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짐 켈러의 집무실 안으로 그의 팀원들이 속속히 모여들었다.
켈러의 팀, 전원이 회사를 떠나고 한국으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켈러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심정이 복잡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현재 머물고 있는 시바이트가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는 것만 해도 괴로울 텐데, 한국으로 간다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희 위약금만 해도 평생을 벌어도 못 갚을 돈이잖아요. 특히 켈러 수석님은 위약금이 천만 달러가 넘을 텐데.”
팀원 중 한 명이 켈러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켈러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뿐만 아니라 자네들도 위약금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피나, 자네는 다음 달이 첫 결혼기념일이잖아. 에이든은 올해 초에 아이를 가졌고. 마터스, 자네는 혼자서 조부모를 모시느라 얼마나 힘들겠나.”
팀원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는 켈러에게 깊은 신뢰감이 묻어 나왔다.
켈러는 팀원들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어서 말 한마디에도 그런 사소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켈러가 이어서 말했다.
“아까 투자자 한 명이 내 집무실로 찾아왔어. 자네들도 알 거야. GB인베스트먼트의 서강빈 대표.”
마터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석님이 늘 말씀하시던 분이잖아요. 투자자이면서 반도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요. 전망에 대한 예측도 뛰어나고.”
“그래. 그뿐만 아니라 다른 투자에 대한 사례도 굉장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네.”
‘내’가 아닌, ‘우리’라는 말에 팀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터스가 궁금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위약금이라도 내준다는 겁니까?”
“위약금 전체, 계약하기도 전에 지불하겠다는군.”
“예?”
마터스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팀원 모두가 놀란 채로 얼어붙었다.
켈러의 위약금보다는 아니었지만, 팀원 전체의 위약금을 합친다면 400만 달러 가까이 되었다.
거기에 켈러의 위약금까지 합친다면 무려 천만 달러 가까이 된다.
그만한 돈을 계약도 전에, 조건 없이 지불한다는 강빈의 말은 당연히 믿기 어려웠다.
켈러가 손깍지를 끼고 이어서 말했다.
“이곳에 남겠다는 사람은 말리지 않겠네. 자네들 사정이야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미스터 강빈이 제시한 조건은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연봉의 10배. 우리가 한국으로 가는 조건이야.”
지금껏 질문해왔던 마터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연봉의 10배라면, 마터스 자신이 동경해왔던 켈러의 연봉과 맞먹는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 켈러가 받고 있는 연봉의 10배라면….
앉아있던 팀원들 중 한국행을 포기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GB인베스트먼트가 위치한 시애틀로 돌아왔다.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났던 켈러였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어요. 하하.”
켈러는 특유의 유쾌한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 위약금과 팀원 문제까지 모두 해결해준다고 했으니, 사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팀원들한테는 잘 얘기되었나 봅니다.”
“네. 모두 승낙했습니다. 저도 믿기 힘든 조건이었으니까요. 위약금과 연봉 얘기를 해주니 다들 입을 쩍 벌린 채로 굳더군요. 하하.”
즐거워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전부터 이메일로 교류하며 쌓아왔던 거래가 이제야 종지부를 찍는 느낌이었다.
“우선 위약금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저희 쪽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이직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을게요.”
“저희가 다음에 보는 곳은 한국이겠군요.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놓겠습니다.”
“거절은 하지 않겠습니다. 강빈 씨가 주신 것만큼 반드시 보답할게요.”
자신감 넘치는 켈러를 보며,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켈러가 말하지 않은 것이라도 있나,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켈러 씨?”
“저 에릭이에요.”
에릭은 피곤에 찌든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최근 공매도 건을 비롯해서 GB인베스트먼트의 투자를 에릭이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정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에릭이 이어서 말했다.
“시애틀에는 도착하셨어요?”
“응. 방금 막 도착했어.”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연락했어요. 요새 통 얼굴 못 봤잖아요.”
“알겠어. 한식 안 먹은 지 꽤 됐지? 그곳으로 와.”
“네!”
재미교포면서 한식이 그리도 좋은지, 에릭은 그제서야 목소리가 밝아졌다.
***
시애틀 한인타운.
1980년대 이후에 형성된 재미교포의 집단거주 및 상업지역이다.
간판부터 한국어가 쓰인 게 많이 보일 정도로, 한국 거리와 거의 흡사한 느낌을 주었으며 한식당 위주로 식당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에릭이 시애틀에서 거주하던 어렸을 때부터 자주 왔던 곳이라고 한다.
에릭과 시애틀 일정을 보낼 때면 갔었던 한식당은 그의 오랜 단골집이기도 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자와 작은 우물이 있어서 운치가 꽤 괜찮은 곳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멀리서 모자를 뒤집어쓴 채, 터벅터벅 걸어오는 에릭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애 같던 에릭이 이제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다.
나를 보며 한달음에 다가오더니 싱긋 웃으며 소리쳤다.
“대표님!”
“하하.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이런 모습을 보면 내 눈에는 아직도 앳되어 보였다.
물론 협상할 때의 에릭을 보면 또 전혀 딴판이지만.
에릭이 입술을 내민 채로 볼멘소리를 냈다.
“미국에 오시자마자 팰로앨토 가고, LA가고 바쁘셔서 밥 한 끼 같이 못 한 거 알아요?”
그러고 보니 미국에 와서 GB인베스트먼트에 들리고 곧장 팰로앨토로 향했으니 에릭과 보낸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 같이 밥 먹으러 왔잖아.”
“조금 더 자주 그러자고요.”
“알았어, 이놈아.”
에릭의 등을 툭, 치며 나도 모르게 진태의 말투를 따라 했다.
자리에 앉아 시킨 코스요리는 해파리냉채로 시작해서, 한우 사시미, 퓨전 트러플버섯볶음과 전복죽 등 한국스러운 음식들이었다.
에릭은 전복죽이 맛있었는지 추가로 한 그릇 더 시켜서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후식으로 나온 식혜까지 마시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두드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되게 복스럽게 먹는다.”
“기력 보충 제대로 했네요. 역시 한국 음식을 먹어야 속이 든든하다니까요. 그 삼겹살집도 가고 싶네요.”
삶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서 보낸 에릭이 여느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말을 뱉자 새삼 신기하면서도 정감이 갔다.
“비싼 것만 먹고 지낼 거 아냐. 삼겹살이 생각이 나?”
“이거 왜 이러세요. 대표님이 더 좋아하실 거면서. 결국 돌고 돌아 삼겹살밖에 없죠.”
“그렇긴 하지.”
전생에서 유일하게 즐거웠던 공간이라 그런지 그곳에만 가면 나도 즐거웠다.
이 나이를 먹고는 이제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맛을 찾는다.
“그나저나 오늘 켈러 씨와 계약은 잘 됐어요?”
“조건 설정은 끝났고, 이제 태선반도체와 계약할 일만 남았지”
“잘됐네요. 켈러 씨라면 지금도 반도체 시장의 주역이잖아요. 어떤 활약을 보일지 궁금하네요.”
내가 보유한 태선반도체의 지분만 20프로에, 켈러를 데리고 온 공을 진태에게 인정받는다면 태선반도체는 내 소유가 될지도 모른다.
태선택배에 이어, 태선가 내에서 내 입지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들어올 공매도 관련 수익은 내 기반을 다지는 데 충분할 것이다.
“시장은?”
“대표님이 예상한 그대로예요. 버블 붕괴로 IT주뿐만 아니라 시장 전체가 요동치고 있어요. 만기일은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고 저희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수익은 지금까지만 해도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에릭의 말대로 미국증시 시장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은 미국보다 더 심한 주가 폭락을 맞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구글에 투자하고, 켈러와 같은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새로운 투자는 공매도 만기일 이후로 이미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다.
***
준만은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진태의 서재로 찾아갔다.
준만이 태선물산을 맡게 되면서부터 진태가 종종 전화를 걸어 물산 일을 지휘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 대면호출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서재로 들어온 준만을 보고 진태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왔냐?”
“예. 회장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준만은 일부러 사무적인 말투를 고집했다.
태선물산을 받기 전까지 자신을 방치했던 진태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진태에게 감정을 내비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자리하고 있는 태선물산의 사장 역할이 진태의 말 한마디에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녀석.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태도냐?”
한껏 누그러진 진태의 말에 준만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초로에 접어들기 시작한 준만이었지만, 진태에게 이런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준만은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준만이 성인이 되고 진태에게 처음 말해 보는 단어였다.
진태가 곁에 없을 때조차 진태를 지칭할 땐 늘 회장이라고 불렀다.
진태는 싱겁게 웃고는 말했다.
“아버지란 말. 오랜만이구나. 듣기 나쁘지 않아.”
성과를 가져와서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을 생각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준만은 괜히 발만 꼼지락거렸다.
진태는 미소를 지우고 사업 얘기를 시작했다.
“마카오에서 따온 건설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청와대에서 이번 실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그에 대한 언질을 한 적이 없어서 이렇게 불렀다.
“더욱 증진하겠습니다.”
“재미없는 녀석. 아들놈하고 영 딴판이야. 강빈이를 불렀으면 나한테 뭐라도 뜯어냈을 게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아들이라 할 지라도 비교를 당하면 속이 뒤집어질 만한데, 준만은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뿌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제 아들이지만 완벽한 사업가 아닙니까. 마카오에서도 강빈이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미국에선 또 어떤 것을 물고 돌아올지 궁금하구나. 그 녀석은 늘 재밌는 것을 물고 온단 말이지.”
“동의합니다. 게다가 돈도 제대로 쓰더군요. 이번에 샀다는 그 전용기가…”
평소에 말이 없던 준만도 강빈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자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마카오에서 있었던 강빈의 활약을 말할 때, 진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준만과 진태, 둘 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평범한 부자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