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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93화 (93/249)

#93화

뛰어난 외모로 신문에 실렸다는 진태의 말이 대번에 납득이 갈 정도로 천예나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외모보다도 재벌가답지 않은 소탈한 말투나 행동 가짐이 더 시선을 끌었다.

“저희 언니가 운영하고 있는 호텔이에요. 전망이 너무 좋죠?”

“네. 좋네요.”

예나가 허튼 생각이 들지 않도록 부러 무뚝뚝하게 대했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저랑 만나실 생각 없으시죠?”

“네?”

곧바로 정곡을 찌르자 당황스러웠다.

예나는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나오기 전에 강빈 씨에 대해서 검색해봤어요. 하고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던데 연애 같은 거에 눈 돌릴 틈이 어디 있겠어요.”

진태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형식은 갖추자는 마음을 갖고 왔는데, 이렇게 되면 사실대로 토해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무작정 칭찬을 하기로 했다.

“사실… 맞습니다.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예나 씨가 매력이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본 누구보다 아름다운….”

“푸하하!”

형식상의 말들을 던지자 예나가 입을 가리는 것도 잊은 채 웃었다.

나는 말없이 냅킨으로 볼에 튄 침을 닦아냈다.

“아, 죄송해요. 강빈 씨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요. 너무 변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호감을 갖고 있는 게 이상한 거죠.”

“예나 씨 정도의 미모면 모든 사람이 호감을 가질 겁니다.”

“강빈 씨도요?”

“저는….”

“그거 봐요. 그리고 호감이 있다 한들 눈 돌릴 시간 없잖아요.”

기껏 나온 소개팅에 상대가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나는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어른들 때문에 나왔는데, 예나도 같은 마음인 것처럼 보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진태나 두완에게는 좋은 시간 보내고 왔다는 것만 알리면 될 것이다.

그때, 직원이 차반을 가져와 우리 앞에 놓았다.

직원이 직접 차를 우리려고 하자 내가 만류했다.

“제가 직접 할게요. 우리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정장을 입은 직원이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공손하게 인사한 뒤 물러났다.

찻잎을 보니 홍차였다.

차를 우려서 예나의 찻잔에 따르고 내 찻잔에는 물만 따랐다.

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언니 창고에 있는 특별한 차인데, 차를 싫어하시나 봐요?”

“아니요. 좋아합니다. 다만 늦은 시간에 카페인이 들어간 차는 피해요. 다음 날 지장이 가지 않기 위해서는 수면시간을 지켜야 되거든요.”

저녁 이후의 시간에는 카페인이 들어간 모든 음식을 피했다.

커피에 비해서 홍차가 갖고 있는 카페인 함량은 낮지만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매일같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했다.

가끔 마시고 싶을 때는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은 루이보스나 차가버섯차를 즐겼다.

“그거 농담이죠? 세상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차를 피하다니.”

“농담 아닙니다.”

“....”

정적이 일어났다가 예나가 푼수처럼 웃었다.

“저희 아빠보다도 고지식한 거 아세요?”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예나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전생의 나이를 생각하면 예나의 아빠보다 내가 살아온 세월이 더 길 테니까.

이제 본론을 꺼낼 때가 온 것 같다.

“워싱턴포스트에서 쓰신 칼럼은 잘 봤습니다.”

“미국에도 자주 가신다더니 챙겨 보시나 봐요.”

예나가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긴 젊어 보이는 나이에 그 워싱턴포스트의 경제 칼럼니스트라니.

그녀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위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글솜씨가 훌륭해서 챙겨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지내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 저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소속되어서 일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저는 뉴욕타임즈의 편집국장이 될 거예요. 커리어를 쌓으려면 오히려 프리랜서로 일하는 게 유리하구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예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고 그것으로 글을 쓰는 게 너무 재밌어요.”

예나는 진심으로 행복한 듯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참! 재작년에 제프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강빈 씨도 잘 알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만한 사람들이 더 있나요?”

제프와의 끝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었다.

예나는 칼럼니스트답게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곧장 말을 돌렸다.

“음…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최근 떠오르고 있는 안젤리나 졸리네요. 연예계 쪽 칼럼니스트가 그날 펑크를 내서 제가 갔거든요. 그리고 강빈 씨라면 알 것 같은데, 짐 켈러를 가장 최근에 인터뷰 진행했어요. AMD의 수석 설계자예요.”

“짐 켈러요?”

짐 켈러라니.

켈러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세계적인 반도체 공학자다.

AMD뿐만 아니라 애플, 테슬라 같은 누구라도 알 법한 걸출한 기업에서도 중책을 역임했으며 인텔에서는 수석부사장을 역임했다.

멀티코어 프로세서 개발의 기초가 되는, ‘하이퍼트랜스포트’를 개발해내며 멀티코어 프로세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도 현역으로 일하며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다.

“강빈 씨 표정이 저를 봤을 때보다 반짝이는데요?”

“오, 오해입니다.”

내 표정변화를 눈치챈 예나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잘 아시나 봐요?”

“그럼요. AMD64를 개발해내며 세간에 파란을 일으킨 인물아닙니까. 지금 CPU 대부분에 채택되고 있는데 모를 수야 없죠. 실제로는 어땠나요?”

“사진으로 봤을 때는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까 엄청 유쾌했어요. 미국식 농담도 많이 들었고요. 엄청 큰 개미를 자이앤트(Gi-ant)라고 하는 거 있죠? 다른 사람들은 다 정색하는데 저 혼자 웃으니까 마음에 들었는지 종종 연락도 해요.”

저런 농담에 웃다니, 아까 고지식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켈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면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즐거웠나 보네요. 칼럼니스트 일을 하면서 어려운 건 없었나요?”

“취재를 나가면 가끔 저만 유일한 여성 기자예요. 현장에 들어가려고 하면 제가 취재기자라고 생각도 안 하는지 보안 담당이 막기도 한다니까요.”

“그래도 그 자리까지 올라가신 걸 보면 대단하네요.”

“에이, 강빈 씨만 할까요. 아까 말했죠. 강빈 씨에 대해서 검색하고 왔다고. 사실 오늘 자리에 나온 이유도 강빈 씨가 알아주는 투자자인 이유가 컸어요.”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이제 제안을 할 차례다.

“예나 씨가 진행하는 인터뷰라면 저도 좋습니다.”

예나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강빈 씨는 지금껏 딱 한 번만 인터뷰했잖아요. 그것도 2년 전이죠? 그 뒤로 한 번도 하지 않으셔서 거절하실까, 걱정했는데 고마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경제 칼럼니스트니까 잘 아시겠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조건이요?”

“짐 켈러를 소개해주세요.”

예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내가 짐켈러를 만나고 싶어서 인터뷰를 수락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눈치가 빠른 모습을 보며 두완이 왜 그렇게 아끼는 손녀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정도야 당연히 해드릴 수 있죠. 그럼 인터뷰 날짜 잡을까요?”

“그러시죠.”

내가 내민 손을 예나가 꽉 쥐고 흔들었다.

나와 예나 모두 처음에는 소개팅으로 나왔지만, 어느새 직업의식으로 가득 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에릭한테 전화가 왔다.

흥분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아마존닷컴이 어제 오늘 합쳐서 10프로 급락했고, 퀄컴은 15프로 급락했어요. 거품이 터지기 시작한 걸까요?”

“1차 붕괴가 시작된 거야. 지금 상황을 일시적으로 유지하다가 더 큰 폭탄이 터지겠지. 계속 주시하고 있어.”

“알겠어요.”

IT버블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끝나고 있었다.

공매도를 진행했던 기업들은 지금 발에 불똥이 튄 것처럼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전화를 끝내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늘, 태선물산의 최상층 대회의실에서는 마카오 타워 건설입찰 건에 대한 임원회의가 한창이었다.

준만이 손을 들어 회의를 잠깐 멈추고 옆자리로 불렀다.

“안 와도 괜찮다니까. 내 생각 해준 거야?”

“제가 아버지께 부탁드려서 물산 맡으신 건데 저도 책임감 가져야죠.”

이번 임원회의에는 태선물산의 주요임원진들을 비롯해 태선물산의 자회사이자 이번 사업을 진행할 태선건설의 임원진이 모였다.

준만의 옆자리에 앉자 준만이 회의를 재개하라고 말했다.

“아, 그리고 서대표 왔으니까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 진행해.”

“알겠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진행하는 마카오 타워 건설은 내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쁘라이야 그란드만의 남반 호수 위에 지을 예정으로 완공할 시 세계에서 10번째로 높은 건축물입니다. 예상 시공비는 24억 달러, 한화 약 2조 9천억 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마카오 타워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었다.

마카오 타워는 컨벤션 시설뿐만 아니라 주강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유명한 곳이었다.

투명한 발판을 걸으며 하늘을 걷는 느낌을 주는 체험 등 다양한 어드벤처 시설은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지금 마카오의 상황을 안다면 투자는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불과 한 달 전인 1999년 12월 20일,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통치한 지 112년 만에 중국에 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청나라 말부터 이어져 내려온 포르투갈령의 마카오가 드디어 종식되고 특별행정구로 탈바꿈한 것이다.

“아직 마카오는 혼란스러운 정세이기 때문에 변수가 많아 섣불리 입찰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한국, 일본,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미국 총 6개국의 정부와 함께 기술 업체를 선정했고, 청와대가 선정한 건설 업체가 태선건설과, 번영건설, 현암건설로 총 세 곳입니다.”

현암건설은 GB택배의 첫 물류센터를 지을 때 이용했던 건설사였다.

그 당시엔 상장한 지 얼마 안 된 신생 기업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그룹에도 포함되지 않은 채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건설사였다.

번영건설은 재계서열 9위 그룹 번영그룹의 건설사로, 전신인 번영토건사로 따지면 태선건설보다 역사가 깊은 곳이다.

“마카오 타워 건설은 다국적 사업으로 명명되긴 했습니다만, 메인 시공사 외에 다른 시공사들은 이름만 올릴 뿐, 실질적인 시공은 메인으로 뽑힌 곳에서 다 진행할 겁니다.”

발표자는 특히 ‘메인’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애초에 명칭을 다국적 사업으로 잡았기 때문에, 모든 시공사가 이름을 올리긴 하겠지만 말 그대로 이름만 올릴 뿐, 실질적인 시공은 메인 시공사가 도맡을 것이다.

“개발중단의 위험이 다분하고 만약 시공을 끝냈다고 해도 대금을 제대로 받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제관계를 위한 청와대의 압력으로 한국 최고의 건설사인 태선 건설이 입찰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더해 저희 태선 건설은 입찰에 참여하는 조건만으로 인천여객 부두 증축 건설 건을 받아낸 상황입니다. 대신 메인 시공사가 될 기업에게 어느 정도 지분을 양도받아야 하고 아예 유찰이 되어버린다면 위약금이 꽤 큽니다. 이에 오늘 회의의 목적은…”

한 마디로 메인 시공사가 독박을 쓴다는 소리였다.

“다른 기업에서 건설권을 가져가게 만드는 것. 맞죠?”

내 말에 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들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거절할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거냐?”

“아뇨. 마카오 타워. 저희가 가져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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