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에릭. 저 해리입니다.”
에릭은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전화를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에릭의 눈앞에 있는 모니터에서도 IT기업들의 주가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위약금을 물고 공매도를 취소하기라도 한다면 강빈이 계획했던 일에 차질이 생긴다.
에릭은 거절할 명분을 생각하며 딱딱한 말투로 응대했다.
“말씀하세요.”
“오늘 회사에서 짐 싸고 나오는 길입니다.”
“네?”
공매도 취소에 대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해리에게 들은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같이 오하이오에서 낚시를 하며 들은 바로는, 해리는 소속하고 있는 MC파이넌스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해리는 인생의 절반을 MC파이넌스에서 보냈으며,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한 회사를 자신의 손으로 일궈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회사를 나왔다니?
게다가 지금은 해리가 계약했던 공매도로 인해 MC파이넌스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되는 상황이다.
해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늘 회사에 공매도 취소에 대해 건의드렸습니다.”
“이해해요. 소속한 회사에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오며, 손해는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저희 같은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저희는 취소를 받아들일 의향이 없습니다.”
에릭이 보기에 IT버블은 아직도 다 꺼지지 않았다.
공매도 만기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오늘은 20프로가 급락했지만, 만기일까지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더 떨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공매도 취소는 증권사 입장에서 최악의 수이다.
회사 입장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는 입장을 표명한다면, 고객들의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계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
해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취소하지 않는다면 회사를 나오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그 결과가….”
“네. 지금 이렇게 됐네요. 하하…..”
보이진 않지만 해리는 아마 쓴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에릭은 서투른 위로라도 던져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에릭이 말이 없자 해리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강빈 씨는 어떻게 IT기업의 몰락을 예측한 겁니까? 게다가 시기까지 정확하게 맞물리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월가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저조차 예상 못 한 일이라고요.”
강빈의 선견지명에 대해서 놀라운 건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IT버블이 꺼질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올해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대표님은 틀린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믿을 뿐이구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 같네요.”
“믿을 수밖에 없는 보스라니. 에릭이 괜히 부러워지는데요.”
에릭은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들고 있는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해리가 이어서 말했다.
“아무튼 저는 이제 은퇴하려고 합니다.”
“....”
“이번 거래로 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제가 진행한 거래로 수많은 고객들이 돈을 잃었습니다. 자신감을 잃은 증권맨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당신은 한 번 실수했을 뿐입니다. 그 실수가 당신이 그동안 쌓아온 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하이오로 가시죠. 저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낚시를 즐기고 오자고요.”
에릭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해리에게 말했다.
“저희 회사에 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에릭이 볼 때, 이번 일은 해리의 능력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동안 그가 쌓아온 연혁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와 밀접한 월가의 인맥들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수화기 너머 해리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다른 회사에 갈 생각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네요. 알겠습니다.”
해리가 어떤 심정으로 회사를 나왔는지, 에릭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 싸움에서 GB가 또 한 번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주가 거품의 하락장은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해리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래프는 또 한 번 바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에릭은 휴대폰을 들어 강빈에게 연락이라도 하려다 그만두었다.
공매도가 만기될 9월, 축포는 그때 터트려도 늦지 않다.
***
켈러가 현재 머물고 있는 시바이트가 어제 오후 갑작스럽게 브로드컴에 인수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시바이트의 수석설계자이자, 당황한 켈러가 찾은 것은 그룹의 임원진이 아니라 나였다.
오늘 오전, 그의 급박한 전화를 받고 곧장 전용기를 타서 시바이트가 위치한 LA에 도착했다.
시바이트 사의 건물은 5층 높이로 하나의 제품만을 만들어 낸 것치고는 꽤 건실했다.
프론트에서 켈러의 초대를 받아 왔다고 말하니 별말 없이 그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켈러의 쾌활한 성격 탓에,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별 의심 없이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켈러는 손을 자신의 더벅머리에 찌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인기척을 내도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첫 만남 때의 유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켈러 씨. 저 왔습니다.”
켈러가 고개를 들어 피곤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제 잠을 못 이루었는지 켈러의 눈가 밑이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켈러가 AMD의 수석설계자에서 시바이트로 건너온 지 불과 2년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켈러는 고속 네트워크 프로세서, 머큐리언 칩을 개발하며 시바이트를 수면 위로 올렸다.
천재라는 지칭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
켈러가 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렇게 빨리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시애틀에서 오신 것 아닙니까?”
“연락받고 바로 출발했습니다. 저희가 만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잖아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켈러가 나에게 전화를 할 때, 그는 급박한 그의 심정만 전달했지 이유를 말하진 않았다.
나야 늘 경제 소식에 민감하니 브로드컴에 인수가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화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회사가 넘어간다는군요. 제가 개발한 기술이 판매되고 변질될 거랍니다. 물론 머큐리언이 제 소유는 아니지만요. 하하….”
“시바이트가 인수된다면 켈러 씨에게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브로드컴이라면 투자하는 개발비용이 상당하다고 들었는데요.”
켈러는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기술을 오로지 돈과 연결 짓습니다. 보안이 취약하다는 문제를 몇 년째 해결하지 않고 있어요. 전문인력을 고용하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를 말이죠. 그들은 오로지 머큐리언을 상품으로 보고 회사 자체를 인수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은 기술 유지 및 보수지 개발이 아닐 겁니다.”
기술개발에 대한 켈러의 순수한 의지를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를 뒤흔들었던 반도체공학자, 켈러.
어떻게 해서든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다시 한번 일어섰다.
“회사를 나오면 될 일 아닙니까. 혹시, 종속계약이라도 하신 겁니까?”
일반 회사원과 다르게 개발자는 회사와 종속계약을 하는 것이 관행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함도 있겠지만, 고급인력을 놓치기 싫은 이유도 한몫할 것이다.
켈러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말을 이었다.
“위약금이라면 얼마든지 제가 물어드리겠습니다. 저희 태선으로 와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사실 강빈 씨를 부른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저 혼자 살겠다고 팀원들이 팔아넘겨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시바이트라는 이름 없는 회사로 간 가장 큰 이유가 자신과 팀원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서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켈러의 AMD 시절부터 함께 해 온 그들은 켈러의 일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와 합이 맞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위약금까지 제가 다 물겠습니다. 켈러 씨가 오케이 사인만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그들도 내가 영입해야 될 사람들이다.
그리고 위약금은 얼마든지 낼 의향이 있었다.
켈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위약금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얼마입니까.”
“제 계약금이 연간 120만 달러, 팀원 10명의 계약금이 아마 100만 달러쯤 될 겁니다. 위약금은 그의 3배고요. 제가 남아있는 계약기간이 4년이니 그 금액은….”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를 데리고 올 수만 있다면 천만 달러도 안 되는 위약금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태선반도체의 성장과 더불어 태선 전자와의 연계 사업까지만 생각해도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계약서와 위약금 관련 서류 정리해서 GB인베스트먼트로 보내세요. 그리고 켈러 씨와 팀원들의 연봉은 지금 받고 있는 것의 10배를 약속하겠습니다.”
“네?”
목을 젖히며 놀란 켈러의 눈은, 전에 보았던 그의 집에서 봤던 괴물 스펀지의 눈과 비슷해 보일 정도로 커졌다.
나는 손을 탁, 치며 이어서 말했다.
“아, 그리고 위약금은 켈러 씨를 영입하기 위한 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주세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입니까? 어떤 기술자도 그 정도 대가를 받진 않습니다.”
스스로의 가치를 아직 모르고 있는 켈러를 보며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치에 대한 판단은 제가 합니다. 켈러 씨는 기술 개발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강빈 씨….”
“저희 태선 반도체가 차기 플래시 메모리 시장을 차지했으면 합니다. 켈러 씨가 태선반도체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주십시오.”
이 시기에 그는 90나노미터급 플래시 메모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터전이 브로드컴으로 옮겨지게 되며 그 꿈은 사라지고, 다른 업체에 빼앗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켈러가 기술개발에만 매진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까지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된다는 겁니까.”
켈러가 브로드컴에서 머무는 시기를 암흑기라고 하는 이유가 드러났다.
시바이트와의 종속계약으로, 켈러는 개발 쪽의 천재적인 재능을 죽이고 수익 보전에 대한 연구에만 매달려야 했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그가 향했던 애플, 테슬라, 인텔 등 내로라하는 기업에서 활약할 때 종속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눈가에 물기가 촉촉한 켈러를 보며 이미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과 함께 상의해보겠습니다. 조건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지만, 태선반도체로 간다는 것은 곧 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니까요.”
“충분히 생각하시고 연락 주세요.”
삶의 터전이 바뀌는 일이기 때문에 그가 고민하는 것은 당연했다.
전생에선 몰랐던 사실이지만, 저번에 집을 방문했을 때 켈러가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휴가를 자주 준다 한들, 가족과 떨어져 있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