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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05화 (105/249)

#105화

초가을임에도 시애틀의 길가는 색색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에릭이 들어왔다.

에릭의 얼굴에는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드디어 이날이 왔네요.”

“짧지만 길었어.”

오늘은 드디어 공매도의 만기일이다.

내가 기억하는 IT기업들의 역대 최저 주가의 날이기도 하다.

“아, 해리 실장이 경질당하고 MC파이넌스에서 마테오 사장님이 직접 온대요.”

“해리 실장이면 너랑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사람 아니야?”

“맞아요. 개인적으로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안 됐어요.”

“어쩔 수 없지.”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뉴욕타임즈에서 연락이 왔어요.”

“무슨 일로?”

“인터뷰 요청이요. 저희가 진행한 공매도 관련해서 세간이 떠들썩하잖아요.”

IT 버블 붕괴가 시작되고, 공매도에 회사 자본 대부분을 건 GB인베스트먼트는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각종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지만 그때마다 거절해왔다.

에릭이 무심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쳐낼 거죠?”

“네가 나가서 하고 싶은 말 하고 와.”

에릭이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정말요?”

인터뷰를 귀찮게 생각하고 꺼리는 나와 달리 에릭은 대중에 노출되는 것을 즐겼다.

한 번 정도는 에릭이 원하는 대로 해줘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대신 회사 정보나 투자 관련 내용은 말하지 않게 조심하고.”

“당연하죠. 연락 잡을게요.”

신이 난 에릭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에밀리가 들어왔다.

“대표님. 모두 모였습니다.”

“지금 가지.”

내 말을 들은 에릭도 수첩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에릭을 비롯해 TD은행의 제이슨, 루비인베스트먼트의 타오,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아마 해리를 대신해서 직접 왔다고 한 MC파이넌스의 사장, 마테오일 것이다.

에릭을 제외하고 세 명의 남자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테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GB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서강빈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마테오라고 합니다.”

마테오는 눈에 띄게 당황한 채 손을 맞잡았다.

전에 에릭이 마테오는 MC파이넌스에 혈육만으로 사장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이슨은 초조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타오는 이전에 그 여유 넘치던 태도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가운데 놓인 1인용 소파에 앉고서 말했다.

“작년 12월 말부터 진행했던 공매도가 오늘 만기일이 되었습니다. 제 투자조건에 따라주신 여러분께 우선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확한 금액 산정은 저희 회사의 총괄, 에릭 장이 맡았습니다.”

에릭이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바닥에 툭툭 치고 다시 들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12월 23일 진행했던 금액 60억 달러 규모의 공매도는 현재가 기준 약 5억 5200만 달러입니다. 시세차익에 따라 각 기업이 지급해주셔야 할 액수는 지금 드릴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에릭은 제이슨, 마테오, 타오에게 각각 서류를 넘겨주었다.

제이스는 서류를 보며 침음했고, 타오는 서류를 든 채 손을 떨었다.

그리고 마테오는….

“이, 이건 말도 안 돼! 이대로 지급한다면 손해액만 20억 달러라고! 우리 MC파이넌스는 이런 금액은 낼 수 없네. 이 계약은 취소야, 취소!”

에릭이 차갑게 마테오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래를 진행했을 땐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립니까. 게다가 취소는 해리 실장님이 하자고 하셨을 때 해야죠. 만기일까지 지켜보다가 이제 와서 무슨 취소입니까? 쯧.”

“그걸 자네가 어떻게…? 혹시 해리랑 자네가 짜고 친 건가?”

“생각하는 수준이 거기까진가 보네요. 해리 씨가 저와 짰으면 취소를 만류하려고 들지 주도했겠습니까? 그리고 지급하지 못하겠다면 강제집행 들어가는 건 아시죠? 증권가에서 차압당하는 건 사망선고라는 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계약 이행을 거부한 증권사는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한다.

게다가 GB인베스트먼트는 소송에서 질 수가 없다.

회계 뿐만 아니라 법무까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법인, ‘앤 무어’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앤 무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승소해내기로 유명했다.

법무법인과 전속계약을 맺으며 수백만 달러가 깨지긴 했지만 필요한 일이었고, 이득을 생각하면 별거 아닌 돈이었다.

마테오는 서류를 든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머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마테오 씨처럼 계약이행을 거절하시려는 분 있습니까? 있으시면 앤 무어와 상대해야 할 겁니다.”

앤 무어의 이름을 듣자 세 명, 특히 마테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월가는 물론 미국 전역의 소송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곳이 앤 무어였다.

월가에서 수십 년을 굴렀을 그들도 모를 리 없다.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그들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아, 그리고 증거금 회수는 바로 해주시죠. 시세차익에 따른 공매도 지급액은 차주 안으로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잠자코 있던 제이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9억 달러를 어떻게 차주 안으로 지급합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에릭이 혀를 차며 말했다.

“모든 거래는 신용 아니에요? 월가를 내로라하는 TD은행에서 지급할 능력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요. 게다가 TD는 다른 곳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죠.”

에릭의 말대로 TD가 지급해야 할 금액은 세 곳 중 가장 낮았다.

루비인베스트먼트가 약 24억 6천만 달러, MC파이넌스가 약 20억 달러, TD은행이 약 9억 달러로 다른 곳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제이슨은 이제 거의 애원하는 듯 목소리를 냈다.

“지급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시간이라도 좀 주라는 말입니다. 예?”

“거,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하구만, 그래.”

대뜸 제이슨을 쏘아붙인 것은 타오였다.

타오는 이제 좀 평정을 되찾은 듯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타오가 고개를 돌려 나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전에 이 에릭이라는 양반한테 말했었지. 아마존의 주식을 밑바닥에서 사서 되판 후에 다시 공매도로 이득을 본다면, 그 사람은 타고난 꾼이라고. 서강빈. 당신은 진정 꾼이오.”

과연 타고난 중국 자본을 바탕으로 월가까지 뿌리 깊게 잡은 루비인베스트먼트의 사람다웠다.

이만한 돈을 잃고도 타오가 저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이번 공매도 계약을 주도한 사람이 타오가 아니라는 것, 그 역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루비인베스트먼트의 뿌리가 중국 거대 자본그룹인 ‘지하오’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만한 손실은 아무리 거대 자본가라 할지라도 뼈아프겠지만,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다.

타오가 이어서 말했다.

“증거금은 오늘 당장 회부할 거요. 나머지는 당신 말대로 다음 주까지 지급하지. 더 말할 것 있소?”

“없습니다. 계약서와 관련 서류는 루비인베스트먼트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타오는 더 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 일어서서 나갔다.

당당한 그의 태도에, 옆에서 상황을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내가 손해를 봤다고 느낄 것 같았다.

타오와 달리 자리에 남은 제이슨과 마테오는 죽을상이었다.

두 기업 모두 연간수익보다 나와의 계약 한 번에 잃은 돈이 더 크니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이 정도면 정리가 얼추 끝난 듯해서 에릭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잘 마무리하고 보고해.”

“벌써 가시게요?”

에릭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있을 필요까지도 없었지만, 큰 건이 마무리되는 것이니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 참여한 것이었다.

마카오 타워 건설 건과 연계된 이동통신 사업까지 구상하고 실행하려면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에릭이 못내 아쉽다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갈 채비를 하고 건물 밖으로 나가자 타오가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타오가 허공을 향해 연기를 내뿜고는 말했다.

“마무리도 안 하고 가는 거요?”

“제가 필요 없으니까요. 에릭 총괄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타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대표에 그 직원이로군. 이제 와서 생각난 건데 말이야. 공매도를 진행할 때, 에릭 저 친구. 자네에 대한 믿음이 상당했던 것 같아.”

에릭에게 공매도 거래를 지시할 때, 최대한 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라고 했었다.

에릭이 지시를 잘 이행했다고 생각했는데 타오는 그것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타오를 보며 물었다.

“공매도를 왜 진행하신 겁니까?”

“당신이 확신을 갖고 있었듯, 나도 확신을 갖고 진행했을 뿐이요. 결과는 이 모양이지만.”

타오는 길바닥에 다 태운 꽁초를 버리고선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길바닥에는 다 태운 꽁초가 널려 있었다.

다시 손을 꺼낸 그의 손에는 담뱃갑이 들려있었다.

“중국에선 온갖 사기와 날조가 판을 치지. 그 바닥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 그런 어설픈 수법에 넘어갈 사람은 없소.”

“패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태연한 척해 봤자 타오의 얼굴은 이미 짙은 수심이 깔려 있었다.

타오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을 마음껏 만끽하시오. 그런 순간이라도 없으면 절망이 찾아올 때 이겨낼 수 없는 법이니까.”

가볍게 그를 무시하고 스미스가 대기하고 있는 차로 향했다.

절망이 찾아올 때?

이미 그런 순간을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

전용기에 올라 소파 같은 좌석에 몸을 뉘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하루도 쉴 날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정신은 늘 그랬듯 맑았지만, 몸이 피로했다.

전용기가 이륙하기 전부터 수면안대를 차고 팔짱을 낀 채로 몸을 기댔다.

머릿속으로 몇 달간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출장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늘 하던 버릇이다.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던 켈러의 영입과 공매도부터 시작해 각종 투자까지.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루어낸 성과를 생각한다면 값진 시간이었다.

그것보다 내 일을 보조할 사람이 부족했다.

몸은 하난데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효율이 떨어졌다.

기존에 그 역할을 하던 에릭은 이제 GB인베스트먼트를 전담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미국 쪽 일과 관련해서 할 일은 줄었지만, 해외로 출장을 갈 때 함께할 사람이 없었다.

투자 반경을 늘리고 사업에 집중하려면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핸드폰을 꺼내 에릭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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