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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99화 (99/249)

#99화

수화기 너머 예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보다 인터뷰가 일찍 발간되었어요.”

“이제 일주일이 겨우 지났는데요?”

“빠를수록 좋다면서요. 제가 힘 좀 썼죠.”

예나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답했다.

워싱턴포스트에서 각광 받고 있는 칼럼니스트라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지금 마카오에 계시죠?”

“네. 이번 주 안으로 한국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미국에는 잘 도착하셨나 봅니다.”

“강빈 씨 인터뷰 끝나고 다음 날 올라갔으니까 꽤 됐죠. 신문은 강빈 씨 저택으로 직접 보내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보다…”

예나는 내가 할 말을 짐작이라도 한 듯 웃으며 말했다.

“캘러 씨한테 연락했어요. 제가 연락하기 전에 인터뷰를 봤는지 흥미가 생겼다는데요? 거의 고백에 가까운 인터뷰는 처음 본다면서요. 켈러 씨 이메일을 알려드릴 테니까 개인적으로 연락해 보세요.”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한국에 오시면 밥이라도 한 번 사드리죠.”

“좋아요.”

통화를 끊고 즐거운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짐 켈러.

그를 태선반도체에 영입하게 된다면 태선반도체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설령 영입에는 실패하더라도, 그의 기술을 받아오거나 공유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상당한 메리트가 있었다.

듣기로 상당히 독특한 인물이었는데,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되는 한편, 그만큼 기대가 컸다.

켈러, 한 명이 갖는 값어치가 엄청날 테니까.

‘그것을 빌미로 태선반도체를 내 계열사로 갖고 올 수도 있고.’

태선반도체가 지금은 태선전자의 자회사로 있지만 진태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태선반도체에서 내 영향력은 재만의 바로 밑에 있는 상황.

짐 켈러를 통해서 준만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한옌과 만나기까지 1시간이 조금 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기로 했다.

***

예정된 시간에 가까워질 때까지 잠을 자버렸다.

‘4시 50분’

한옌과 약속한 시간까지 10분이 남았다.

나는 서둘러서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대충 매만지고 객실을 나왔다.

귀빈실에는 준만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기업인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넥타이를 바로잡으며 자리에 앉자 준만이 말했다.

“시간이 다 되도록 안 나타나서 걱정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안 늦었으면 됐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암울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귀빈실은 저마다 떠드는 사람들로 화기애애했다.

메인 시공사가 태선 건설로 결정되었으니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이다.

마지막에야 조건을 말한 동영은 여전히 우리의 눈치를 보느라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고, 현암건설의 상팔은 어느새 우리 자리로 와서 현욱과 함께 떠들고 있었다.

시간을 맞춰서 온 것이 무색하게 한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30분 남짓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야 한옌이 등장했다.

한옌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다들 결정은 끝냈소?”

구팀장이 준만의 말을 전해 듣고 손을 들어 중국어로 말했다.

“태선 건설에서 메인 시공을 맡기로 했습니다. 다른 기업들에 대한 분배도 끝냈습니다.”

“태선이라면 믿을 만하지.”

한옌이 흡족한 미소를 만면에 띠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배에 대해선 나중에 자세히 듣도록 하고, 태선 건설 측은 나를 따라오시오. 일전에 말씀드린 사업권에 대해서 얘기 나눠보도록 하지요.”

구팀장이 준만을 쳐다보자 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시죠.”

타국의 기업가들은 보상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태선 건설 쪽에서 나온 사람 모두가 한옌의 뒤를 쫓아 귀빈실을 나갔다.

한옌이 안내한 곳은 리스보아 호텔의 최상층의 있는 VIP 객실이었다.

우리가 배정받은 객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호화롭고 전망이 좋았다.

아무리 입찰한 회사와 긴밀하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렇게 최상층의 VIP 객실을 사용하다니, 아무래도 로비를 받은 모양이었다.

현욱이 준만을 보며 말했다.

“정부 쪽 사람이라던데 이렇게 대놓고 로비 받은 걸 보여줄 줄이야. 저희한테 더 바라는 거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저 치는 꽤 힘이 있는 사람이야. 사업권이 무엇인지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상이하니까 어느 정도는 감당할 생각해야 돼.”

준만의 말을 들으며 전생에서 현암건설이 메인 시공에 이어 로비까지 할 여력은 안 되었을 텐데 과연 로비를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를 비롯한 태선 건설 측 사람들은 모두 누워도 될 정도로 넓은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의 의자에는 한옌이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중국에서 줄 수 있는 사업권은 총 두 가지요. 하나는 장쑤, 베이징에서 생산하는 자동차 부품업체 공장, 다른 하나는 차이나유니콤이 갖고 있는 전국 이동통신사업권의 이양. 둘 중 선택하시오.”

구팀장이 곧장 통역을 했다.

건설업체 선정에 대한 대가가 건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기 때문에 준만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거야? 자동차는 이미 다른 그룹에 넘겼고 이동통신? 중국까지 와서 폰팔이를 하라는 거야? 뭐 하자는 거냐고 전해.”

“알겠습니다.”

구팀장이 준만에게 전해 들은 바를 한옌에게 말하자, 한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내가 힘 써주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 대중국의 아량은 넓은 편이니까.”

말을 전해 들은 구팀장이 눈치를 살피며 우리에게 통역해주었다.

직접적인 로비 요청이나 다름없는 한옌의 말에 현욱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서사장님. 이거 듣고만 있어야 합니까? 아직 도장도 안 찍었는데 때려치웁시다.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앉게.”

“사장님!”

현욱은 애원하듯 말했지만 준만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준만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지만 한옌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차갑게 식어있었다.

준만이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볼 때는 어떠냐. 자동차 부품업체랑 이동통신. 될 만한 사업이 있어?”

“둘 다 태선에는 없는 사업이지만, 이동통신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선전자에 넘기는 조건으로 시공대금을 충당할 수 있을 겁니다.”

중국의 이동통신관련 사업권은 태선전자에서 탐낼 만한 것이었다.

준만에게는 시공대금을 충당한다고 말했지만, 대금 대신에 전자 쪽의 지분을 요구할 생각이다.

준만이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동통신 사업권이 1조 5천억 원에 달하는 가치와 맞먹을까?”

24억 달러 규모의 마카오 타워 건설.

그의 절반에 해당하는 12억 달러, 한화 약 1조 5천억 원을 대신해 받게 될 사업권이다.

나는 한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옌 총감님은 조건을 똑바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차이나유니콤의 전국 이동통신사업권의 이양이라고까지만 말했죠. 가치 산정은 사업권 결정 이후 진행하는 겁니다. 구팀장님. 이동통신 사업권의 조건을 듣겠다고 전달해주세요.”

구팀장이 통역을 진행하자 한옌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놓고 로비를 요구했던 자신에 대한 거절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건설사에 이동통신사업권을 준다고 했으니, 당연히 로비를 받아들이고 사업권 변경을 요구할 줄 알았겠지만 그의 오산이다.

이동통신사업권은 지금 가치평가가 낮게 잡혀있는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우리다.

한옌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움을 받지 않겠다니 어쩔 수 없지. 이동통신 사업권 이양이 조건이지 뭐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요?”

한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팀장에게 통역할 말을 전했다.

“이동통신과 관련된 해외사업권은 저희 태선 물산이 향후 5년간 독점할 겁니다. 독점계약이 끝나고 5년 더 사업권에 대한 권리를 갖겠다고도 전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이어질 말은 내가 아니라 준만이 해야 했다.

나를 보고 있던 준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선 건설은 이 일에서 완전히 손 떼겠네. 정당한 대가를 지급 받지 않아서 일을 안 하겠다는데 정부에서도 할 말 없겠지.”

한옌이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정부 지원을 통한 다국적 사업이라 할지라도, 기업 입장에서는 이득만을 바라보고 진행하는 사업이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진행할 기업은 없다는 말이다.

한옌이 애초에 애매한 말을 해대며 지급 방식에 대한 설명을 미루었던 것도, 이번 협상을 통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함일 것이다.

조건 협상을 차이나 유니콤에 유리하게 설정해서 뒷돈을 받거나, 아예 다른 쪽 사업권 연결을 통해 프리미엄을 받기 위해서.

그러나 태선 건설이 메인 시공을 맡겠다고 결정까지 한 마당에,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걸 정부가 알게 된다면 한옌의 수작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도대로 대화를 이끌어갔다고 생각했던 한옌은 단호한 준만의 말에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

“아, 아니요. 방금 말한 조건대로 하는 걸로 진행하겠소.”

한옌의 반응대로 이제 주도권을 쥔 것은 우리였다.

준만이 태도를 바꾼 한옌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계약서 작성하시죠.”

***

한국으로 들어와 태선증권사의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마카오에 가 있는 동안 황비서는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최소 수백억 원대의 투자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도 없었으니 일할 사람이 없었다.

펜대를 잡고 보고서들을 검토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에릭. 무슨 일이야?”

“공매도를 진행했던 기업들뿐만 아니라 IT산업 전체가 내리막길을 타고 있어요. 만일의 사태를 위해서 준비했던 자본금은 이제 유동성을 가졌어요.”

공매도를 진행하는 동안 에릭에게 GB인베스트먼트 운영에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 상태였다.

공매도 진행을 위해 맡겼던 30억 달러 외에 자본금이 담보로 묶여있었지만, 이제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투자할 포트폴리오는 준비됐어?”

“네. 회사 전체의 초점을 새로운 투자 기업분석에 맞췄어요. 대표님이 오시면 언제라도 진행 가능하게 준비할게요.”

“한국 쪽에서도 놀고 있는 돈이 있어서 처리해야 돼. 포트폴리오는 메일로 보내서 내가 컨펌하면 네가 진행해.”

“알겠습니다. 짐 켈러에게 연락은 왔나요?”

마카오에서 예나에게 소식을 들은 뒤 켈러에게 곧장 메일을 보냈었다.

나는 미래의 지식으로, 켈러는 반도체 분야의 최고권위자의 시각으로 반도체 산업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인터뷰를 봤던 에릭 역시 내가 켈러와 어떻게 만날지 궁금해했다.

“워싱턴에 있는 켈러의 집으로 놀러 오라더군. 아직 사업 얘기는 꺼내지 않은 상황이야. 한국 일 정리하고 미국 넘어가면서 봐야지.”

“잘 됐으면 좋겠네요. 무너져가던 AMD를 일으키고, 이제는 시바이트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잖아요.”

“아직 시바이트 쪽과 계약 남아 있으니까 두고 봐야지.”

IT버블 붕괴와 맞물려 공매도 만기일까지 앞으로 7개월.

그때까지 남은 공백의 시간 동안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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