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게 정말 네 거라고…?”
준만이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여객기를 올려보았다.
반년 전쯤 미국의 항공사 제작사인 보잉에 의뢰해서 만든 내 전용기였다.
2년은 걸릴 거라던 보잉사에 프리미엄까지 총 800억 원을 지급해서 기존 제작 기간보다 빠르게 받을 수 있었다.
외관을 비롯한 기본적인 형식은 1996년에 보잉이 에어쇼에서 발표한 ‘보잉 757’이었지만 내부는 내가 의뢰한 대로 기존의 여객기보다 넓고 쾌적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것이 비행시간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썼다.
“비행시간이 짧은 게 안타까우실걸요.”
“대단하구나. 유지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1년에 몇십억밖에 안 깨지던데요.”
내 말에 준만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제 돈 쓰는 건 누구보다 잘하는구나. 하하. 그런데 이거 허가는 받은 거냐?”
“네. 중국 정부에서 초청한 거니까 절차도 쉽게 패스되더라고요. 5년 전에 개항한 마카오 국제공항으로 바로 갑니다.”
현욱도 전용기에는 처음 타봤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도련님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려보고 정말 영광입니다. 하하.”
“하하. 아닙니다.”
준만이 흐뭇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거 호칭은 바꾸기로 하지.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도련님 거릴 수는 없으니까. 뭐가 좋을까?”
“그럼 도련님 말고 이사님으로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도련님이 정식으로 이사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태선가 내에서 위치도 있고 실제로 갖고 있는 지분도 많으시고요.”
“괜찮은 것 같네. 강빈이 너는 어때?”
“저는 상관없습니다.”
간단하게 지칭이 정해지고 다들 넓은 자리에 앉았다.
푹신푹신한 소파에 몸이 녹아들 듯 파고들었다.
승무원이 나에게 다가와 두 손을 배에 올리며 공손하게 물었다.
“음료는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음….”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마카오에 도착하면 조금 늦은 저녁이었다.
술 한잔을 하더라도 문제없을 시간.
“모히또. 베이스 럼은 전에 주문했던 트리니다드로.”
“준비하겠습니다.”
준만과 현욱도 나를 바라보다가 같은 걸로 달라고 주문했다.
현욱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히또는 종종 마셔봤지만 트리니다…?는 처음 듣습니다. 비싼 럼이겠죠?”
“하하. 트리니다드 토바고. 카리브 제도에 있는 나라 이름입니다. 저 럼은 토바고의 독립 50주년 기념으로 나온 거고요. 가격이 궁금하신가 봐요.”
“세계적인 억만장자인 도련, 아차. 이사님이 마시는 술의 가격이 안 궁금한 사람도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말하기 부담되네요. 3000만 원이 조금 안 됩니다.”
“네?”
현욱이 토끼 눈을 하며 방금 나온 모히또를 쳐다보았다.
준만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한 잔을 마시고 입에 머금었다.
“박사장도 한잔하고 쉬어 둬. 지금 아니면 쉬기 힘든 거 알잖아.”
“아, 알겠습니다.”
현욱은 모히또가 담긴 투명한 잔을 바라보다가 한 입 마시고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어두운 낯빛은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겠구나 싶어 피식 웃고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육지를 벗어나지 못해서 밑에는 밭과 작은 농가들이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카오에 가는 이유인 마카오 타워 건설.
이 사업권 자체만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큰데, 부가적으로 딸려오는 이득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다른 경쟁사들은 마카오 타워 건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에 대한 신뢰도도 적었지만 정치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나한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잔을 바라보고 있는 준만에게 말했다.
“아버지. 걱정되지 않으세요?”
“걱정되지. 네 말대로 된다면 태선건설을 넘어서 태선물산 자체가 클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받게 될 테니까.”
나로 인해 물산의 사장 자리까지 맡게 된 준만이지만, 원체 성격이 온순하고 방어적인 사람이다.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실패하게 된다면 내가 감당하겠다고 말을 하려는데 준만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해볼 만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청와대의 압력 때문에 시작하게 된 사업이지만, 이득을 갖고 올 수 있는 네 말에 생각을 바꿔 먹었다. 이용당하지 않고 주도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말이야.”
“아버지….”
준만은 어느덧 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준만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빈말을 몇 번이고 해왔지만, 이제는 더 말할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카오에 가면 네 사업 기질을 발휘해야 할 거다. 같이 잘해보자.”
“제가 언제 실망시킨 적 있습니까.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준만이 나를 믿고 있다는 말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창밖으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며 모히또를 홀짝였다.
***
중국 쪽에서도 꽤 좋은 숙소를 제공했다.
마카오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곳이자 마카오를 살려낸 기적으로 불리는 ‘리스보아 호텔 카지노’.
마카오는 작년까지 국내총생산이 마이너스를 보였지만, 중국 정부의 카지노 산업 지원 정책을 통해 올해부터 흑자전환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카지노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리스보아 호텔이었다.
천 개가 넘는 객실과 9개의 고급레스토랑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돔 형식으로 감싼 카지노가 장관이었다.
약 10년 전 증축을 끝낸 리스보아는 상반부는 호텔로, 하반부는 카지노로 특이하게 건설되었다.
현욱이 이채를 띄며 말했다.
“리스보아를 다녀오지 않으면 그것은 마카오를 다녀온 것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인 것 같네요.”
“그러게요. 이런 건설 방식이 비효율적으로 보이는데 상업성이 뛰어나네요.”
아직까지 관광이나 레저 사업 쪽으로는 관심이 없었지만 언제 기회가 닿아 시작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건물 형태를 눈여겨보았다.
입구로 다가갈수록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고 반짝이는 불빛들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구팀장이 일행들 앞에 섰다.
구팀장은 태선물산 소속으로 중국과 일본 유학 경험을 토대로 통역사의 역할로 동행하게 되었다.
“카지노와 호텔 모두 같은 건물이지만 입구는 다릅니다. 호텔로 바로 안내할까요?”
“그래. 관광하러 온 건 아니니까.”
준만의 말을 듣고 구팀장이 익숙한 듯 일행들을 이끌고 호텔 입구로 향했다.
가는 길에 중국어로 ‘푸징’이라고 쓰여있는 간판 아래, 영어로 카지노 리스보아가 쓰여 있었다.
붉고 푸른 불빛이 쏟아지는 거리에 사람들은 담배를 태우며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개중에는 소리를 치며 카지노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어를 어느 정도는 하지만 능숙하지는 않아서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이 욕이라는 것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한탕을 위해서 카지노를 방문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나가는 사람이야 흔하니까.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호텔에 금방 도착했다.
객실 수속까지 밟고 준만이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럼 푹 쉬고 내일 시간 맞춰서 모이자고.”
***
다음날 이른 저녁, 리스보아 호텔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의 귀빈실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에서 온 현암건설과 번영건설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서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 현암건설의 사장 이상팔입니다.”
건설 사장이라기엔 꽤 젊어 보이는 사십 대 중반의 남자가 다가왔다.
현암건설을 통해 GB물류센터를 짓긴 했지만 일면식은 없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상팔은 준만과 현욱에게도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번영건설에서 나온 초로의 남자는 튀어나온 배를 씰룩거리며 곧장 준만을 향해 다가갔다.
“번영건설 사장, 배동영이라고 합니다. 이번 인연으로 서사장님과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준만이 가볍게 인사를 받고 동영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현욱과 나에게도 인사했다.
기업 간의 경쟁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각국을 대표하는 건설사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동지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한쪽에서 짜증이 가득 찬 일본어가 들렸다.
자리 앞에는 카지마 건설의 사장, 마츠다 코노라는 명찰이 올려져 있었다.
“시노에 씨. 당신도 억지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거 아니야? 나는 일전에 중국 건설 사업권을 따냈던 사람으로서 똑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아. 5년 전에 끝낸 사업의 대금을 받은 게 1년도 채 안 됐어. 시공이 끝나고 4년 뒤에나 주면 우리는 뭘 먹고 살라는 거야? 이 멍청한 놈들한테 이 쓰레기 같은 사업을 넘기자고.”
같은 일본건설사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렇게 다 들리게 말하다니.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다들 알아주는 건설사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나 같은 경우만 해도 전생에서 소프트뱅크에 투자할 때, 일본어를 배워 두었기 때문에 이 정도 회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카와사키 건설의 사장, 카와사키 시노에가 코노에게 말했다.
“코노 씨.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우리 목적을 잊지 마.”
“나도 알고 있다고. 여기에 있는 누구한테든 사업권을 넘기면 되잖아. 이런 자리에 온 것 자체가 불쾌할 뿐이야.”
그나마 눈치를 챙길 줄 아는 시노에가 코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뒤에 서 있는 다른 일본인 직원들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다행히 중국 정부 쪽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내가 알아들었다는 눈치로 그들을 흘기고 있자 준만이 물었다.
“영어도 수준급이더니 일본어도 할 줄 아는 거야?”
“기회가 있어서 조금은 할 줄 압니다.”
“뭐라고 했는지 알아들었어?”
“저희 예상대로입니다.”
준만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은 마카오 타워 건설의 메인 시공사.
이곳에 온 다른 사람들의 목적과는 정반대에 있었다.
그때 코노가 나를 향해 말하고, 코노 옆에 있던 통역사가 중국어로 구팀장에게 전달했다.
구팀장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이사님이 이곳에 온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뭐라고 대답할까요?”
코노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임원이든, 사장이든 간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중년을 넘긴 나이였으니까.
새파랗게 어린놈이 입찰에 끼어든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준만이 코노를 노려보며 말했다.
“노안이라서 우리 앞에 놓인 명찰을 못 읽은 모양인데, 우리가 어디 그룹인지 확실하게 전해.”
태선 그룹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입지를 확실히 하고 있는 거대 그룹이다.
구팀장에서 통역사로, 통역사에서 코노에게 준만의 말이 전해지자 코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