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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97화 (97/249)

#97화

코노가 직접 우리 앞으로 다가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태선에서 나오신 분들인 줄 몰랐습니다.”

구팀장은 코노의 말을 곧장 직역해 준만에게 들려주었다.

준만은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는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서이사는 충분히 자격을 갖춘 사람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전하게.”

구팀장이 일본어로 코노에게 전달하자 코노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자리로 돌아갔다.

코노가 사장으로 있는 카지마 건설은 건설 분야에서 일본 1, 2위를 다투는 곳이지만 전체 그룹의 규모를 따졌을 때 태선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한국도, 일본도 아닌 마카오에서 태선이라는 이름이 갖는 힘을 목도하긴 했지만,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다.

“태선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준만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태선이라지만 내로라하는 해외기업에 힘을 쓸 순 없지. 하지만 카즈마 그룹 산하의 IT 기업에선 태선 제품을 받고 있고 우리 물산과도 연계된 사업이 있거든. 그러니 함부로 말을 못 할 테다.”

몰랐던 사실을 듣게 되자 이 상황이 납득이 되었다.

직접 찾아와서 사과까지 하긴 했지만, 이곳에 앉은 사람들 중 카지마 건설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근에 진행한 것만 봐도, 2년 뒤에 있을 한일월드컵의 경기장 중 하나를 짓고 있는 곳이 바로 카지마 건설이니까.

그 시공의 결과가 별로 안 좋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한국 기업은 원래부터 우리를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고, 코노와의 작은 설전 이후에는 다른 기업들의 시선도 경외로 바뀐 것이 느껴졌다.

호화스러운 조찬이 끝나고 머리숱이 많지만 하얗게 센 중국인이 귀빈실에 입장했다.

일면식이 있었는지, 현욱이 우리에게 설명했다.

“이번 건설 건의 전권을 위임받은 류이펑 대표입니다. 시공의 설계를 맡은 국영기업 ‘중국건축공정총공사’의 대표죠.”

류이펑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본격적인 입찰에 앞서 간략하게나마 사업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모두 사업계획서는 검토를 끝내고 이 자리에 온 것이겠지만, 국영기업이라서 그런지 절차를 정석으로 밟았다.

사설을 빼고 요약하자면, 마카오 타워에 세워질 건축물들에 대한 소개에 가까웠다.

마카오 타워 근처 보도와 화장실, 엘리베이터와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전망대와 레스토랑, 영화관, 쇼핑몰까지 꽤나 구체적이었다.

그중에 류이펑이 가장 강조한 것은 타워의 233m 높이에 설치할 ‘스카이워커X’였다.

건물 외연에 투명한 바닥을 설치해 하늘을 걷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내는 시설이었다.

사람들은 애초에 입찰할 생각이 없기 때문인지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류이펑의 사업계획 설명이 끝나자 한쪽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 짜증을 내던 카지마 건설의 코노였다.

“역시 중국의 계획력은 알아주어야 합니다. 이대로 타워가 지어진다면 마카오는 또 하나의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겠군요.”

코노의 말을 통역사가 전달하자 류이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코노 씨가 일전에 시공하신 쿤밍 스타디움은 인상 깊었습니다.”

아까 말했던 게 생각났는지, 코노의 얼굴에 살짝 불쾌감이 엿보였지만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보다 아까와는 태도를 완전히 뒤집은 코노에게 기가 막혔다.

아까 일본어를 알아들은 사람들도 지그시 코노를 노려보고 있었다.

류이펑이 이어서 말했다.

“메인 시공을 맡게 될 기업이 선정되면 대가는 정부에서 나오신 한옌 총감님과 협의하시게 될 겁니다.”

중국 정부의 총감(总监)이라면 해외사업본부장을 뜻한다.

그나저나 대가를 정하고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정이 된 후에나 정한다니.

코노가 그렇게나 질색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정 방식은 정해진 것이 없으니 자유롭게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퇴장해보겠습니다.”

말이 좋아 선정이지, 원하는 사람은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류이펑도 그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희생양을 정하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류이펑이 퇴장하자 코노가 사람들 앞에 섰다.

“이곳에 나오신 분들이 수익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정부에 등 떠밀려 나온 것이겠지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치코.”

코노의 옆에 있던 남자가 종이를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카지노 사업 이후 마카오의 흑자전환과 그에 따른 전망을 분석한 자료였다.

“마카오가 정치적으로 불안해 보이겠지만, 보시는 자료와 같이 마카오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 경치!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면서 느끼신 게 있을 겁니다. 마카오는 분명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것이고, 마카오 타워 건설의 시공사는 세계에서 모르는 곳이 없게 될 겁니다.”

스페인 기업, 료시끄의 대표가 번역가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렇게 탐나면 코노 씨가 맡으면 될 일 아닙니까?”

“저희는 안타깝게도 2년 뒤 월드컵 경기장으로 쓰일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시공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대체할 기업이 없어서 이곳에 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죠. 근처 보도 시공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략으로 갖고 나온 것이 마카오 타워의 가치 올려치기라니.

카지마 건설의 전략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꽤 굴린 것 같지만,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

게다가 마카오 타워 건설권의 가치가 올라가면 나에겐 좋을 게 없다.

“嘘つき(거짓말쟁이).”

내가 일본어로 말하자 코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둘러보며 이어서 말했다.

“愚かな奴らにこのごみのような事業を渡そう(이 멍청한 놈들에게 쓰레기 같은 사업을 넘기자).”

코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이 한 말이잖아. 안 그래? 구팀장님. 제가 한 말을 중국어로 통역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구팀장이 중국어로 그대로 직역하자 귀빈실에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아까 코노에게 질문했던 스페인 기업의 사장은 코노에게 받았던 서류를 두 손으로 찢었다.

준만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와 코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코노를 향해 한 마디 더 쏘아붙였다.

“마츠다 코노 씨.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한 가정의 가장이고요. 자신의 잇속만 생각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코노는 불에 타오를 듯 붉어진 뺨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준만이 그런 나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다. 네 덕분에 이제 우리 생각대로 쉽게 가겠어.”

“판은 깔아드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나설 차례예요.”

“걱정 마라.”

준만이 씨익 웃었다.

나의 발언 이후로 귀빈실은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들 모두 각국을 대표하는 건설사의 사장들이다.

게다가 입찰에 참여하는 조건만으로 정부에게 사업권을 받았을 터이다.

태선 건설만 해도 인천여객부두의 증축 건설 건을 따냈고, 번영건설과 현암건설은 국가사업의 일환인 터널 사업의 지분을 각각 약속받았다고 들었다.

다른 나라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입찰에 실패하게 되더라도 그럴싸한 명분은 들고 가야 한다.

준만이 준비해두었던 말을 하려고 하는데 한 남성이 들어왔다.

이번 시공의 대가를 산정하는 역할을 맡은 한옌 총감이었다.

한옌의 이마는 시원하게 벗겨졌고 머리는 왁스를 바른 건지 떡이 되어 있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피부와 안경알 안에서 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한옌은 작은 눈알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입을 열었다.

“마카오 타워 건설은 2년 전에 한 번 엎어진 사업이요. 이번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된다는 말이지. 개인적으로 메인 시공은 이미 한번 중국 정부 사업을 했던 카지마. 아니면 태선이나 젠슬러 쪽에서 맡으면 좋을 것 같지만.. 다른 곳도 크게 상관은 안 하겠소.”

직접적으로 기업명을 언급하자 통역하기도 전부터 코노의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미국 건설사인 젠슬러의 대표, 루카스도 이마를 짚었다.

그나저나 중국어임에도 불구하고 한옌의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옛날 사람의 느낌이 났다.

그때, 통역을 들은 번영건설의 사장 동영이 손을 들며 물었다.

“마카오 타워 시공에 대한 대가가 어떻게 됩니까…?”

한옌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쯧, 설명을 먼저 다 듣고 질문하시오. 먼저 완공 시기는 마카오 반환 2주년에 맞출 거요. 류이펑한테 시설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들었을 거고, 당신들한테 중요한 건 지급할 비용이겠지. 예상 시공비는 24억 달러라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거요. 선수금으로 그중 절반을 지급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사업권으로 주겠소.”

“12억 달러를 다른 사업권으로 주다니요. 24억 달러 규모의 시공이라면 저희 번영건설 같은 경우에는 사활을 걸어야 겨우 가능할 정도입니다.”

동영의 말을 통역해서 들은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12억 달러를 다른 사업권으로 지급한다니, 납득할 수 없는 말이겠지.

그러나 중국에서 지급할 사업권은 12억 달러를 수복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중국 정부가 넘길 사업은 바로 이동통신 사업권.

휴대폰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10억 명의 인구가 있는 중국의 이동통신 사업은 그야말로 노다지 사업이다.

이에 우리나라 이동통신 사업에서도 중국 시장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 사업권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는 기업이 있었다.

중국 정보산업국 관리하의 차이나유니콤.

이 기업을 걸쳐 출시되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롭고 지급해야 할 수수료가 컸다.

타국이 중국의 이동통신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사업권의 일부를 이양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전생에서 마카오 타워 건설권을 받았던 현암건설의 상팔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한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소. 여러분의 의욕을 불러일으킬 만한 말이오. 이 마카오 타워 건설은 장쩌민 주석께서도 눈여겨보고 있소. 건설을 맡은 시공사에게는 영광일 것이오.”

우리에게 진심으로 한 말인지 한옌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퇴장했다.

장쩌민은 1990년에 중국 최고실권자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선출됨으로써 현재 당과 전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한 인물이다.

한옌의 말을 들은 현욱이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낮게 말했다.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러는 걸까요?”

“낸들 아나. 중국에 장쩌민교라도 있나 보지.”

준만도 혀를 내둘렀다.

귀빈실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우리와 언어만 다를 뿐, 엇비슷해 보였다.

비관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준만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표정을 보니까 지금은 두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러게 말이다. 히어로는 절망에 빠졌을 때 비로소 빛나는 법이니까.”

“어머니랑 극장을 대관했다더니, 슈퍼맨이라도 보셨나 봐요?”

“슈퍼맨이 언제 적 영화냐. 네 엄마랑 본 건 배트맨이야.”

준만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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