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드넓은 잔디밭 안쪽에서 푸른 기와집이 눈에 보였다.
사진 속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청와대의 전경은 실로 웅장했다.
건물 자체에서 나오는 자태보다도, 청와대가 갖고 있는 정치적인 의미 때문이다.
청와대는 1948년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조선총독부의 관저를 이양받은 것이 시초였다.
기존의 이름은 조선시대의 지명을 그대로 따른 경무대였으나,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청기와 지붕을 보고 청와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금의 본관은 노태우 대통령이 신축해서 지은 것이다.
사실상 이 시대의 왕궁이라고 해도 다름없는 곳.
내가 들어간 곳은 청와대 안에 있는 영빈관이었다.
민속공연과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는 이곳에서 외국의 국빈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위층에 있는 귀빈실 앞에 당도하자 비서진과 경호원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들을 향해 묵례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특별히 꾸며진 방이 아니었음에도 방 안의 가구들부터 한쪽 구석에 배치되어 있는 자기들까지 한껏 고풍스러운 자태를 뿜어냈다.
테이블 한쪽에 세 명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만나게 될 사람에 대해서는 미리 들었기 때문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외교부차관 반희문, 경제수석차관 이호민 그리고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바로 문화관광부 장관 정태영이었다.
장관이라면 비록 한 나라의 수장은 아니지만 말 한마디에 사업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한일월드컵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는 지금, 문화관광부 장관의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태선물산의 부사장, 서강빈입니다.”
태영이 손짓하며 말했다.
“허허. 반가워요. 문화관광부 장관 정태영입니다. 우선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 태영이 직접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주전자에서 찻잔으로 옮겨지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져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평화로움이었다.
태영에게 살짝 묵례로 감사를 표하고 차를 입에 머금었다.
은은한 향이 나는 차로 이런 분위기와 특히 어우러지는 맛이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말없이 태영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여유로운 시간이 지나고 태영이 말을 꺼냈다.
“우선 감사하다는 말 먼저 전해야겠군요. 태선물산이 마카오 타워의 메인 시공권을 가져오면서 중국 정부와의 관계가 한층 더 긴밀해졌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재벌가에 적대적인 시선을 보이는 정치인들은 늘 있어왔다.
태영의 말이 진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 않을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진 않을 것이다.
태영이 이어서 말했다.
“기업 측이 중국 정부와의 거래를 꺼려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마카오 타워는 시공조건부터 대가까지 중국 측이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태선이 이렇게 희생적인 선택을 하다니. 다른 기업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그제야 태영의 의도가 한눈에 보였다.
마카오 타워는 기업이 꺼리는 사업이라는 것을 정부 측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태선이 국가 교류라는 명목으로 메인 시공권을 가져왔으니, 노력을 가히 인정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놓고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대충 뭐하나 던져줄 테니 입 다물고 받아들이라는 소리다.
상황을 알게 되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기로 했다.
“장관님의 말씀처럼 다른 기업들이 본받아야 할 자세임은 맞겠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안 그래도 서준만 사장님께선 지금 시공 관련 문제로 마카오에 출장을 가셨거든요. 노무비와 현장경비는 그렇다 치고, 최근에 오른 철물 때문에 아주 곤란한 모양입니다. 저희 태선이 그런데 다른 기업들이 감당이 가능하겠습니까?”
마카오 타워 시공은 정부 입장에서 중국과의 정치적인 교류 및 다국가 사업에서 큰 이득을 안겨주는 건이다.
정부 입장에선 아직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이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것이다.
시공과 관련해 직접적인 얘기를 꺼내자 태영은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옆에 앉아있던 희문과 호민 역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내 눈치를 봤다.
그런 정적도 잠시, 호민이 침을 한번 삼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 인사를 더욱 해야겠군요. 정부에서도 이를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태선물산에 성의는 당연히 표할 생각입니다.”
“그걸로는 부족할 겁니다.”
“예?”
호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옆에 있던 희문이 기가 찬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저희가 어떤 제안을 드릴지 알고나 하시는 말입니까?”
가만 지켜보던 태영도 불편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역시 기업가 놈들은 돈밖에 모르는구만. 자네. 이런 자리가 쉬워 보이나? 준다고 하면 넙죽 받아도 모자랄 판국에 부족? 어딜 건방지게 기어올라?”
나는 차분히 그들을 설득시키기로 했다.
대가는 내 쪽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것이다.
“중국 측이 선수금으로 절반을 지급했지만, 나머지는 무엇으로 지급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호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이동통신사업권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중국이 올해부터 국내 통신사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중국 정부고 대놓고 국내 통신 사업을 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작년만 해도 3프로도 안 되었던 중국의 국산제품의 점유율이 올해는 9프로를 넘겼습니다. 벌써 3배가 벌어졌는데 내년에는 어떻겠습니까? 저희는 그냥 생돈을 날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생돈을 날렸다는 표현까지 쓰자 호민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래서 저희가 성의를 표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1조 5천억. 중국이 낸 선수금 절반을 제외하고 저희가 부담해야 할 금액입니다. 말씀하신 성의가 이 돈에 부합합니까? 애초에 저희가 여기서 마카오 타워 시공을 그만두면 어떤 기업이 대신하려고 들까요? 신중하게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들은 아직 이동통신사업권의 가치를 모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받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그에 준하진 못하더라도 다른 것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정부 측이 태선 물산에 지급하려고 하는 보상은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시공권이다.
이미 기반시설이 절반 이상 지었으니, 태선 물산이 시공해줌으로써 얻을 이득은 최소 500억 원 이상.
나쁘지 않은 대가였지만, 마카오 타워를 따온 보상치고는 터무니없이 짜다.
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려는 희문을 태영이 제지하고 말했다.
“그럼 부사장이 원하는 조건이 뭐요?”
태영은 호의를 거두고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나는 손깍지를 낀 채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보고받기로 기반건설이 시공을 맡았던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시공을 주신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맞네.”
“시공은 맡겠습니다.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대… 신?”
무언가 더 요구할 것이라곤 생각 못 했는지 태영의 얼굴이 굳어갔다.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측 메인 스폰서로 저희 태선 물산으로 변경해주십시오.”
“뭐? 변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태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대부분의 큰 국가사업은 이미 배분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 또한 해외기업들과 더불어 한국의 삼륜자동차가 거머쥔 상황이었다.
보통 월드컵 같은 큰 행사의 메인 스폰서는 해당 행사가 이루어지기 몇 년 전에 결정되었다.
삼륜자동차가 한일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를 따낸 것도 벌써 3년 전.
그 때는 투자활동으로 한창 바쁠 시기에다가, 사업자금도 모조리 투자에 돌렸기 때문에 입찰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을 지금 만회하려는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정당한 광고비는 지불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이미 삼륜이 배정받은 걸 태선에게 어떻게 돌리란 말인가? 작은 광고는 몇 개 붙여줄 터이니 그걸로 만족하게.”
“저희가 해온 일이 있는데 이게 어려운 일입니까?
대가를 받지 않고 진행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광고비까지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월드컵 스폰의 경우 금액이 비공개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암묵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보통 한화로 약 3000억 원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세계적으로 관심받고 있는 한일월드컵에서 태선 물산이 메인 스폰을 맡게 된다면, 그 홍보효과와 부가가치는 어마무시할 것이다.
대답이 없는 태영을 향해 이어서 말했다.
“국가사업이 막판에 가서 뒤집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까. 저희가 직접 삼륜자동차 측에게 입찰금은 지급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태영이 지지 않겠다는 듯 눈초리를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패를 마지막으로 깠다.
“제가 알기론 한일월드컵 공식 명칭으로 상황이 복잡한 것 같은데, 제가 일본에 가서 한일월드컵의 명칭을 확정지어 오겠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요? 이미 한일월드컵으로 결정된 마당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일본의 눈치를 보는 건지는 몰라도 해외 언론은 확인도 안 하시는 겁니까? 온통 일한월드컵으로 표기하고 있던데요. 심지어 미국 CNN 뉴스에서도 일한월드컵으로 표기했습니다.”
“그, 그건….”
태영은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는지, 몇 번 입을 들썩이다가 결국 다물었다.
2002년에 치러질 한일월드컵, 정식 명칭으로는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과 일본 중 누가 앞에 오는가로 크게 논란에 휩싸인 전적이 있었다.
원래 정해졌던 이름으로는 일한월드컵이었다.
현 외교부장관, 김장복은 왜 일본이 앞에 오냐며 FIFA의 사무총장인 제프 블라터에게 항의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영어 알파벳 순서가 J가 K보다 먼저 오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에 장복은 FIFA의 이름이 프랑스에서 따왔기 때문에, 프랑스어로 표기한 한국(Corée)이 일본보다 먼저라는 주장을 펼쳤고, FIFA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날 뻔했던 이 일은 일본이 협약을 위반하고 일방적으로 일한월드컵으로 표기하는 추태를 보이며 다시 점화되었다.
이로 인해 공식 명칭과는 별개로 한국은 일본보다 국가 인지도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해외에서 일한월드컵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의 국가 인지도 상승으로 인해 한일월드컵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었다.
여전히 말이 없는 태영을 보며 나는 한소리를 더 했다.
“뭐가 고민이십니까? 마카오 타워 시공을 맡으며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될 거고, 이름표기로 들끓는 여론도 잠재워주겠다는데. 한국 최고의 그룹이 거저먹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절차와 금액을 지불해서 메인 스폰서를 맡겠다는 건데 이게 과합니까?”
태영은 내 말을 듣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까, 태영은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지만, 한일월드컵의 명칭 표기 문제로 인해 세간이 떠들썩거리고 있었다.
정부에서 월드컵 유치를 위해 투자한 돈만 해도 천문학적일 텐데, 고작 이름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었으니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 아니면 이 문제 해결할 사람 없습니다.”
두 개가 한 번에 나열된다면, 대개 사람들은 첫 번째를 기억하기 마련이다.
일한이 아니라 한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국가 인지도가 낮은 상황.
이번 월드컵을 통해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결국 태영이 입을 열었다.
“잠시 상의할 시간을 주게.”
“얼마나 필요합니까?”
“...잠깐이면 되네.”
아마 월드컵의 메인 스폰서를 정하는 일이다 보니, FIFA 측이나 재정경제부장관, 혹은 대통령과도 상의해야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빈실을 빠져나오자 아까는 긴장해서 보지 못했던 영빈관의 내부가 보였다.
흰색 바탕에 깔끔한 무늬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밝지만, 눈이 부시지 않은 조명을 내뿜고 있었다.
곳곳에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테이블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귀빈실을 나올 때부터 따라온 경호원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돌아다니며 내부를 탐방했다.
1층을 다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중 경호원 한 명이 달려오더니 말했다.
“서강빈 부사장님. 얘기가 끝났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경호원을 따라 귀빈실로 돌아갔다.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들었는진 몰라도 태영이 밝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딜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대신 말씀해주신 이름 우선권은 반드시 가져오셔야 합니다.”
반응을 보니 국가의 민감한 사안을 기업이 대신 처리해주겠다고 나서니 흔쾌히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했다.
“저는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