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괜찮으십니까?”
경주를 끌고 나간 오실장을 제외하고도 진태의 뒤에는 경호원만 세 명이 서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그만큼 진태가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가사도우미 몇 명이 와서 조각난 찻잔을 치우고 바닥을 닦기 바빴다.
“괜찮아. 제까짓 게 해봤자지.”
“왜 만나주신 겁니까, 아예 내친 것 아니었습니까?”
진태가 내친 사람을 다시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결과적으로 다시 쫓아내긴 했지만 이런 자리를 허락하다니.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원칙을 깰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이가 들더니 감수성이 풍부해지신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진태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할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두 번째 서랍에서 두통약 좀 꺼내.”
진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에 서 있던 경호원 중 한 명이 재빠르게 서랍을 열어 진태에게 알약 한 알을 넘겼다.
알약을 물도 없이 꿀꺽 삼킨 진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몸은 고통으로 작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진태의 끝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진태는 숨을 조금 고르다가 말을 꺼냈다.
“내가 너무하냐.”
진태의 말에 고민도 잠시,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같잖은 위로에 감동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태선가를 지키는 총수로서는 할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로서는 최악입니다.”
“이놈. 못 하는 말이 없어. 흐흐.”
진태가 웃다가 짧게 기침을 몇 번 하고는 이어서 말했다.
“네놈은 아버지가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안다고 최악이라는 거냐?”
“아버지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좋은 아버지는 두고 있습니다.”
“준만이가 좋은 아버지라고?”
“예. 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삶도 바꿀 정도로 용기 있고 자상한 사람입니다.”
진태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겠구나.”
“탐내신 적도 없으시잖아요.”
내 말에 진태가 껄껄대며 웃었다.
탐내는 것이라면 뭐든지 손에 넣는 진태가 좋은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었다면 연기를 해서라도 가졌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세상을 바꾸기에 진태의 세상은 너무 넓었고, 그 세상을 좁히기엔 진태의 욕심이 너무 많았다.
진태가 예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천회장 막내 손녀는 어땠어. 사진 속 그대로더냐?”
“예. 제가 지금껏 만나 본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심성은.”
“밝고 대화하는 상대방에게 맞추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를 주고받더라도 저에게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런 여자를 왜 거절했어?”
진태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짓궂게 웃고 있었다.
내가 했던 대화는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예나를 거절한 이유는.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 자금 들어오고 지금이 가장 바쁠 때예요. 태선 계열사도 이제 태선택배 하나고요. 저는 아직 성장하고 싶습니다.”
“성장하면서 할 거 하면 될 거 아니냐.”
“저는 제 발목 잡힐 일은 만들지 않습니다.”
“알겠다, 이놈아. 사업만 계속하고 나머지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진태는 애초에 내가 연애를 하길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더 묻지 않았다.
이것마저 시험일까,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고개를 저었다.
더 대화하고 싶은 화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다음 주에 마카오 타워 건설 건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건설에서 진행한다는 건 들었다. 너는 준만이가 따라오라고 한 게야?”
“네. 아무래도 투자와 사업적인 부분에서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가서 좋은 경험을 쌓고 와라. 비즈니스든 문화든 간에 나라마다 다르니까 좋은 경험이 될 게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말이 1초마다 달라지니까 눈앞에 이득이 생기면 곧장 잡아야 돼. 뭐, 너보다 그걸 잘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미 카드 안의 내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나보다 이득을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가 물산 사장으로 들어가면서 맡은 가장 큰 일입니다. 꼭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네 뜻대로 할 때가 결과가 가장 좋더라. 마음대로 활개 치다가 오거라.”
“알겠습니다.”
준만이 태선물산 사장 자리에 오른 지 이제 1년이다.
태선물산 내에서는 확실히 자리를 잡은 모양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번 마카워 타워 건설 건을 통해서 준만의 위치를 태선가 내에서 공고히 할 생각이었다.
***
“저쪽 스탠드는 조금만 낮춰주세요. 조명 쏘면 그림자 지니까 소파 좀 더 오른쪽으로. 카메라 각도는 20도만 더 틀게요. 조금만 더. 스탑!”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예나가 열정적으로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예나는 다음주까지 한국에 있다가 워싱턴으로 가는데, 내가 다음 주에 마카오로 떠나기 때문에 급하게 잡은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하는 것은 꺼려 하긴 했지만, 그 대가가 짐 켈러와의 연줄이라면 몇 번이든 할 수 있었다.
예나가 바빠 보였기 때문에 촬영 스팟 바깥에서 서서 기다렸다.
장소 컨셉이 서재였는지 고풍스러운 느낌을 내는 소파와 책장, 스탠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촬영 스탭 중 한 명이 소파에 앉아서 자세를 바꿔가며 구도를 맞췄다.
워싱턴포스트에서 쓰일 인터뷰기 때문에 감독을 비롯한 몇몇 스탭들은 미국인이었지만 대부분은 한국에서 구했는지 한국인들이 대다수였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현장을 지휘하는 예나가 눈에 띄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뒤돌아보곤 나를 찾아냈다.
“강빈 씨! 오셨으면 말을 하지.”
“바쁜 데 방해할 수는 없죠. 그나저나 직접 일하는 모습을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지네요.”
“칭찬 감사해요. 강빈 씨는 여전히 멋지네요.”
“하하. 그보다 혹시 질문지 같은 건 없나요?”
사업이나 협상을 진행할 때는 상대가 누구라도 안 떨렸지만 인터뷰는 다르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런 분야에 관해서 나는 젬병이었다.
저번 인터뷰 때도 언론사 사람이 써준 대본을 읊는 데에 불과했다.
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강빈 씨가 인터뷰에 긴장하실 줄은 몰랐어요.”
“긴장했다기보다 꾸밈없는 사람이라고 하죠. 인터뷰는 자신을 꾸며야 하는 자리고요. 그래서 그런데 조언해주실 게 있습니까?”
“음…. 저희는 정해진 형식을 따라가지 않아서 대본은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모두 즉흥으로 한다는 컨셉으로 사랑받고 있거든요. 그래서 더 긴장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긴장할 필요 없다고 늘 말해왔어요. 오히려 긴장한 모습을 보고 진실성 있다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또….”
예나는 다른 조언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애써준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더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역시 인터뷰어답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 도사시네요.”
“직업병이죠. 뭐. 하하. 아무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솔직하게!”
“알겠습니다.”
사실 내가 했던 고민은 대중들에게 비치는 나의 이미지보다도 켈러에게 어떻게 어필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세계적인 공학자, 짐 켈러에게 반도체에 대한 지식을 뽐내야 할지, 혹은 직접적으로 그를 원한다고 어필해야 될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저 솔직하게만 하면 된다는 예나의 말을 듣고 나답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세팅이 끝났네요. 괜찮으시면 촬영 들어가실까요?”
“네. 준비됐습니다.
조명으로 인해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스팟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얀색 가림막처럼 보이는 것을 통했기 때문에 조명이 직접 닿진 않았지만 밝은 건 여전했다.
적응이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눈이 찌푸려졌다.
“어차피 영상으로도 안 쓸 건데 계속 이래야 되나요?”
“저희가 따로 각 잡고 사진 찍는 건 아니어서 감독님이 잘 나온 컷 몇 개 건지면 사인하실 거예요. 많이 불편하신가요?”
“아뇨. 곧 괜찮아질 겁니다. 진행하시죠.”
예나가 소파 맞은편에 앉아 마이크를 쥐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에 기재되는 인터뷰지만 번역이 되어서 들어가는 듯 한글로 진행되었다.
“요즘 이름만으로도 재력이 느껴지는 투자회사죠. GB인베스트먼트의 CEO 서강빈 씨를 모셨습니다.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미국이야 억만장자가 몇백 명이나 있지만 한국에서는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데요. 게다가 상속으로 인해 억만장자가 된 사람을 제외하면 그 숫자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서대표님이십니다. 억만장자가 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억만장자가 된 소감이라.
억만장자는 보유자산 1조 원을 가진 재벌을 뜻했고, 보유자산이 1조 원을 넘긴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다.
태선가에서 공식적으로 상속받은 것이 없으니 재벌가 사람이지만 웃기게도 자수성가한 재벌이 되어버렸다.
입에 발린 소리를 할까도 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별 감흥이 없습니다. 돈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해주셨는데요. 서대표님이 생각하는 목표가 무엇인가요?”
내가 원하는 목표.
서강빈으로 다시 태어나서 생각했던 목표는 단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것만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
“세계최고의 부자입니다.”
“네? 하하…. 방금 돈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네. 돈은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인 거죠.”
예나가 멋쩍게 웃으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롤모델이나 목표, 투자 성공 비결과 같은 시시한 질문들이었다.
성의껏 대답은 하되 어떻게 하면 짐 켈러와 연관해서 질문할 수 있을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요새 관심 있는 분야의 사업이 있나요?”
“네. 저는 최근 반도체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서대표님은 한국 굴지의 반도체기업, 태선반도체의 지분도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갖고 있는 기업에 대한 관심인가요?”
“아뇨. 반도체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 이유는 한 사람 때문입니다.”
예나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연기하며 물었다.
“그렇게까지 서대표님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게다가 반도체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저도 딱 한 명. 예상이 가는 사람이 있긴 하네요.”
“예나 씨가 맞혀보실래요?”
“그럴까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최근에 제가 인터뷰했고, 작년 AMD의 수석설계자로서 이름을 널리 알린 천재 반도체 공학자!”
손을 들어 예나가 말하려는 것을 제지하고 마이크를 가로챘다.
“짐 켈러 씨. 보고 싶습니다. 꼭 한 번 연락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