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태선 반도체 내에 있는 회의실에서 브리핑을 진행하기로 했다.
반원으로 된 기다란 테이블 가운데에 진태가 앉고 양옆으로 치동과 재만, 그 옆으로 나와 범준이 앉았다.
진태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범준을 바라봤다.
“너네 반도체가 뭔지는 아냐?”
증권맨이라면 반도체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다.
특히나 지금 와 있는 태선반도체라면, 현재 한국의 반도체 대장주가 아니던가.
태선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는 물론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점유율을 착실하게 늘려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반도체의 원자재주들도 그에 따라 요동치니, 반도체에 대한 상식은 기본으로 장착해야 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한 나와 달리 재만은 불안한 눈빛으로 범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가 어디 기술자입니까. 기술자들 굴려서 돈 불리는 게 저희 일이죠.”
범준은 모르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서인지 태연한 척 굴었다.
범준의 모습을 보며 진태가 혀를 끌끌 찼다.
“좋은 기술자는 어떻게 찾아낼 건데?”
“그, 그건….”
“네가 너한테 반도체를 만들어서 오라디? 기본적인 건 알고 있어야 될 것 아니냐. 이 머러리 같은 놈은 왜 데리고 온 거야?”
“교육하겠습니다.”
재만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범준은 붉어진 얼굴로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반도체는 이제 태선그룹 주력 사업 중 하나다. 직접 경영하는 곳은 아니더라도 다들 상식은 장착해. 강빈이 너는 안다고 했지?”
“예. 회장님.”
“한 번 읊어 봐.”
무심하게 툭 뱉는 것 같았지만 진태의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그 기대에 보답해 주지.
“반도체는 말 그대로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 정도인 물질입니다.”
전기 전도율이 구리 같은 도체와 유리 같은 부도체의 중간 정도의 물질을 반도체라고 한다.
매우 낮은 온도에서는 부도체처럼, 실온에서는 도체처럼 동작하기 때문에 전압이나 열, 빛의 파장 등으로 전도도를 조절할 수 있다.
진태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끝이야?”
“하하. 반도체라면 오늘 밤을 새울 때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게 어디까지의 설명입니까?”
내 말에 진태가 놀란 듯 눈을 꿈뻑였다.
반도체에 대해서 잘 알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듯했다.
“여기 반도체가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있으니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거라.”
범준이 힐끔거리며 눈치를 봤다.
“그럼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반도체는 조건에 맞춰서 전기가 통하는 물질로 필요에 따라 전류를 조절하는 데 사용됩니다. 반도체는…”
“그만. 충분하다.”
재만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진태는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재밌는데 왜 그러냐. 더 해 봐.”
“그럼 정의에 대해선 이 정도로 하고, 앞으로의 전망만 짧게 더 얘기하겠습니다. 2000년대 하반기에 들어서면 반도체를 통해 만든 플랫폼으로 세계적인 광대역통신이 보편화될 겁니다. 디지털 TV는 물론이고 의료시스템 또한 네트워크화가 되겠죠. 이에 대해선 오치동 사장님이 더 잘 알겠지만요.”
“허허. 사업하느라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 잘도 아는구나.”
“제가 IT쪽 투자한 게 얼만데 모르면 안 되죠.”
진태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치동도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대개 IT산업과 관련된 줄만 알지. 전문지식은 없는데 서대표님은 많은 걸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서대표님이 예상하신 전망까지 저희와 동일합니다.”
“상식만 있는 겁니다. 하하.”
진태의 왼편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오른쪽에 앉은 재만과 범준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앞에 세팅을 하던 직원이 대화가 어느 정도 끝나자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회장님. 회의 준비 끝났습니다. 시작할까요?”
“진행해.”
“그럼 2000년 1월 9일 태선반도체 제1차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직원이 회의실 전면에 화면을 띄웠다.
QL반도체와 합병 이후 국내시장 점유율 변화와 세계시장 진출에 따른 공급 및 수요가 그래프로 나타났다.
“한국 시장 안에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세계시장 진출 이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에 대한 여파로 한국 시장을 향한 해외원자재 기업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원자재 생산처를 추가로 계약해야 합니다.”
진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한국 안에서는 그만한 물량을 감당할 곳이 없다는 거지?”
“맞습니다. 1차로 알아본 곳은 중국이었는데, 지난해부터 중국 화력발전소들이 전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서 포기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전력 소모 자체를 줄일 목적으로 가공 공장들의 기동을 중단시킨 게 큽니다.
“텅스텐은 그래도 중국 거 써야 될 거 아니야.”
‘텅스텐’은 스웨덴의 이름으로 ‘무거운 돌’을 뜻한다.
탄도 미사일, 전구의 필라멘트 제조에도 쓰이지만 반도체 금속 배선에도 사용되는 반드시 필요한 원자재였다.
진태의 옆에 앉아 있던 치동이 대신 답했다.
“중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80프로가 넘는 것은 맞지만 매장량은 미국이 더 큽니다. 그래서 회장님께 제안드리고 싶었던 것이 미국기업에 개발비를 먼저 주고 텅스텐을 미리 선점하자는 것입니다.”
“흠. 할 거면 바로 진행해. 중국 쪽 생산 억제됐으면 국제 가격 상승은 금방이야. 그리고 개발 전 기업을 선점한다면 그때까진 어떻게 할 거야?”
“그때까지는 손해 감수하더라도 중국 쪽 기업에 계속 컨택하겠습니다. 오늘 브리핑 끝나고 밤새워서라도 대책회의 진행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치동이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만이 치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린이랑 백린은? 지난번 회의 때 중국 쪽 더 알아본다며.”
‘황린’과 ‘백린’이라면 메모리 반도체의 원료들이다.
태선반도체의 주력이 메모리 반도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원자재들이었다.
“컨택하고 있던 기업이 있었는데 계약 직전에 엎어졌습니다. 인텔 쪽에서 로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로비로 쓰라고 준 돈은 어디 팔아먹고?”
재만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그나저나 회의실에서 로비라는 단어가 남발할 줄은 몰랐다.
태선전자쯤 되는 회사를 키우면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겠지만.
치동은 억울하다는 듯 손을 들려다 말고 차분하게 말했다.
“금액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중국은 지속적인 교류와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이제 막 확장하려는 저희와 이전부터 중국과 거래하던 인텔이 같은 조건일 수는 없잖습니까.”
진태가 손을 들어 말을 끊고 말했다.
“돈 더 올리고 어떻게든 잡아내. 아니면 다른 쪽 빠르게 알아보든가.”
“알겠습니다.”
진태까지 나선 이상 원자재 공급처를 찾기 전까지는 집에 가기 힘들 것이다.
사장답게 치동의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이제 막 임원을 달기 시작했을 중년의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 이후로도 중점적으로 다뤄진 사안은 원자재 부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 외에 경영과 시장 확보와 관련된 문제는 치동의 시원한 답변으로 오래 다루지는 않았다.
“이만하면 됐어. 내 옆에 앉은 녀석들 빼고 다 나가봐.”
진태의 말에 회의실에 들어와 있던 임원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다 나간 것을 보고 진태가 치동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사장. QL 전 대표는 어때? 인수부터 합병까지 우리 마음대로 주물렀잖아.”
“기술만 만질 줄 알지 사내 정치나 경영 쪽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친구입니다. 적당한 시기보다가 내치겠습니다.”
“머리는 좋은 놈 같으니까 내칠 때 내치더라도 단물 다 빼먹어.”
“걱정하시지 않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QL의 전 대표가 아직 회사에 남아 기술고문 역할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나와 범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브리핑이 끝나고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이다.
현재 태선반도체가 수출하고 있는 주력 사업 중 하나인 에이더는 QL과 태선의 합작품이었다.
‘에이더’는 반도체 레이아웃을 설계하고 검정하는 소프트웨어다.
범준이 재만을 향해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QL 전대표는 뛰어난 기술자 출신에 지금 고문 역할도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내칠 필요까지 있습니까?”
“QL의 일반 기술자는 내칠 필요까지 없겠지만 대표는 달라. 지금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양 기술개발에만 매진하고 있지만 대표가 해외 쪽으로 등 돌리면 골치 아파진다.”
전형적인 토사구팽.
이런 얘기를 우리 앞에서 하는 이유는 범준과 나에게 경영에 대해서 알려주려는 진태의 의도일 것이다.
치동의 표정을 보니 긴장한 기색이 눈에 띄었다.
사장 자리에 앉은 그라도 진태의 눈 밖에 나면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재만과 범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진태가 말했다.
“범준이는 이런 쪽으로는 재만이가 타고났으니까 잘 배워 두거라. 강빈이, 너도 사람 쓰는 법을 잘 알아야 돼. 너희 둘 다 기업가 아니냐.”
“명심하겠습니다.”
나와 범준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나 또한 분명히 나를 위협하는 사람을 쳐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내가 믿을만한 사람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천일그룹의 막내 손녀, 천예나를 만나기로 한 곳은 잠실에 위치한 천일호텔의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그래도 같이 가야 됩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차실장. 이거 소개팅이라고.”
경호실장으로 늘 내 곁을 따라다니는 영균이 레스토랑까지 같이 들어가려고 하자 만류했다.
아무리 명목상으로 하는 소개팅이라지만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함께한다면 상대가 무례하게 생각할 것이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겠습니다.”
“식당 전체를 예약했다는데 어디에 앉게? 그냥 쉬고 있어.”
“그럼 식당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호출하십시오.”
“마음대로 해.”
결국 영균을 식당 앞에 세워두고 들어갔다.
수면까지 줄여가며 진태의 곁을 지키던 게 습관이 된 것 같다.
재산이 많아지고 태선가 내에서도 내게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의 경호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조금 과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도 영균이 내 사람이 되고 난 이후, 확실히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미술 경매를 끝내고 형주와 솝과 갔던 ‘장 쥬’가 연상될 정도로 전망이 탁 트여 있었다.
레스토랑 안쪽 테이블에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단정한 체크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짙은 갈색의 머릿결이 눈에 띄었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서강빈입니다.”
내 인사말과 동시에 그녀가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백옥처럼 하얗지만 창백해 보이지는 않았다.
청아하고 반달 같은 눈이 나를 바라보았고, 옅은 파스텔톤의 붉은 입술이 미소를 띠며 천천히 움직였다.
“천예나라고 해요. 반가워요.”
빙긋 웃고 있는 예나에게 미안하지만, 소개팅할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라면 과연 어떤 기업가와 연결되어 있을까.