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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00화 (100/249)

#100화

태선 건설을 메인으로 마카오 타워가 시공에 들어간 지도 벌써 삼 개월이 흘렀다.

류이펑이 대표로 있는 ‘중국건축공정총공사’에서 설계도와 선수금을 미리 준비했기 때문에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태선증권사에서 본부장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안에서 투자를 진행하는 사이, 봄이 지나가고 여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곧 미국과 대한민국에 형성된 IT버블이 꺼지면서 파산자가 속출한다.

올해 미국 증시 S&P500의 지수는 10프로가 넘는 하락률을 기록할 것이고, 한국증시는 그보다 더 심한 하락률을 보였다.

2000년은 일반 투자자들은 물론, 증권맨들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격을 맞은 해다.

그리고 다음 주, 6월 15일에 1945년 남북분단 이래 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된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체결되며 겉으로나마 한반도는 평화에 젖을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진태의 저택을 방문했다.

서재로 찾아가자 진태는 읽고 있던 경제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온 게냐.”

진태를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마카오를 가기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약 4개월이 흘렀으니 시간이 꽤 지나긴 했다.

“그래도 한국을 뜨기 전엔 늘 방문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해외로 뜨는 게야?”

“미국으로 가려고 합니다.”

현재 짐 켈러는 애플, 퀄컴 등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IT기업들이 모셔가려고 안달이 난 인물이었다.

바쁜 일정을 보내느라 아직 찾아가진 못했지만, 메일을 통해 반도체에 대해서 심도 있는 대화를 몇 번 주고받으며 켈러에게 꽤 호감을 산 상태였다.

거기에 3달 뒤에 있을 공매도 만기일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이제는 가야 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더 자주 들리거라. 네 얘기를 듣고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워.”

“그러겠습니다.”

진태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꽤 초췌해 보였는데, 그간 건강관리를 철저히 받았는지 혈색이 꽤 돌아왔다.

진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동통신 사업에 대한 대가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마카오 타워 완공까지 1년하고 조금 더 남았으니까 시간은 있습니다. 다만 저는 옆에서 제안드릴 뿐, 결정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백부님이 결정하시겠죠.”

이동통신 사업은 준만이 실권자로 있는 태선 건설에서 따온 사업이다.

같은 그룹 내에 있는 태선전자에게 넘기더라도, 대가는 확실히 받아야 된다.

“겸손은 집어치워라. 이놈아. 준만이에게 다 들었다. 협상 조건부터 방식까지 다 네놈이 계획한 거라고. 대가를 어떻게 받을지 결정하는 것도 네가 할 것 아니냐.”

진태에게 준만을 더 높게 평가시키기 위해서 했던 말이었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제가 우선적으로 생각할 건 태선 전자의 지분입니다.”

“쉽진 않을 거다. 재만이는 천금을 내놓더라도 경영권에 대해서는 확고한 놈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겁니다.”

“네놈은 늘 생각에 가득 차 있지.”

진태가 나를 보며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내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태선을 얻으려면 태선전자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야금야금 태선전자의 지분을 가져올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동통신 사업은 그 시발점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쉽다는 듯 눈을 흘기는 진태를 향해 말했다.

“미국에 가서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얘기를 쌓고 올게요.”

진태는 그제서야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시애틀은 서울의 유월과 마찬가지로 무더운 날씨였다.

그나마 나은 점은 가끔씩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

처음에는 어색해 보였던 GB의 로고를 이제 익숙하다는 듯 보고 들어갔다.

5층으로 올라가자 회의실에서 에릭과 에밀리, 비앙카가 포트폴리오를 책상에 쌓아둔 채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보였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잘 지냈어?”

에릭이 나를 보자마자 뛰어오더니 내 손을 굳게 잡았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마지막으로 본 게 구글과 계약할 때였으니까 반년쯤 됐나?”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요.”

에릭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가슴을 툭 쳤다.

“그보다 얼굴들이 좋아 보이네. 무슨 회의를 하고 있었어?”

“전에 컨펌하신 투자들이 얘기하다가 지금은 공매도 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요. 애플과 아마존이 어제 다시 한번 급락했거든요.”

“다행이네.”

에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떨어진 주가로 추정된 이득만 15억 달러, 한화로 2조 원이 넘는다구요. 황소부터 곰까지 다 예측하시는 대표님을 보면서 세간에서 뭐라고 떠드는지 아세요?”

“뭐라고 하는데?”

“다시 태어난 노스트라다무스!”

연극 톤으로 말하는 에릭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노스트라다무스면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한 양반 아니야?”

“뭐, 1년 정도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죠. 아니면 10년 뒤? 하하. 제가 믿는다는 건 아니구요.”

에릭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전생에서 2000년대를 맞이할 때 내심 두려웠던 기억이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에밀리와 비앙카는 어떻게 지냈어?”

둘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웃었다.

에밀리가 말했다.

“저희 한국에 갔다 왔어요.”

“오호. 연락이라도 하지. 시간이 맞았으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대표님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래요.”

“한국에는 무슨 일로 간 거야?”

“그래도 저희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님이 한국 분이신데, 한 번쯤 가보자는 심정으로 저번 휴가 때 갔다 왔어요.”

“그래서 갔다 온 소감은?”

“제주도에 갔다 왔는데 노란 꽃들과 휴화산의 분화구가 너무 아름다운 거 있죠.”

휴화산이라면 한라산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2014년에 활화산으로 재분류가 되기 전까지는, 관광책자 등에서도 한라산을 휴화산이라고 정의하곤 했다.

그나저나 제주도라니.

“나도 가보지 못한 제주도를 너희가 먼저 가네.”

“한국 분이신데 제주도를 안 갔다고요?”

강현재의 삶을 살 때도, 서강빈의 삶을 살 때도 휴가 한 번 제대로 내본 적이 없었다.

몇 년에 한 번 짧게 휴가를 갈 때도 개인 투자를 하거나 카페에 가서 기업분석을 하곤 했으니까.

“다음에 다 같이 한 번 가지.”

“좋아요!”

에밀리와 비앙카가 거의 동시에 말했고 에릭은 볼멘소리로 물었다.

“온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데리러 갔을 텐데요.”

“너희 다 바쁜 거 알고 있어. 스미스 씨한테 연락해서 편하게 왔으니까 괜찮아.”

스미스는 GB인베스트먼트에서 뽑은 운전기사 겸 비서로, 주로 에릭을 보조했지만 에밀리와 비앙카도 출장을 갈 때면 같이 대동하고는 했다.

“어쩐지 오늘 스미스 씨가 안 보이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바쁘니까 그런 것도 신경 못쓰지. 고생하고 있어.”

에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릭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보다 미국으로 돌아오신 거면….”

“응. 켈러 씨와 약속이 잡혔어.”

***

전용기를 타고 LA공항에 도착하자 예나가 반갑게 맞이했다.

“세상에… 전용기라니.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저도 처음 봐요.”

“이런 데 쓰려고 있는 돈 아니겠습니까.”

예나는 감탄한 눈빛으로 보잉사에서 만든 내 전용기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워싱턴에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에요. 한국에서 온 강빈 씨만 하겠어요?’

“하하. 고생한 건 둘 다 매한가지군요.”

공항을 나와 함께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예나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보통 택시를 잡을 때 팔을 밑으로 흔들기 때문에 의문이 생겼다.

“특이하게 택시를 잡으시네요.”

“한국과 달리 미국은 거리를 지나다니는 택시가 거의 없어서 이렇게 택시를 잡는다고 하더라고요. 멀리서도 잘 보이게요. 저도 미국에 와서 알았어요.”

“그런 문화차이가 있었네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눈앞에 택시가 도착했다.

내가 먼저 뒷좌석으로 들어가고 예나가 탔다.

예나가 능숙하게 영어를 쓰며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로보스타운 19번지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택시가 출발했다.

익숙하다는 듯 거리를 바라보는 예나를 보며 말했다.

“켈러 씨와는 자주 만나셨나요?”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서 자주는 못 보고 세 달에 한 번 정도 봤어요.”

“워싱턴과 LA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 정도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켈러 씨와 은근 죽이 잘 맞거든요. 저는 켈러 씨의 농담을 좋아하기도 하고, 켈러 씨는 웃어주는 저를 좋게 보고요. 그리고 켈러 씨의 딸들. 엄청 귀여운 거 아세요?”

켈러에게 딸들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었다.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히 언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맞춰서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켈러가 전생에 락 음악을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해서 내가 집들이 선물로 가져온 것은 LP판이었다.

90년대 결성하고 지금 미국에서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밴드, 펄 잼과 록의 향락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해 특유의 우울한 멜로디로 록을 대중화시킨 영국의 록 밴드, 라디오헤드의 앨범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있었다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 있습니까?”

“음… 아직 어린 애들인데도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강빈 씨도 좋아할걸요? 하하.”

“듣던 중 다행이군요.”

예나의 말에 싱겁게 웃었다.

그사이에 도착한 로보스타운 19번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베이지 톤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2층짜리 개인주택으로, 마당에는 잔디가 깔끔하게 깎여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아직 국민학교 갈 나이도 안 됐을 법한 여자아이 둘이서 흔들 목마를 타며 꺄르르 소리를 내었다.

예나는 익숙하게 여자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중 언니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예나에게 달려갔다.

“예나!”

여자아이는 예나가 입고 있는 원피스에 얼굴을 파묻으며 비볐다.

예나가 그런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보고 말했다.

“얘는 데이지예요. 켈러 씨의 첫째 딸이죠. 저기 수줍게 서 있는 아이는 라벤더. 이름 참 예쁘게 지었죠? 꽃 이름이라니.”

“이름만큼 이쁜 아이들이네요.”

데이지는 나한테도 웃으며 인사하는 반면에 라벤더는 얼굴을 붉히며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LP판을 잠시 잔디 위에 올려놓고 라벤더에게 다가가서 쭈그려 앉았다.

“안녕?”

라벤더는 그제야 나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아, 안녕.”

인사를 하던 중, 집의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왔다.

짧은 금발에 턱수염이 수더분했다.

푸른색의 눈은 차가워 보이기도 하면서, 신비로워 보였다.

매체를 통해서 자주 봐왔던 그 얼굴.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고 있었다.

“애들아! 스폰지밥 할 시간이다! 응?”

남자가 나를 알아봤다는 듯 빙긋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나도 마주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켈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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