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아주 대단한 일을 벌였더구나.”
진태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나도 진태 못지않게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 해왔던 성공입니다.”
내 말에 진태가 걸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겸손 떨 생각은 없는 거냐?”
“저야 늘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할아버지가 싫어하시잖아요.”
“네 말이 맞다. 태생이 잘난 놈은 그 맛에 사는 거지. 그보다 이젠 언질도 안 하고 불쑥 찾아오는구나.”
“한국 오자마자 방문해서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건 좋구나.”
진태와 나는 서로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밖은 아직 밝은 대낮이었지만,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눈이 따가웠다.
늘 루틴에 맞춰서 살아왔기 때문에, 더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뒤에 가만히 서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채규를 보며 말했다.
“그보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채규가 진태를 슥 보고는 답했다.
“북한 사업 관련해서 대화 중이었습니다. 천 회장님이 방문하시기로 했거든요.”
“미리 약속이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다음에 다시 올까요?”
내 말을 듣던 진태가 책상을 탁, 하고 쳤다.
“가긴 어딜 가려고. 오랜만에 만난 할애비가 반갑지도 않더냐?”
“할아버지만 상관없다면 저야 계속 있고 싶죠.”
“그럼 천 회장 얼굴도 보고 가거라. 금강산 다녀오더니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천일그룹을 주력으로 한 남북경협사업은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비롯해 개성공단도 시공에 착수했다.
아직까진 전망이 좋아 보이는 사업이었다.
진태가 아직 미련이 있을까 싶어 슬쩍 떠보았다.
“저 때문에 안 가져간 게 남북경협인데, 보시면서 아쉽진 않으세요?”
“아쉽긴, 뭐가 아쉬워. 지금은 투자단계지. 수익 거두려면 꽤 남았으니 그때까지 살아남으면 실컷 아쉬워해야지.”
진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신 따낸 사업은 잘 진행됐죠?”
“전기기관차 말이냐? 그건 개발 맡은 네 아비한테 물어야지, 나한테 뭘 물어?”
“아버지가요?”
사업을 따낸 뒤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태선물산이 디젤 전기기관차 사업을 받은 줄은 몰랐다.
태선 그룹 자체의 이득이라고 해도 괜찮은 협상이었는데, 준만에게 그 공이 돌아갔으면 남북경협과 관련된 일로 생각보다 더 큰 수익을 거뒀다.
“그래. 그리고 준만이도 며칠 전에 왔다 갔다.”
준만이 태선물산의 사장 자리를 받으면서 진태의 저택에 단독으로 방문하게 되리란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시점이라면.
“마카오 타워 시공 관련해서 부르셨습니까?”
“그래. 뭐 좀 주려고 불렀더니, 네 칭찬만 늘어놓더구나. 시공권이니, 이동통신사업이니 다 네 덕이라면서.”
“아버지가 없었다면 안 될 일이었습니다.”
“부자가 서로 치켜세우기 바쁘구나.”
“유전인가 보죠.”
예전 같으면 진태 앞에서 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시답잖은 농담을 뱉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진태는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시공 대금의 절반을 이동통신이랑 바꿔 먹었다면서. 1조 원이 넘는 돈일 텐데, 그만한 가치는 있는 게야?”
“그러고도 남습니다. 우리나라에 비하면 중국은 아직 이동통신사용에 대한 비중은 작지만, 그럼에도 이용자 수는 한참 위에 있습니다.”
“비율이 작아도 사람이 워낙 많아야지.”
중국은 작년에만 휴대폰 판매실적 59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화 약 6, 7조 원에 달하는 규모로, 올해 예상되는 규모는 100억 달러다.
여기서 중국 기업의 비율은 약 9프로로 나머지 91프로는 전부 해외업체가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의 이동통신 사업을 독점한다는 것은 이 나머지에 대한 권리를 갖고 오는 것이다.
“노키아, 모토로라, 파나소닉 등 높은 시장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국외 브랜드 모두 태선을 거쳐서 중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중개 수수료로 조금씩만 거둬도 상당할 텐데, 만약 태선전자가 제품시장을 독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위상을 따라올 곳이 없겠지.”
올해 중국에서 신규 휴대폰 사용자만 2800만 명이 늘었다.
기존 이용자 중 휴대폰 기기 변경을 하는 사람까지 더한다면 그에 따른 수익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태선전자의 주력 사업 중 하나로 자리 잡는 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재만이 좋은 일을 시키는구나.”
“할아버지께 배운 게 있습니다. 공짜는 없다. 공사 대금은 전부 태선물산에서 나갔고, 태선전자는 그보다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겁니다.”
중국의 이동통신사업권으로 태선전자는 중국의 휴대폰 시장을 독식할 것이고, 태선그룹 전체의 파이는 더 커질 것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태선물산이 태선전자를 돕는 양상이 되었으니, 준만을 통해서 태선전자에 간섭할 권리까지 얻을 수 있다.
진태가 짧게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이거, 태선에서 나보다 더한 놈이 나왔구나. 무엇 하나 쉽게 내주는 법이 없어. 그런데 재만이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저와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사업가라면 절대 놓지 못할 건이니까요. 만약 백부님이 거절한다면 이 사업권을 해외 다른 기업에 넘겨야 할 텐데 할아버지가 두고 보실까요?”
“절대 그럴 순 없지.”
진태의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독점으로 5년, 권리소유로 5년으로 총 10년간 이동통신사업으로 불러올 이득만 최소 수조 원에 달할 것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는 머저리라면 재만도 내 경쟁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뒤에 서 있던 채규가 말했다.
“중국 쪽에서 바라봤던 이동통신전망이 좋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만한 사업을 가볍게 넘긴 걸 보면 말입니다.”
채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중국 쪽에선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작년에 휴대폰 시장에서 중국업체가 차지한 비율이 3프로보다 조금 안 됐습니다. 그 시장 비율이 올해 9프로까지 늘었습니다. 중국의 대표 시장조사기관인 싸이눠에 따르면 핸드폰 사용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소비자들이 중국산 휴대폰을 구매할 의향이 있다더군요.”
내 말을 듣고 있던 채규가 말했다.
“1년 사이에 실사용자만 3배, 소비자 의향까지 그 정도 지표라면 중국 정부는 국산사업의 전망을 좋게 본 거군요.”
“맞습니다. 국산제품의 비율이 늘어간다면 해외업체나 필요한 이동통신사업권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거겠죠.”
“그럼에도 강빈 군이 투자한 이유는 그 조사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나는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저었다.
“조사는 정확할 겁니다. 꽤나 신빙성 있는 기관이라서요. 문제는 중국업체의 기술력이죠. 현재 중국업체 중 1, 2위를 다투는 곳인 TCL과 동방통신 모두 네트워크 가입평가심사기준을 겨우 통과한 수준입니다. 정부에서 밀어주고 있기 때문에 시장점유율이 늘고 있는 추세지만, 기술이 부족한 휴대폰을 결국 누가 사용하겠습니까.”
“그래도 정부에서 국산을 민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기술만 늘린다면… 설마?”
역시 눈치 빠른 채규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네. 태선전자의 기술을 중국업체와 제휴계약을 통해 공유할 생각입니다. 어차피 독점기간 5년 동안은 저희 태선이 다른 해외업체를 통제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기술공유가 가능한 기업도 저희 태선으로 한정시킬 수 있다는 말이죠.”
대화를 듣고 있던 진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5년이 끝나면? 권리가 있다 한들, 다른 해외업체의 침입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 아니냐.”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을 마련하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한화 약 300억 원의 위약금까지 지불해가며 짐 켈러를 영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태선반도체로 오면서 개발해낼 90나노미터급 플래시 메모리는 USB메모리뿐만 아니라 휴대폰 시장에서도 독자적인 성과를 보일 것이다.
“반도체 공학자 중에서는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짐 켈러를 영입했습니다.”
“짐 켈러!”
진태는 처음 들어본 이름인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채규는 켈러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는 듯 감탄했다.
진태가 채규를 보며 말했다.
“누군데 그래?”
“자주 보고드렸던 AMD에서 수석설계자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반도체 쪽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손에 꼽는다고 합니다. 지금은 시바이트와 전속계약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역시 태선그룹 경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답게 훤히 알고 있었다.
“위약금을 제가 냈습니다. 연봉은 지금의 10배를 약속했고요.”
“켈러라면 업체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10배라면?”
“1200만 달러, 한화로 약 130억 원 정도 되겠네요.”
켈러의 팀원들의 연봉까지 합한다면 그 이상이었지만, 후에 켈러가 실제로 받았던 연봉인 3600만 달러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의 실력과 불러올 수익에 비하면 이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채규는 놀란 채 입을 벌리고 있었고, 진태가 입을 열었다.
“준만이 말대로 네놈이 돈 쓸 줄은 아는구나.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
“네. 중국 이동통신 사업권의 독점 기간은 5년. 그 안에 중국을 대표하는 휴대폰 업체들과 제휴계약을 맺고 켈러를 통한 기술력으로 휴대폰 시장을 길들여놓을 겁니다. 저희 태선전자가 아니면 사용할 엄두가 안 나게 말이죠.”
독점사업권에 뛰어난 기술력까지 있다.
나는 전생에서도 전례가 없었던 중국 휴대폰 시장 독식을 해낼 것이다.
대략적인 사업방안을 들은 진태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카오 타워로 얻은 것은 이동통신사업만이 아니다. 우리 태선 건설이 메인 시공사를 맡으면서 청와대에서 호의를 표하고 있어.”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이 중국과의 다국적 사업에서 메인이 되었으니, 정부는 두 손을 들고 반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태선은 청와대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게다가 진태를 통한 것이 아닌, 준만이 직접 청와대와 교류할 명분까지 얻었다.
앞으로 내가 국가적 사업에 개입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준만이에게 말해 놓았으니 한번 얘기해 보거라. 아마 초청 행사가 한 번 있을 거야.”
진태는 정권이 바뀌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1, 2년에 한 번씩 한국 1위 기업의 총수로서 청와대에 초청받았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 없이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초청은 재만도 한 번 가보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기회가 이번에 준만에게 온 것이다.
진태를 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진태답지 않게 말을 하는데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했다.
“만족하느냐?”
“네?”
진태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자리 만족하냐고 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