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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08화 (108/249)

#108화

“그 이상한 차는 언제까지 마시려고 그래? 질릴 때도 되지 않았어?”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걸 뭘 따져. 강빈이도 좋아하는 맛이야.”

고삼차를 꿀물 마시듯 호로록 마시는 진태를 보며 두완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완은 강빈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빈이한테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건 어떻게 됐나?”

강빈이 태선증권사의 본부장 자리에 붙박여 있는 게 벌써 7년이다.

이 소식을 들은 두완이 진태에게 자리 하나는 주어야 하지 않겠냐며 제안했었다.

“물산이랑 반도체 부사장 자리를 준다고 하긴 했어.”

“하긴 했어? 거절이라도 한 거야, 설마?”

그때가 생각난 듯 진태가 시들하게 한 번 웃고는 말했다.

“물산만 받아 가고 반도체는 거절했네.”

“뭐? 강빈이라면 둘 다 받아 갈 거 같은데. 무슨 연유야?”

두완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진태를 쳐다봤다.

“나도 그럴 줄 알았지. 본부장 자리에서 몇 년이나 썩힐 때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흠… 이유는 밝히지 않고?”

“바쁘다더군.”

“허허.”

두완이 기가 찬다는 듯 짧게 웃고는 말했다.

“그동안 자네가 준다는 거 거절한 사람이 있었나?”

진태가 씨익 웃었다.

“있긴 개뿔. 자식 놈들이라도 받아먹을 땐 새끼 새처럼 입이나 벌릴 줄 알지. 감히 거절을 하겠나?”

진태의 자식들 모두, 심지어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남순까지 진태가 무언가 줄 때는 잠자코 받기만 했다.

두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도 그런 손주가 있긴 하지.”

“아, 이 사람아. 줄 댔으면 거기서 우리 역할은 끝난 거지. 뭘 자꾸 치덕거려?”

“아, 글쎄 이런 게 천생연분 아니면 뭐겠어? 예나도 내가 주겠다는 패션사업 거절하고 제 갈 길 가지 않았나.”

“길이 다른 거지. 강빈이는 사업가면서 동시에 기업가야. 자네 손녀한테 대뜸 국장 자리를 제안하면 거절하겠나?”

“그건….”

두완은 고민하는 듯 하다가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강빈이도 이제 처음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거니까 기대가 되네.”

“기대라고? 자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예끼, 이 사람아. 나도 사람인데 어찌 안 그러겠어? 그놈이 지금껏 해온 게 있는데. 안 그래도 이번에 마카오에서 따온 시공권으로 태선을 크게 불리겠다는군.”

“무슨 일이 또 있었나 보네.”

“아 글쎄 따온 시공권으로 중국 휴대폰사업을 갖고 왔는데 그걸 재만이한테 넘기겠다지 뭔가.”

두완이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강빈이라면 다를 줄 알았는데 재만이 줄을 잡았구만. 하긴 우리도 이제 뒷방에 나앉을 나인데 실속을 챙길 때가 됐지.”

“줄을 잡긴 무슨. 그걸 빌미로 제대로 뜯어내겠다더라.”

“백부를 뜯어먹어? 크하하! 하긴 그래야 강빈이지. 재밌어. 아주 재밌어지겠어.”

두완이 볼 때, 첫째라는 위치와 안정적인 경영 능력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재만이 후계 자리를 받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강빈이 태선그룹에 개입하지 않은 현재만 볼 때다.

태선가 내에서 강빈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파란이 어디까지 커질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잘 웃지 않던 진태는 강빈의 이야기로 오랜만에 걸걸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태와 두완 모두 자신의 힘으로 직접 재벌그룹을 일군 사람들이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그 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다.

진태,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성에서 왕좌를 차지할 사람은 누가 될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진태가 입을 뗐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마지막까지 지켜보자고.”

***

한국을 내로라하는 대기업들부터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의 한국 지사들이 모인 강남구에서도 태선물산의 건물은 압도적인 위용을 뽐냈다.

건물 주변을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평지로 꾸민 것은 물론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만든 조형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저층을 받치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기둥들은 마치 궁궐을 연상케 했다.

입구에 들어가자 수백 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일렬로 도열해 나를 맞이했다.

그들 전체가 한 번에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것은 마치 내가 진태가 된 기분이었다.

“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가볍게 묵례하는 것으로 인사에 화답했다.

직원들 사이를 헤치고 준만이 걸어왔다.

나도 성큼성큼 걸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흐흐. 섭섭한 소리 하지 마라. 물산에 잘 왔다.”

준만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대놓고 친분을 과시했다.

하긴 여기 주인이 준만이니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준만을 비롯한 태선물산의 임원들과 함께 최상층 이사회실로 향했다.

이사회실은 내가 경영수업을 듣던 한국대학교의 강당과 비슷할 정도로 넓었다.

비서진을 제외하면 10명 남짓이었으니 휑해 보였다.

준만은 익숙한 듯 상석에 앉았고 나는 준만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임원들까지 자리에 앉고 준만이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부터 내 아들, 서강빈이 부사장 자리를 맡게 되었어.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사람이니까 강빈이가 지시하면 토 달지 말고 바로바로 하라고. 이번에 마카오 타워 시공권 가져오면서 갖고 온 이득은 다들 들었을 거야. 그것 말고도 강빈이가 미국에서…”

준만은 태선 물산을 맡고 나서 아무래도 팔불출이 된 것 같다.

자식 자랑으로 이 시간을 허비할 것 같으니 내가 나서야겠다.

앉아있는 임원들은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얘기였는지 지루한 기색이었지만 상대가 사장인지라 겨우 참고 있는 눈치였다.

태선물산 부사장은 대외적인 위치 때문에 갖은 자리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확실하게 이용해야 한다.

꾸준히 내 업적을 읊는 준만의 말을 손을 들어 제지하고 말했다.

“사장님. 제 소개는 제가 해도 괜찮겠습니까?”

“어, 그래. 하하. 내가 유난이었구나.”

“짧게 하겠습니다. 제가 이번에 부사장 자리를 맡게 되었지만, 따로 경영하는 투자회사도 있고 개인적인 사업들이 아주 많습니다. 임원회의나 기타 경영에 관련된 일에 참여하는 일은 많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왔기 때문에 태선물산이 세계최고가 될 겁니다.”

말을 뱉고서 임원들을 빠르게 훑었다.

나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두 명쯤 있었고 겨우 알아볼 수 있게 살짝 인상을 찡그린 사람,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나는 이제 막 서른이 된 핏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일부러 과도한 말을 뱉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가 그간 해왔던 행보를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나이나 외모로 평가하는 실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태선물산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선언도,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각각의 반응들을 보며 걸러야 할 사람과 쓸 만한 사람을 구별해냈다.

시큰둥하게 앉아있다가 내 말이 끝나자 눈치껏 박수를 치는 사람은 곧장 걸러냈고,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걸렀다.

내가 눈여겨보는 사람은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집중해서 내 말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이곳에 모인 임원들의 대부분은 준만과 비슷한 나이거나 더 많아 보였는데, 유일하게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 나이에 이사 자리를 달았으면 능력도 꽤 뛰어날 것이다.

형식적인 박수가 끝나고 준만이 말을 꺼냈다.

“자, 소개는 이 정도로 하지. 공석이던 부사장도 왔고, 마침 중요하게 정해야 될 사안이 있으니 해치워 보자고. 화면 띄워 봐.”

갑작스럽게 진행된 회의에도 임원들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자세를 바로 하고 눈앞에 스크린에 집중했다.

나도 미리 들었던 것은 없었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며칠 전에 진태가 청와대 쪽에서 태선물산에 호의를 표했다고 말했으니, 그것과 관련된 사업일 것이다.

스크린에는 태선건설이 주도하고 있는 마카오 타워 시공 현장 사진이 먼저 띄워졌다.

마이크를 잡은 직원이 예산 현황과 일어난 변수에 대해서 말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빠르게 화면이 넘어가고 찾아온 것은 한국의 월드컵 경기장 시공안이었다.

앉아있던 임원 중 한 명이 의문을 제기했다.

“월드컵 경기장은 이미 시공에 착수된 것 아닙니까?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으로 각 지역 경기장은 지방건설사들이 맡았고, 서울은 기반건설이 맡은 걸로 기억합니다.”

기반건설이라면 올해 부도가 날 기업이었다.

그런데 기반건설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시공사였나?

월드컵 관련 주는 워낙 변수가 크기 때문에 전생에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마이크를 쥔 직원이 임원의 말에 답했다.

“오늘 오전 기반건설이 이라크의 장기 미수 채권이 있다는 것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 금액만 당기순이익의 3배가 넘는 5500억 원입니다. 이라크 정부의 압력까지 들어가게 되면서 부도는 피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따라 월드컵 경기장의 시공권 재분배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직원의 말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부터 시공을 맡아 진행하게 된다면, 국가사업이기 때문에 기업에게 떨어지는 수익은 크지 않다.

그러나 반쯤 지어진 것을 태선이 이어받아 짓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월드컵이 열리기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서울월드컵경기장은 뼈대는 물론 마무리 직전까지 지어졌을 것이다.

건설비용을 크게 아낄 수 있으면서, 시공사 부도로 인해 위기에 처한 국가사업을 태선 건설이 도왔다는 명분을 챙길 수 있다.

게다가 월드컵이라면 세계에서 주목하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다.

나는 준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청와대에서 언질이 온 거겠죠?”

준만이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내 말에 긍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반쯤 끝난 경기장의 시공을 받는 좋은 기회를, 청와대에서 아무에게나 주진 않을 것이다.

저번 마카오 타워 입찰에서 태선이 활약한 만큼 이것으로 보상을 대체할 생각인 것 같다.

준만이 나를 보며 말했다.

“청와대에서 초청이 왔다. 그런데 하필 그 시기가 내가 마카오에 출장을 가는 날이지 뭐냐. 네가 가야 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청와대에 방문하는 것만으로 하나의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제야 막 태선물산의 부사장 자리에 오른 나를 견제하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려면 이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다.

준만도 그걸 알고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했을 것이다.

준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서울월드컵경기장 시공으로 가져올 수익모델에 대해서 얘기해 보지.”

준만은 시공을 맡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회사에 챙겨올 수 있는 것에 대해 곧장 얘기를 꺼냈다.

태선증권사에서도 준만이 내 직장 상사였지만, 이 정도로 열의를 보이진 않았다.

이 정도로 노력해주었으니, 나도 그에 보답할 차례였다.

임원들이 하나, 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고 나도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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