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켈러는 시종일관 유쾌한 모습이었다.
우리를 집 안으로 불러들인 이후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직접 요리를 하고 있었다.
수석 개발자로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 충실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나와 예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들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옷을 입고 사람의 형태를 한 스펀지가 나오는 기괴한 만화영화였다.
데이지가 예나의 옷깃을 잡아끌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나의 남자친구?”
예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친구야. 잘생겼지?”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라벤더는 아까부터 힐끔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예나가 귀엽다는 듯 라벤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강빈 씨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정말 귀여운 애들이네요.”
라벤더와 데이지 모두 노란색의 찰랑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썬플라워 머리띠를 꽂고 있었는데, 영화 속의 꼬마요정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주방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요리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다들 오세요!”
켈러의 말에 다들 주방으로 이동했다.
주방에 들어서자 마치 바지락칼국수 같은 냄새가 풍겼다.
현재 시절에는 매일같이 먹었지만, 최근에는 먹은 적이 없어서 오랜만에 맡아 보는 향이었다.
“냄새가 정말 좋은데요.”
“제가 특별히 개발한 파스타입니다. 드셔보시죠.”
앞치마를 메고 양손에 한 그릇씩 들고 오는 켈러는 즐거워 보였다.
식탁 위에 놓인 파스타는 면을 펜네로 한 데다가 국물도 거의 없어서 한국의 바지락 칼국수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지만 느껴지는 향만큼은 엇비슷했다.
아이들이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포크를 가져왔다.
그것을 보고 있던 예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예쁜 아이들이에요.”
“빈말이 아니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칭찬을 들은 켈러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식사하시죠.”
“감사히 먹겠습니다.”
포크로 펜네와 조개를 같이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펜네 가운데에 고여있던 뜨거운 파스타 소스와 조개의 단맛과 담백함이 동시에 느껴지자 입이 즐거웠다.
“좋은 곳에 가서 먹는 것보다 훨씬 좋네요. 이런 맛있는 식사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켈러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맛있게 드신다면 그게 보답이지요. 저야말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꼭 한번 뵙고 싶은데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켈러와 주고받은 메일을 통해 내가 반도체 산업과 그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표현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수월한 만남이 가능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자 예나가 일어났다.
“이제 두 분이서 대화하세요. 눈치 빠른 저는 아이들과 놀아주도록 할게요.”
“... 감사합니다.”
보모역할을 자처하는 예나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예나는 데이지와 라벤더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갔다.
둘이 남게 되자 나는 옆에 두었던 LP판을 켈러에게 건넸다.
“라디오헤드와 펄 잼의 LP판입니다.”
“둘 다 제가 좋아하는 락밴드네요. 어!”
켈러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오케이, 컴퓨터’는 정말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3년 전 발매된 ‘오케이, 컴퓨터’는 라디오헤드의 세 번째 정규앨범이다.
한국의 유명가수이자 라디오 DJ인 배철수가 이 앨범을 듣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 ‘이와 같은 앨범을 만들 수 있다면 몸의 일부를 내어줄 수도 있겠다’라고 할 정도로 사랑받은 앨범이었다.
미리 재고를 받은 한국에서는 손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미국에서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다.
“제가 락밴드를 좋아하신다는 건 어떻게 안 겁니까?”
“저는 제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찾아보니 쉽게 알 수 있더군요.”
전생에 알고 있던 정보를 통한 것이지만, 이유야 중요하겠는가.
켈러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도 LP판들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천천히 그를 영입하기 위한 초석을 깔기 시작했다.
“켈러 씨. 당신이 해왔던 일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DEC에서 근무할 때부터, AMD를 거쳐 지금 일하고 계신 시바이트까지. 당신은 천재입니다.”
켈러의 업적을 다 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DEC에서는 알파시리즈의 프레서스 개발을 주도했고, 작년까지 머물던 AMD에서는 수석설계자로 일하며 애슬론 시리즈 개발을 지휘했다.
그의 업적이 CPU분야의 1인자인 인텔마저 위협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멀티코어 프로세서 개발의 기초가 되는 ‘하이퍼트랜스포트’의 개발은 AMD를 반도체 분야의 최고 자리까지 올려놓았다.
지금은 그의 유일한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시바이트의 수석설계자로서 그의 개발 능력은 여전히 출중했으나, 회사 경영방침이 그와는 정반대였다.
주도적인 개발 혁신을 꿈꾸는 켈러와 달리, 시바이트는 안정성을 추구하며 기존 제품에 보강에만 매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노려 그를 태선반도체에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LP판을 보고 있던 켈러가 시선을 나에게 옮겼다.
여전히 장난기 넘치고 맑은 눈이었다.
그를 향해 물었다.
“AMD를 최고로 끌어올린 뒤에 이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어디에, 어떤 반도체 기업이든 최고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AMD는 이미 그런 자리에 올랐죠. 성장이 끝난 기업엔 더 이상 흥미가 없습니다.”
켈러는 미련도 갖지 않는다는 듯 그저 웃어 보였다.
나는 손깍지를 하고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야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태선반도체는 어떻습니까.”
켈러가 눈꼬리를 내리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반도체 사업에 얼마나 진심인지는 그동안 주고받은 메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함께해보는 것도 좋겠죠. 하지만 저는 이미 일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시바이트는 아직 수익을 내지 못했지만 켈러를 영입한 뒤에 ‘머큐리언 네트워크 프로세서’라는 칩 제품을 만들어낸 곳이었다.
그리고 앞을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 단 하나의 제품은 유명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거금을 주며 시바이트를 인수하는 이유가 된다.
기술개발에만 매진하고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켈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수석설계자로서 개발했던 기술이 다른 회사로 넘어갔음을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
켈러는 한참 뒤에 있을 인터뷰에서 이때의 참담했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를 켈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가 관건이었다.
켈러를 보며 물었다.
“켈러 씨. 사람들은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쉽게 이직을 하는 당신을 보고, 회사에 애정이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켈러가 의외의 말을 들은 듯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정이 있기 때문에 옮길 수 있는 거라고요. 실제로 당신이 DEC와 AMD를 떠날 때, 둘 모두 최고의 회사로 자리 잡지 않았습니까. 잘 자란 아기 새를 세상에 내보내는 부모 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내 표현이 재밌었는지 켈러가 껄껄대며 웃었다.
켈러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시바이트를 키워낸 뒤에 당신 회사로 가달라는 소리입니까?”
“뻐꾸기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지 아십니까?”
대답대신 뜬금없는 내 말에 켈러는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탁란을 말하는 겁니까? 다른 새의 둥지에 있는 알을 치우고 자신의 알을 그 자리에 놓는.”
“맞습니다. 기껏 키운 새끼가 다 자라고 보니 제 자식이 아니라 다른 놈의 자식인 겁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전생에서 켈러는 시바이트가 그의 동의 없이 브로드컴에 인수된 뒤에도 몇 년이나 그곳에서 일한다.
위약금을 물고 회사를 나올 수도 있었지만,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그의 성격 탓일 것이다.
“켈러 씨가 키우던 아기 새가 제 어미를 찾아 떠나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마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조금은 눈치를 챈 듯 켈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이어서 말했다.
“이직에 대한 위약금은 물론, 당신이 원하는 업무 환경, 임금. 모두 업계 최고수준, 켈러 씨가 원한다면 그 이상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태선이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주십시오.”
지금 상태에서 회사에 대한 책임감이 높은 그를 억지로 태선으로 영입하려 했다가 반감만 살 수 있었다.
그가 시바이트에 배신감을 느낄 때,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정도만 언급하면 된다.
켈러는 곤란한 듯 볼을 긁다가 입을 뗐다.
“강빈 씨가 말하는 상황이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답이 됐습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말이 아니었으니, 켈러는 부담이 덜한 모양이었다.
서로 만족할만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응?”
밑을 쳐다보니 데이지가 나를 올려다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라벤더가 수줍은 얼굴로 꼼지락거리며 스케치북을 펼쳤다.
데이지가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강빈!”
스케치북에는 투박하게 그려진 남자가 머리 위에 왕관을 쓴 채 꽃을 양손 가득 들고 있었다.
예나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거실에서 들어오며 말했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리랬더니 강빈 씨를 그렸나 봐요.”
누가 봐도 어린애가 그린 듯한 엉성한 그림이었지만, 아이들의 진심이 담겼다고 생각하니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 다음에는 아저씨가 멋진 선물을 들고 올게.”
데이지는 쾌활하게 웃었고, 라벤더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켈러가 두 애들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녀석들이 강빈 씨가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네요.”
“저도 이 아이들이 마음에 듭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나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하루 더 머물고 가려구요. 사실 켈러 씨보다도 켈러 씨 부인인 셀리나와 더 친하거든요.”
셀리나가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사연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굳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예나가 먼저 얘기를 꺼냈으니 물어보기로 했다.
“켈러 부인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예나가 대답했다.
“집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심리학 교수를 하고 계시거든요.”
“못보고 가서 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 같이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만남을 암시하자 켈러도 밝게 웃었다.
“저도 강빈 씨와 다시 볼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하하.”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쉽다는 듯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쭈그려 앉아 말했다.
“다음에 또 보자.”
그러자 라벤더가 새끼손가락을 펴고 다른 손가락은 굽힌 채로 손을 내밀었다.
미국에서 이런 손 약속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라벤더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라벤더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모처럼의 즐거운 저녁 만찬이었다.
길로 나서는데 예나가 따라나와 말했다.
“이야기는 잘하셨나요?”
“네. 덕분에요. 아까의 배려는 감사했습니다.”
“강빈 씨가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랄게요.”
“예나 씨도 제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이거 든든한 아군이 생겨서 기분 좋네요. 강빈 씨는 이제 한국으로 가시나요?”
“아뇨. 미국에서의 남은 일정이 있어서요.”
켈러의 영입도 중요했지만 미국에는 더 급한 일정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