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한옌의 폭탄 같은 발언 이후 다음 날이 밝았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한옌에게 건설을 진행할 시공사를 알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5시간 정도.
그때까지는 귀빈실에서 자유롭게 세미나가 진행될 것이다.
각국의 기업 대표들은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세미나에 입장했다.
한옌이 12억 달러에 준하는 사업권을 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어 보였다.
특히 카지마 건설의 대표, 코노는 일전에 4년이나 밀린 대금을 생각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나운 눈을 하고 귀빈실로 들어왔다.
준만이 앞 테이블에 놓인 차를 한 입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생각해보셨습니까?”
준만의 말을 구팀장이 통역하자 안 그래도 어두웠던 사람들은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준만이 말을 이었다.
“다들 각국 정부에 받은 보상 때문에 유찰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5시간뿐이고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태선은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준만에게 반문한 사람은 카와사키 건설의 대표, 시노에였다.
모두의 시선이 준만에게 집중되었다.
준만은 덤덤하게 그 시선을 받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메인 시공을 맡고 싶은 기업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메인 시공을 맡는 기업에게 그만한 혜택을 주려고 합니다. 저희 태선 건설은 마카오 타워 메인 시공을 가져가는 기업에게 건축 자재비의 3프로를 지급하겠습니다. 상환 기간은 시공이 끝난 시점을 기준으로 1년입니다.”
준만의 말이 통역되고 귀빈실이 한 번 술렁였다.
대개 건설공사에서 자재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30프로가 넘는다.
이는 14프로 정도에 해당하는 노무비의 2배가 넘는 비율이다.
단순계산만으로 약 2400만 달러, 한화로 치면 약 290억 원에 가까운 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재비를 감당함으로써 시공에 참여했다는 명분을 챙길 수 있고, 시공이 끝난다면 돌려받을 돈이긴 했지만, 시공 자체의 성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준만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이번 마카오 타워 건설 건에 참여한 기업은 일본의 두 기업과 한국의 세 기업, 그리고 나머지 국가에서 8개의 기업을 포함해 총 13개의 기업이 참여했다.
12개의 기업이 준만이 말한 조건으로 한 개의 기업에게 몰아준다면, 부담은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파격적인 조건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청자들을 향해 준만이 여유롭게 말했다.
“다들 그 정도도 감당 안 되시면서 사업권이든 뭐든 주는 대로 받으신 겁니까? 대가 없는 보상은 없다는 걸 잘 아실 분들이.”
다국적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각국 정부에서 기대하고 있는 바가 크다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태선 건설이야 청와대에서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한 것이 큰 이유였지만, 다른 기업들은 눈앞에 이득에 혹해서 이곳에 나온 곳들이었다.
정적을 깬 것은 스페인 건축사, 료시끄의 대표 세바스띠안이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통역가에게 작게 전달했다.
통역사가 중국어로 모두에게 말했다.
“저희 료시끄에서는 시공을 맡게 될 건축사에게 자재비 2프로를 지급하겠습니다. 태선 건설은 3프로를 말했지만 저희는 2프로가 최대입니다.”
스페인의 유수 기업 료시끄까지 나서자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나서기 시작했다.
번영건설 측에서는 노무비의 5프로를, 젠슬러 측에서는 외주비의 10프로를 감당하기로 했다.
하나둘씩 조건을 말하기 시작하자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코노가 일어났다.
“아까도 말했듯 저희 카즈마 건설에서는 사이타마 스타디움 시공 중임으로 비용을 대기는 어렵습니다.”
세바스띠안이 통역사를 통해 곧장 반문했다.
“대가 없이 이곳에 온 건축사는 아무 곳도 없네. 이곳에 참여한 이유가 뭔가?”
통역을 들은 코노가 답했다.
“부분 시공을 맡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여기 모인 모두처럼 말이죠. 이름만 올리면 사업권을 주겠다는데 누가 마다합니까.”
이제 대놓고 속내를 밝히는 코노에게 다들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준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러다가 유찰이 되겠군요. 다들 제 잇속 채울 생각만 하지, 책임지려고는 하지 않으니까요.”
유찰이라는 말에 코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코노는 이어서 자신이 내걸 조건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하… 저도 아무런 대가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이타마 스타디움이 지어지고 보너스로 지급될 주변 휴양시설에 대한 건설권을 이번 시공을 맡게 될 기업에게 지급하겠습니다.”
통역을 통해 코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반색을 표했다.
월드컵 경기장은 한 철 장사지만, 시기가 맞는다면 그 어떤 곳보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카즈마 건설이 시공하고 있는 사이타마 스타디움이 그에 딱 맞는 곳이었다.
주변에 지어질 휴양 시설의 건설권만으로 꽤나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코노까지 지급할 조건을 끝내자 준만이 말했다.
“다들 지급조건만 말씀하시고 어디 한 곳 메인 시공사를 맡겠다는 곳이 없군요.”
지급조건이 쌓이자 사람들은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아직까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전생에서 메인 시공사를 맡았던 현암건설의 대표, 상팔조차 지금은 나서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고, 결국 준만이 난색을 표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 아무도 시공하지 않겠다면 결국 이 대화가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 누군가가 맡아야 할 일. 어쩔 수 없죠. 저희 태선 건설이 맡겠습니다.”
통역을 통해 준만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잠깐 짓다가 준만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폭탄을 맡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기꺼운 것이다.
메인 시공사를 맡기를 가장 꺼려 했던 코노는 아예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그것을 본 준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겁니까!”
휘파람까지 불 뻔했던 동영은 어정쩡한 입 모양을 머쓱하게 되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통역을 듣지 않고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장한 모습이었다.
비록 연기이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나조차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준만이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아서 생경했다.
주변이 다시 진정되자 준만이 입을 열었다.
“저는 모두를 위해서 시공을 맡겠다고 했는데 당신들은 여전히 이득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까? 당신들이 약속한 공사대금도 정부에서 약속받은 사업권에 비하면 별거 아닌 거 알고 있습니다.”
준만이 한 명, 한 명 눈에 담겠다는 듯 천천히 귀빈실을 둘러보았다.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태선이 오늘 치른 대가를, 다음에는 누군가가 대신 치러야 할 겁니다. 그리고 배동영 사장님.”
“예, 예!”
동영이 긴장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일하게 조건을 말하지 않으셨더군요.”
“그, 그건….”
“번영건설이 이번 중동에서 수주한 규모가 2억 달러 규모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많이 안 바랍니다. 100억 원에 넘기십시오.”
올해 번영건설의 영업이익은 10프로 정도였지만 중동 건설권은 그보다 더 많이 남겨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예상되는 최소 영업이익만 200억 원이 넘는다.
동영이 식은땀을 흘리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서사장님. 저희가 그거 따오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데 그러십니까.”
“아니면 이번에 정부한테 받은 터널 사업을 주시든가요. 대신 그것에 대한 대금은 일절 없을 겁니다.”
아무 대가 없이 터널을 넘길 것이냐, 아니면 100억 원에 중동 건설권을 넘길 것이냐.
준만의 질문에 동영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준만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130억 원.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부 측에 연락해서 터널은 저희 태선과 현암이 받겠습니다.”
마카오 타워 참여 시공사에서 아예 이름을 빼버리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준만의 말에 동영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하…. 알겠습니다. 중동 건설권을 넘기겠습니다.”
준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쳐다보지도 않고 현욱을 불렀다.
“여기 기업들이 아까 말했던 조건들.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기입해서 계약서 작성해.”
“알겠습니다.”
현욱이 구팀장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수기로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자재비나 노무비같은 경우에는 이후 한옌과 있을 계약서에 명시하겠지만, 기록의 차원에서였고, 동영과 코노처럼 시공비 대용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건설권을 주는 경우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준만을 보며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인상을 찌푸린 채 연기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삭이듯 말했다.
“요새 밤마다 어머니 데리고 영화관에 가시더니 연기가 일품이시네요.”
“영화관 하나를 살까 고민 중이야.”
준만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나와 준만이 계획했던 대로 완벽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박사장이 모든 계약서를 작성하고 돌아오고, 준만이 계약서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촉박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한옌이 오기까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고작 두 시간 만에 메인 시공사 선정과, 지분 분배가 끝난 것이다.
준만의 연기가 단단히 한몫을 해냈다.
박사장과 구팀장을 돌려보내고 준만이 머물고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준만이 박사장이 작성한 계약서들을 살피며 말했다.
“네 말대로 잘 됐다. 중국 측에서 선수금으로 12억 달러를 지급하기로 했고, 나머지는 보자… 어림잡아 총시공비의 10프로 정도는 다른 건설사에서 대용해줄 거고 사이타마 스타디움 휴양시설건설권과 중동 쪽 건설권까지. 알맹이만 골라 먹었어.”
다른 건설사들이 대용해줄 비용은 이자가 붙지 않는 조건이었다.
중국에서 선수금으로 받을 50프로와 다른 건축사들에게 대용받는 10프로까지 총 60프로가 태선건설이 부담해야 할 시공비에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거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어요?”
“네 말대로 중국에서 제대로 보상을 지급하고, 마카오 타워 건설이 성공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말이다. 허허.”
아직 확신하긴 이르다는 말이었지만, 나를 믿고 있는 듯 만족한 눈빛이었다.
“그나저나 중국에서 지급하기로 한 사업권이 무엇일 것 같으냐. 무려 12억 달러에 달하는 사업권이야. 우리야 그룹이지만, 건설사만 있는 곳들도 많았으니 건축 쪽과 관련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가늠이 잘 안 되는구나.”
준만의 예상과 달리 중국 쪽에서 대가로 지급할 사업은 건축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동통신사업이었다.
나도 미리 정보를 알고 있던 것이 아니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설사에게 주는 대가가 이동통신이라니. 이런 양아치 새끼들.’
현암건설이 이동통신사업을 넘겨받아서 대성하긴 했지만, 중국 측에서 순수한 의도로 주었을 리가 없다.
그들로서는 처치 불가의 사업을 명목상 대가로 지급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을 지금 말할 필요는 없으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두 시간 정도 뒤면 알게 되겠죠. 저는 방에서 조금 쉬다가 오겠습니다.”
“알았다. 두 시간 뒤에 보자꾸나.”
준만을 향해 인사하고 방을 나왔다.
서둘러서 나온 이유는 아까부터 오른쪽 호주머니에 있는 전화기의 진동이 울렸기 때문이다.
에릭과 황비서에게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고 언질해 두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복도를 빠져나오자마자 전화를 받았는데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강빈 씨. 저 천예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