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이제 중국의 행정특별구가 되었지만, 수백 년 전부터 포르투갈인들이 지어온 유럽풍의 건축물과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포르투갈만의, 중국만의 분위기가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마카오의 고유한 분위기와 정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마카오 카지노가 시작되고 몇 년 뒤에는 도박과 유흥의 상징과도 같은 라스베이거스의 매출을 꺾을 정도로 명실공히 최고의 관광지가 된다.
마카오 타워를 가져가자는 말에 준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태선 건설이 메인 시공을 맡자고? 지금까지 얘기는 허투루 들은 거야?”
“아닙니다. 아버지. 말 그대로 마카오 타워 경쟁 입찰에서 저희가 낙찰받자는 겁니다.”
전생에서는 현암건설이 마카오 타워 메인 시공사가 되었다.
한국을 내로라하는 태선물산과 외국 유수의 기업을 제치고 현암건설이 낙찰받은 것엔 이유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중국 쪽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명목상으로 참여한 것이지, 낙찰받기 위해서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암건설 또한 낙찰받기를 거부했지만 중국 쪽에서 내건 조건과 입찰에 포기한 다른 기업들로부터 대가를 받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마카오 타워 건설 건을 낙찰받았다.
결과는 모두가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였다.
현암건설은 시공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건설사들로부터 다수의 사업권을 양보받은 데다가 중국의 이동통신 사업권에 참여할 지분을 얻었다.
게다가 마카오 타워는 세계에서 손에 꼽는 마카오의 상징이 될 정도로 대성했다.
이런 사정을 설명해봐야 아직까지 근거랄 게 없기 때문에, 준만에게는 다른 방향으로 얘기해야 한다.
준만을 힐끔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에야 회장님이 쌓아놓은 기반으로 청와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저희 마음껏 사업을 하지만 그게 영원하겠어요?”
“그건….”
“건설권 지분 조금이나 이름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앞장서서 따오면 청와대가 두 손 들고 저희를 반기겠죠. 이제 회장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직접 컨택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거라고요.”
“개발중단이나 대금 미지급 같은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어. 막대한 손해는 어떻게 감수할 거냐.”
준만의 말대로 개발중단 혹은 대금 미지급 같은 경우가 일어나면 메인 시공사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태선건설뿐만 아니라 다른 건설사들도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겁니다. 자리에 나가긴 하지만 지목을 받으면 어떻게 할지, 유찰이 되면 어떻게 될지 머리가 터질 지경이겠죠. 저희는 생산적인 회의를 하자고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저희는 초반엔 다른 건설사들과 같이 입찰을 포기하려는 스탠스로 갑시다. 그리고 모두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때, 태선건설이 구세주처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입찰을 하겠노라고. 대신.”
“대신?’
내가 말을 하다 말자 준만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을 얻을지 이제부터 차근차근 회의해 봅시다.”
준만이 내 말을 듣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 하하.”
준만이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찰을 포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회의는 어느새 어떻게 이득을 취할지를 정하는 회의로 바뀌었다.
감당해야 하는 손해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던 임원들은 어떻게 이득을 취할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번영건설이 중동 쪽에 사업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료시끄 건설이 시드니의 브릿지 시공을 맡았다고 하는데 저희 쪽에 분배를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목으로 유명한 카지마 건설에서는 2002년 월드컵 경기장으로 쓰일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시공 중인데 근처에 관광건물들에 대한 시공권, 몇 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득에 대한 아이디어는 날이 저물도록 막힘없이 이어졌다.
현물을 받을 수 없으니 주로 시공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자재비 분배에 대한 의견도 있었다.
이상적으로 원하는 것과 현실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저울질하느라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회의가 끝났을 때는 다들 열을 토해내느라 지쳤는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준만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박사장만 남고 모두 나가 봐.”
“네. 고생하셨습니다.”
임원들이 모두 준만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넓은 회의실에는 이제 나와 준만, 태선 건설의 사장인 박현욱만 남았다.
준만이 현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강빈이는 처음 보지? 건설사 맡고 있는 박현욱 사장이야.”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현욱의 낯빛은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였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원래 인상이 그런 것 같았다.
어두운 낯빛으로 웃고 있는 걸 보니 사람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건설 맡고 있는 박현욱이라고 합니다. 강빈 도련님 얘기는 서사장님 오신 뒤로 침이 마르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이란 지칭이 괜히 어색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현욱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인상과는 달리 따뜻한 손이었다.
“그럼 소개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강빈아. 네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니 함께 하는 건 어떠냐. 너도 물산 일 한 번은 경험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
고민이 되긴 했지만 준만의 부탁을 수락하기로 했다.
IT기업 매도나 구글 투자 같은 중요한 일들은 끝냈고 태선물산의 자리를 더 공고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박사장님. 제 명함입니다.”
“예. 이건 제 명함입니다.”
준만이 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일이 바쁠 텐데 이렇게까지 도와줘서 고맙다.”
“저 생각해서 보내는 거 다 압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하하.”
준만이 나를 굳이 마카오에 보내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각국의 인사들이 모이는 입찰건은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입찰 건에 대한 경험은 없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여기기로 했다.
준만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저녁은 집에서 할까? 아니면 좋은 곳에 가도 좋고.”
“저 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회장님댁?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하하. 무슨 일은요. 마카오 가기 전에 안부 인사나 드리려고요.”
소개팅 결과를 보고하러 간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준만이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냥 모른 체했다.
내가 그냥 넘어가려는 걸 눈치챈 준만은 다시 마카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일정표는 내일까지 팩스로 갈 거야. 그 외에 필요하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아, 마카오로 가기 전에 박사장한테 건설 관련된 지식 짧게라도 배우고 가면 좋겠네. 박사장 괜찮지?”
“그럼요. 저는 언제든지 괜찮으니 도련님 편하실 때 말씀해주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처음엔 어두워 보였던 현욱이 자꾸 미소를 짓자 사람이 달라 보였다.
두 사람을 향해 인사하고 자리를 나왔다.
***
진태의 저택, 지하에 있는 차고에 도착했는데 못 보던 차가 눈에 띄었다.
“임기사. 저 차 본 적 있어?”
“아니요. 저는 처음 봅니다. 대표님과 약속이 있으실 때, 천회장님을 제외하면 다른 손님을 부르신 적이 없는데 누구일까요?”
“신차라기에는….”
요즘에는 덜하지만 3년 전만 해도 진태는 1년 새 차를 4번이나 바꿀 정도로 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지금 차고에 있는 진태 소유의 차만 해도 스무 대가 넘었다.
부가티, 포르쉐, 벤츠, 이 3대의 가격만 해도 40억 원이 넘어갔다.
지금 내가 의문을 표하는 이유는 눈앞에 있는 외제차가 화려한 진태의 차들에 비하면 볼품없었기 때문이다.
진태가 자주 만나는 재벌그룹의 회장들은 아닐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궁금증이 일었다.
“갔다 올게.”
“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임기사의 인사를 받으며 서재로 향했다.
늘 밝게 웃으며 맞아주던 가사도우미들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아주머니 한 분이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당황하며 인사했다.
“아, 도련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 집안 분위기가…”
그때,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격정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꺼지란 말 못 들은 게야!”
진태가 이 정도로 감정을 표했던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열려있는 서재의 문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보아 진태의 분노를 유발시킨 인물은 동만과 경주인 것 같았다.
둘이 온 이유야 뻔하다.
국회의원과 재벌집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하루아침 사이에 빼앗겼으니 콩고물이라도 빌어먹기 위해 온 것일 터.
그러나 사업가의 철칙으로 가득 찬 진태가 그걸 그냥 두고만 볼 리는 없었다.
문틈 사이로 경주가 무릎을 꿇은 채 손바닥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는 것이 보였다.
“회장님! 제발 자식들만 살려주세요. 창호도, 창훈이도 아직 창창한 애들이잖아요. 애들 봐서라도. 네?”
진태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은 경주가 허튼짓을 하면 당장이라도 제압할 기세였다.
바닥 한쪽에는 진태가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 찻잔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동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옆에 서 있었다.
진태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딴 이야기 하려고 찾아온 게야? 그리고 서동만, 이 못난 놈아. 너는 사내 새끼가 자존심도 없더냐? 와이프가 분수를 모르고 일을 벌이려고 하면 너라도 말려야 될 것 아니냐.”
동만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분을 토해내듯 말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똥개 내쫓듯이 내칠 수는 없는 거라고요.”
“똥개? 또옹개? 하, 말 잘했다. 밥 주고 훈련만 시키면 대소변도 가리는 똥개보다 네가 나은 게 뭐냐?”
“자금 횡령이나 브로커 통한 비자금은 어느 재벌집만 봐도 다 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도 하시는 것 아니냐고요! 그런데 왜 저한테만 이렇게 엄격하게 구시냐구요.”
동만은 아예 막 나가기로 결심했는지 팔까지 동원해가며 제 뜻을 알렸다.
진태는 더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나가라고 손짓했다.
“너네처럼 대놓고 하더냐? 너네가 하려던 건 태선 전체를 물 먹이려던 거야. 오실장. 애들 끄집어내. 그리고 앞으로 우리 집 못 들어오게 문단속 잘하고.”
“예. 알겠습니다.”
차영균 경호실장이 나에게 오고, 새로 뽑힌 경호실장인 모양이었다.
경주는 예상했던 대로 몸부림치며 제압을 빠져나오려고 애썼고 동만은 진태를 가만 쳐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서재의 앞에 서 있던 나와 경주가 가장 먼저 마주쳤다.
“너 때문에 내가!”
경주는 오실장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악을 질렀다.
동만은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경주의 뒤를 따라 걸어가다가 뒤돌아보았다.
“강빈아. 나는 너한테 악의 없다. 다만 가족한테 꼭 피를 봐야 했냐?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거냐.”
“저라고 손에 피를 묻히고 싶었겠습니까. 태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큰아버지가 하신 일은 태선에 위협이 되는 일이었어요.”
내가 똑바로 쳐다보며 응시하자 동만은 붉어진 얼굴을 돌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감정에 호소해 뭐라도 하나 건져보려는 속셈인 것 같지만 나에겐 그럴 만한 동정심은 전혀 없다.
서재로 들어가자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진태가 보였다.
사납게 치켜올려져 있던 눈썹이 나를 보며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