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는 경영자니까.
해성에게 고생했다는 의미로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줬다.
해성은 기분 좋은지 활짝 웃으며 본부장실을 나갔다.
한 번에 끝내기 위해 해성 바로 다음 타임에 다른 미팅을 잡았다.
다음은 디지털사운드의 조상민 사장이었다.
아직까지 음악용 휴대기기 시장에서 디지털사운드가 MP3가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압도적이었다.
출시 1년만 해도 괜찮은 수익이었는데, 자리를 잡은 지금은 든든한 자금줄 중 하나였다.
물론 2005년에 애플의 아이팟이 출시되고, 다른 대기업들이 연이어 출시하는 기기에 밀리게 되지만 아직까진 MP3의 호황기였다.
이제는 꽤 부티가 나는 상민이 자신감 넘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원래부터 쾌활했던 건지, 성공하고 나서 바뀐 건지 상민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며 빠르게 걸어왔다.
“서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사장이라니, 누가 들으면 큰일 납니다. 앉으시죠.”
내 말을 듣긴 했는지 상민은 생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미팅을 잡긴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해야 할 말이 있나 싶었다.
애초에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지식은 상민이 더 잘 알고 있었고, 이제 마케팅을 추가로 하지 않아도 MP3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자리 잡을 정도로 인지도가 최상이었다.
격려를 하고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민이 말을 꺼냈다.
“아직도 김정필이 저희 기술을 팔아넘기려 한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하하. 그만큼 현재가 좋다는 거겠지요?”
“좋아 보이니 다행입니다.”
“서사장님께는 무한하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신 투자금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더 최선을 다해서 사업을 키우겠습니다.”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너무 무리하시지는 마세요.”
MP3는 어차피 몇 년 뒤에 저무는 한철 장사였다.
투자보다는 경영에 힘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상민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대표님 말이라면 회사를 팔라고 해도 팔겠습니다.”
“하하….”
해성 때와 마찬가지로 사담을 조금 나누다가 격려를 하고 상민을 내보냈다.
상민이 의욕만 앞서는 것 같아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열정적인 모습이 나쁘진 않았다.
***
“받은 지 3개월도 안 됐다니까 그러네.”
볼멘소리를 하는 진태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태선병원이었다.
태선병원은 진태의 투자를 기반으로 설립한 곳으로 공식적으로 태선그룹의 소유는 아니지만 진태 소유의 병원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에서는 한국대학병원과 함께 두 손가락에 뽑힐 정도로 명망 높은 병원이었다.
진태의 저택에 상주 의사만 두 명 둘 뿐 아니라, 한국대학병원의 정교수와 태선병원의 전문의를 개인 의사로 두고 있었다.
한국 최고 병원들의 VVIP인 것이다.
이때쯤 진태의 건강에 적신호가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진태를 억지로 끌고 왔다.
투덜대면서도 따라오기는 한 진태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손자가 건강도 챙겨주고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쯧.”
진태는 혀를 차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진태를 병원에 모시고 가겠다는 친인척이 지천으로 깔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목적이 눈에 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겨우 이런 걸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인지, 진태가 말은 저렇게 해도 순순히 따라왔다.
병원 입구로 들어가자 웬 머리가 훤히 벗겨진 노년의 남성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의사 가운에 적힌 명찰을 보니… 병원장?
남자는 우리 앞에서 멈추더니 허리를 숙이면서까지 인사했다.
주변 시선이 우리한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발길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괜히 시선을 끌기 싫어 당일에 말한 건데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진태의 경호원들조차 일반인처럼 변장하고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 덩치 때문에 눈에 띄긴 했지만 오히려 시선을 끌어서 진태와 나에 대한 시선 분산의 효과도 있었다.
나는 질책하듯 병원장을 보며 말했다.
“태선그룹 회장님이 아파서 병원에 왔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실 생각입니까? 구경거리 만들지 말고 돌아가세요.”
“아, 죄송합니다.”
병원장이 또다시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장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옆을 보니 진태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봤다.
“언제는 재벌 흉내 내는 놈 같았는데 이제 보니 그냥 재벌이구나. 흐흐.”
“다 할아버지께 배운 거죠. 아무튼 언론사 쪽에는 얘기해야겠습니다.”
“이럴 거면 집에서 하지, 왜 이곳까지 나온 게야.”
“할아버지 저택에 웬만한 병원 뺨치는 의료장비가 있는 건 알지만, 정밀검사 받으려면 큰 병원에 와야죠.”
내 말을 듣고도 진태는 영 귀찮은 눈치였다.
나도 더 이상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말없이 진태를 모시고 미리 들었던 7층으로 움직였다.
대기하는 시간은 당연히 없었고, 내가 놀랐던 것은 VIP의 건강검진을 위한 특별한 방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환자복으로 준비된 옷은 한눈에 봐도 새 옷이었는데, 검은색 실크에 금실로 ‘태선’이 박혀있었다.
진태의 수행비서가 환자복을 받고 정해진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럼 갔다 오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딱!
같이 가겠다는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나는 맞은 곳을 매만지며 억울하다는 듯 진태를 쳐다봤다.
진태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가긴 어딜 가? 내가 오줌 누는 것까지 보여주랴?”
“아, 예….”
수행비서와 함께 진태는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검사실 옆에 배치되어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VIP가 검사를 받고 있는 동안 쉬는 곳이어서 그런지, 넓은 공간에 사람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었다.
정장을 입은 사내가 오가며 필요한 것이나 마실 것을 권하는 것 말곤 말이다.
나는 미리 챙겨온 수첩과 펜을 꺼내어 한일월드컵 관련 사업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다.
진태의 건강검진을 의뢰할 때 최대한 정밀검사를 해달라고 해서 그런지 시간이 꽤 소요됐다.
두 시간쯤 흘렀을까.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진태가 보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가서 물었다.
“건강 문제는 없는 거죠? 결과지 저도 보여주세요.”
“뭐가 그리 급한 게야. 검진이 무슨 받았다 하면 뚝딱 결과가 나와? 나올 때까지 며칠은 걸리니까 그때 가서 알려주마.”
말의 내용과는 달리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아 내가 신경 쓰는 것이 괜히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늘 채규를 대동하고 병원을 갔지, 가족과 함께 온 적은 없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혈육들조차 진태에게 무언가를 뜯어내고자 다가갔다고 생각하니, 진태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먼저 성큼성큼 앞서가는 진태를 보며 말했다.
“다음에도 저랑 같이 와요.”
“생각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