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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09화 (109/249)

#109화

“나 진짜 걱정돼 죽겠어.”

재만의 집에 찾아간 정순은 아랫입술을 씹었다.

책상 뒤에 앉아있던 재만도 정순의 말을 듣고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있었다.

재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순이 따지듯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강빈이가 물산 부사장 자리까지 받았으면 물산은 완전 물 건너간 거나 다름없는데. 솔직히 지금은 전자가 일등이라지만 차이가 크지도 않잖아.”

정순의 말대로 태선물산과 태선전자의 재계순위 차이는 불과 한 단계 차이였다.

태선 건설이 마카오 타워 메인 시공사를 따내며 조건까지 잘 받아 오면서 그 격차는 줄어들고 있었다.

재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정순은 재만 앞에서 계속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 갑자기 부사장 자리는 왜 앉혀서는…. 그럼 범준이는 뭐가 돼? 오빠는 얘기 안 꺼내 봤어?”

정순이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강빈이가 태선 물산의 부사장 자리를 맡은 건 재만 입장에서 열이 뻗치는 일이었다.

현재 태선전자의 부사장 자리는 류현철로 진태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때문에 사장의 자리에 있음에도 최종승인이나 사업검토는 종종 현철에서 진태로 곧장 넘어가곤 했다.

진태가 직접 뽑은 사람이니 자신의 회유나 질책은 전혀 먹히질 않아 늘 답답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제 밑에는 진태 자신의 측근을 앉혀놓고선, 물산에선 강빈이를 부사장으로 앉히다니?

지들끼리 얼마나 잘해먹고, 편하게 운영하겠는가.

재만이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서강빈이 부사장 갔으니 나도 범준이 올려달라고 말씀드려봐야지.”

원래 태선물산의 부사장은 윤지형으로, 재만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동만이 사고를 치고 쫓겨난 뒤로 지형은 태선물산의 자회사인 태선중공업의 사장 자리로 갔고, 부사장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또다른 측근을 앉히겠거니,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대뜸 강빈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정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재만을 쏘아보았다.

“할 말이 그거뿐이야?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단단히 못을 박아야 될 거 아냐. 오빠가 회장 자리 먹고 나는 부회장 먹기로 했던 그 다짐은 어디로 간 거야!”

재만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정순을 지그시 바라봤다.

분명 그런 얘기를 하긴 했으나 정순을 이용해 먹을 생각으로 뱉었던 말이지, 정순에게 부회장 자리를 내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내버려 두고 있지만, 요즘 따라 정순이 선을 넘을 때가 많았다.

재만이 말했다.

“방법을 좀 더 생각해보지. 그리고 정순아. 앞으로 찾아올 때는 약속 잡고 와라.”

“뭐, 뭐?”

약속이라는 단어에 정순이 당황하며 눈살을 확 찌푸렸다.

명백히 자신에게 선을 긋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재만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회장, 네가 부회장 하기로 한 게 유효하려면 너도 공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레저 쪽에 계열사 하나라도 더 늘려서 몸집 좀 키워. 회장님이 그 정도는 해주실 거 아니야.”

정순이 갖고 있는 계열사만 열 개가 넘는다.

태선호텔을 지주회사로, 리조트, 관광, 놀이공원 등 태선가 내에서 가장 많은 계열사를 보유한 게 정순이었다.

물론 다 합쳐도 태선전자 하나만 못 했지만.

그동안 계열사를 공격적으로 늘린 까닭은 진태에게 조금이라도 더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어떤 회사가 됐든 태선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기 때문에, 하나를 늘리더라도 진태의 지원이 어느 정도는 들어갔다.

하지만 계열사를 낼 때 진태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가 온 참이었다.

속 빈 강정같은 계열사들이 숫자만 많으니 관리도 어려워지고 부채는 쌓여가는 실정.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계열사를 더 늘리라니?

정순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여기서 더 늘리면, 뭐,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내 사정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정순아.”

재만이 정순을 지그시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이 가진 재산을 합쳐야 겨우 서강빈의 재산과 비슷할 거다.”

“그 정도라고?”

정순은 그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이 쩍 벌어졌다.

재만이 보유한 전자와 계열사들 주식만 해도 최소 5조 원을 넘을 것이고, 자신도 모든 주식을 싹 다 정리하면 1조 원은 넘었다.

게다가 숨겨둔 비자금까지 하면… 적어도 한국 안에서는 손에 꼽히는 재력가가 바로 정순과 재만이었다.

그런 둘의 재산을 합쳐야 겨우 비슷할까 하는 정도라니.

그러나 재만은 그것마저 부정하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예상하는 최소가 그 정도고, 아마 서강빈이 더 많을 거야.”

“뭐, 뭐?”

정순은 손으로 가리지도 않은 채 입을 벌리고 그대로 멈춰 있었다.

재만이 말했다.

“우리가 유리한 점은 그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태선가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 말고는 없어.”

재만은 상황을 냉철하게 보고 있었다.

이제 강빈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성부터 타고난 사업가였다.

재능만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이길 생각이었다.

“정순이, 너랑 내가 합심해서 몸집불리고 주식 틀어막으면 서강빈이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태선그룹을 쉽게 차지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멍청한 표정을 짓는 정순을 보며 재만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정순이라도 진태의 자식이자 태선그룹의 대주주 중 한 명이었다.

서강빈만 생각하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재만은 고민에 잠겼다.

***

강남구에서도 대표 부촌으로 꼽히는 청담동의 한 신축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켈러가 한 여자와 함께 입구에 서 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이분은 처음 보는데 혹시?”

“네. 제 아내입니다. 하하. 셀리나, 이 분이 내가 말했던 서대표님.”

금발에 훤칠한 키를 가진 셀리나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나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아내분은 대학 교수로 알고 있었는데, 가족분들이 다 한국으로 오신 겁니까?”

“네. 켈러가 강빈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교환교수로 한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대답을 한 셀리나는 빙긋 웃고 있었다.

켈러는 가족에 대한 정이 상당해 보여서 걱정했는데, 다 함께 한국에 왔다니 다행이었다.

켈러가 한 손으로 아파트 입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우선 들어가시죠. 오늘도 요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대되는데요? 하하.”

켈러의 집은 꼭대기 층에 있었다.

전면 유리로 된 한쪽 벽면으로 청담동의 전망이 훤히 보였다.

2020년도의 화려함은 없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길과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집에 있던 라벤더와 데이지가 쪼르르 달려와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강빈!”

“잘 지냈어?”

내 물음에 아이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나는 품에서 상자를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데이지가 상자를 열어보더니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휴대폰이야?”

“응. 너희들은 없지?”

“없어. 전화는 아빠 걸로 해.”

그때, 켈러가 다가왔다.

“아이들의 선물까지 준비해주신 겁니까?”

“하하. 이제 태선반도체에서 일하실 텐데 저희 제품이 어떤지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노트북은 택배로 주문해서 이번 주 안으로 올 겁니다. 두 분 것도 준비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때 낯을 가리는 라벤더가 휴대폰을 들고 펄쩍 뛰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앙헬과 연락할 수 있어.”

켈러가 라벤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라벤더의 베스트프렌드입니다. 선택이 탁월하신 것 같은데요?”

“다행이네요.”

아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켈러가 말했다.

“저도 강빈 씨의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들고요. 세상에 입사선물로 집을 해주는 기업이 있네요. 이런 큰 선물을 주면서 티도 내시지 않으시네요.”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이 신축 아파트를 켈러를 비롯해 켈러의 팀원들의 거처로 정했다.

타지에 온 만큼 가까이 살아야 서로 의지가 되고 북돋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값이 꽤 비싸긴 했지만 투자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켈러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늘 받아 온 것 이상으로 일해왔습니다. 강빈 씨가 주신 것에 걸맞은 성과를 보이겠다고 약속드리죠.”

자신감이 넘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켈러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가 한 기업에 5년 이상 머무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계속해서 태선반도체에 머무르기를 바라기 때문에, 애착이 생기도록 아낌없이 지원할 생각이었다.

주방에서 셀리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켈러는 냄새를 맡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셀리나도 요리실력이 기가 막힙니다.”

“좋죠.”

식탁에는 아이들의 키에 맞춘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고, 나머지는 특별한 것 없었다.

아이들 자리에 놓인 그릇에는 하얀 크림파스타가 담겨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 켈러와 셀리나의 그릇에는 옅은 붉은색의 파스타가 담겨 있었다.

셀리나가 파스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국에선 고추장이란 걸 많이 쓰더라구요. 강빈 씨가 온다는 말을 듣고 몇 번이나 만들어보면서 연습한 요리예요.”

“잘 먹겠습니다.”

원래 파스타는 속이 느글거려서 잘 안 먹었지만 고추장이 들어갔다고 하니 괜찮을 것 같았다.

한 입을 먹어보자 매콤한 맛이 느끼한 크림 맛을 잡아주어서 조화로웠다.

숟가락까지 들어 적극적으로 먹기 시작하자 켈러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오셔서 식사하세요.”

“저야 감사하죠. 다음엔 제가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요리는 못 해도 괜찮은 식당은 꽤 알고 있거든요. 셀리나와 아이들도 같이 오세요.”

켈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밤이었음에도 거리 곳곳에 자리 잡은 가로등 덕에 환했다.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데 전화가 울렸다.

준만이었다.

“아버지. 저 저녁 먹고 들어가는 길입니다.”

“강빈아. 연락 왔다.”

“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고. 다음 주 월요일에 가게 될 거다.”

준만의 목소리에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지금껏 태선에서 청와대와 직접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진태밖에 없었다.

채규도 청와대와 연락하긴 하지만 진태를 대변하는 역할일 뿐이었다.

청와대의 주인은 매번 바뀌고, 심지어 정권이 바뀔 때조차 끊어지지 않은 줄을 잡고 있는 진태가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청와대와 두 번째로 직접적 교류를 하는 사람이 바로 내가 되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

내가 그곳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월요일 일정은 싹 다 비워놓도록 할게요.”

“그래. 네가 잘하리라는 것은 알지만, 중요한 일이란 건 잊지 말거라.”

“걱정할 일 없을 거예요.”

이번 월드컵은 한국 독단이 아닌 일본과의 합작이긴 하지만, 언제 한국에서 다시 열릴지 모른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득을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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