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07화 (107/249)

#107화

“자리라면 어떤 자리를 묻는 겁니까?”

짐작 가는 것이 있었지만 확실하게 하기 위해 되물었다.

태선가 내에서 현재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태선증권사의 본부장이다.

태선택배 대부분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지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진태가 물어보는 것은 말 그대로 어디 한 계열사의 사장 자리일 확률이 다분했다.

그러나 늘 그랬듯 명분 없이 주어진 자리는 바람 앞에 등불에 불과했다.

그런 나의 의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진태가 말을 이었다.

“네놈이 걱정할 일은 없을 게야. 명분 없는 자리는 싫어하는 거 잘 알고 있다.”

“저는 지금 자리도 만족합니다.”

진태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계획이 있다.

태선증권사의 본부장이라는, 다른 경쟁자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자리에서 계열사들의 지분을 차지해나가는 것이다.

시선을 끌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태선가를 차지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실제로 태선택배와 태선반도체, 그리고 외환위기 당시 환전을 해주는 대가로 받은 계열사 지분들까지, 계획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태가 제 할 말을 이어서 했다.

“호랑이가 새 이빨이 났으면 원래 이빨은 뽑아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그 새로운 이빨이 어디입니까?”

호기로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태는 크게 한 번 웃고는 말했다.

“물산과 반도체의 부사장 자리. 네놈이라면 동시에 할 능력은 되겠지.”

태선물산과 태선반도체의 부사장 자리라.

두 기업 모두 확실히 명분은 있었다.

태선물산과 연계된 마카오 타워 건설권에서 엄청난 이득을 가져왔으며, 태선반도체에는 내 자비로 위약금까지 물어내면서까지 켈러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두 기업의 부사장 자리는 대외적으로 볼 때 유리하게 작용할 것임은 자명했다.

해외에서는 GB인베스트먼트의 대표로 활동하면 되지만, 국내에서 활동하기에 본부장이라는 자리는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장 자리라면 내가 계획했던 일에 차질이 생길지 몰라도 부사장 자리라면 사장 뒤에 숨어있기 딱 좋은 자리였다.

결정을 끝내고 진태를 보며 대답했다.

“물산만 받겠습니다.”

“반도체는?”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내 모습에 채규가 되레 당황한 눈치였다.

그동안 진태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봐왔겠지만, 주겠다는 것을 거절한 사람은 처음일 테지.

나는 빈말이 아니라 태선반도체의 부사장 자리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태선전자의 자회사인 태선반도체에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재만의 시선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태선물산이야 준만이 사장 자리에 있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활동할 수 있겠지만, 태선반도체의 경우 재만의 손에 놀아날 수 있다.

전자 계열의 임원소집마다 불려 나갈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었다.

진태는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두 개는 힘든 게냐?”

“솔직히 말하자면 한 개도 힘듭니다. 제 일 하기도 바쁜데 회사 일까지 어떻게 신경 씁니까? 그래도 발은 걸치고 있어야 하니 물산 자리는 받겠습니다.”

“이거, 참. 주기나 해 봤지. 안 받겠다는 놈 구슬리려는 것은 못 할 일이네. 됐다, 이놈아! 물산만 가져가.”

진태는 버럭 소리를 지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빌빌 기어가며 받아가는 사람들만 봤지, 나처럼 당당하게 받을 것만 챙겨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진태의 주려는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말을 꺼냈다.

“태선반도체는 이제 시작입니다. 기존 기술력에 짐 켈러까지 왔으니 세계시장 독점도 꿈은 아닐 겁니다.”

진태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런 태선반도체의 주인이 할아버지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백부님께 주신 지분 말고도 임원소유지분 23프로. 그거 할아버지 거잖아요.”

태선반도체의 지분은 현재 내가 20프로, 재만이 13프로, 진태가 10프로, 임원소유가 23프로, 나머지는 다른 계열사들이나 개인 투자자들, 주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임원소유로 보유한 23프로는 진태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지분이었다.

소유자 명의야 각각의 임원 명의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소유주는 진태라는 것을 태선반도체의 사장인 치동에게 직접 들었다.

진태 명의로 소유한 10프로까지 더하면 총 33프로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진태가 턱을 내밀며 말했다.

“태선가 사람이라면 비밀이랄 것도 아니지. 빙빙 그만 돌리고 말해 보거라.”

“제가 말씀드린 이동통신 사업방안으로 태선반도체가 지금보다 크게 성장한다면, 저에게 그만한 가치의 대가를 주십시오.”

위약금으로 내 생돈까지 내가며 켈러를 영입했다.

중국에서 이동통신사업권을 따내고, 어떻게 이용해먹을지 구체적인 방안까지 생각해낸 것도 나이다.

여기서 지분 몇 프로를 더 먹는다 할지라도 이것은 내가 당연히 지급 받아야 할 대가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진태에게 당당하게 대가를 요구할 수 있었다.

진태도 내 공로를 알기 때문에 쉽게 승낙했다.

“알았다. 태선반도체가 10프로 성장할 때마다 1프로씩 떼어주마.”

진태의 제안에 이번에는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진태가 내건 조건이라면 태선반도체의 기업가치가 330프로가 상승하면 진태가 보유한 지분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이다.

단 3.3배.

태선반도체가 이동통신사업을 통해 해외로 진출하게 된다면 이 정도 수치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 설명을 들은 진태라면 그 정도는 유추해낼 수 있었을 텐데….

진태의 묘한 눈빛을 보며 의중을 읽으려 노력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을 만큼 큰 대가였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태선반도체의 기업가치가 1프로 떨어질 때마다 제 지분 1프로를 내놓겠습니다.”

켈러 영입과 더불어 이동통신사업까지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마당에, 태선반도체의 기업가치가 내려갈 일은 죽어도 없다.

그럼에도 조건을 내건 까닭은 진태가 내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는 것과 더불어 명분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진태가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리며 저 멀리서 서재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채규가 말했다.

“천회장입니다.”

“이제야 납셨군.”

두완은 한눈에 봐도 기운이 좋아 보일 정도로 성큼성큼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회장. 어라, 강빈이도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올리며 말했다.

“하하. 오랜만입니다. 천 회장님.”

“안 그래도 남북사업 얘기나 하려고 왔는데 시기적절하구만, 그래. 미국 간다더니 한국에는 언제 온 거야?”

“오늘 막 돌아왔습니다.”

“그래. 허허. 피곤할 텐데 서회장한테 아주 극진하구나. 서회장은 손자 잘 둬서 좋겠어.”

오자마자 쾌활한 분위기를 만드는 두완을 보며 진태가 피식 웃었다.

“남북사업 연 게 누구 덕분인데 나한테만 좋대? 자네가 더 좋은 거 아니었어?”

“그건 또 그러네. 강빈아. 네 덕에 금강산 구경만 벌써 세 번째다.”

남북경협사업이 안 될 사업이라는 것을 나를 통해 알고 있을 진태의 뻔뻔함에 기가 찼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두완을 보며 일말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제 덕분이라니요. 회장님이 다 이루신 일이잖아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니야! 다 네 덕이라니까 그러네. 하하. 사업 잘되면 대가는 두둑이 줘야지.”

“아닙니다. 저는 한 게 없어요.”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는 내 모습을 보고 두완은 겸손을 떤다고 생각했는지 장난스럽게 등을 쳤다.

“뭘 그렇게까지 겸손을 내? 하하.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하하….”

진태는 머쓱해하는 나를 보며 도와주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짓고는 즐기고 있었다.

두완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강빈아. 그러고 보니 우리 예나랑은 어떻게 된 게야?”

“예나 씨가 말하지 않던가요?”

“예나는 물어보면 도통 말을 안 해. 그 뒤로 몇 번 만난 걸 내가 훤히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진태가 눈을 부라리며 두완을 바라보고 있었고 두완은 당황했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진태가 두완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회장아. 그새 또 사람 붙인 건 아니지?”

“그, 그게…. 아이고! 서회장. 내가 잘못했네. 둘이 만나는지만 살핀 거야.”

“강빈이 미국 갔다는데 사람은 어떻게 붙이고?”

“그, 그게….”

나는 나오는 한숨을 참지 않고 뱉은 뒤에 말했다.

“전용기 타고 다니느라 찾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꽤 실력 있는 사람을 붙인 모양입니다.”

“하하….”

“내 전에 경고 안 했어? 응?”

“다신 안 그럼세…. 다른 의도는 없다는 걸 자네도 알잖나.”

두완이 악의를 갖고 그럴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진태도 잘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추궁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두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찰나, 진태가 채규에게 말하기 전까진.

“채규야. 한 달 동안 천회장한테 사람 한 명 붙여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아야지.”

“예. 회장님.”

“서회장! 정말 이러기야?”

두완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지만 진태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두완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들며 나에게 말했다.

“어쨌든 예나랑은 붙은 거야, 만 거야?”

내심 기대하는 눈빛에 어떻게 말해야 될지 고민되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이야 영락없이 손녀를 아끼는 극성 할아버지에 불과하지만, 두완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재계그룹의 회장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예나를 만난 것까지 아는 것 같으니, 괜한 말을 했다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나는 대답을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있습니다.”

“그래?”

켈러와 관련해서 연락하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두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순순한 모습을 보며 어떻게 천일그룹을 정상까지 올렸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진태가 말했다.

“강빈이는 이제 들어가라. 미국에서 한국 온 지 반나절도 안 지났을 텐데,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시라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뵙겠습니다.”

대놓고 아쉬워하는 눈치인 천 회장을 뒤로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